▲문경 요성역(堯城驛)수운 최제우 대신사는 - 충주 달천역(達川驛) 출발 →1863년 12월 28일 문경 요성역(堯城驛) 도착한다. 동학도들이 마중 나와 있었고, 수운 선생은 마지막 설법을 하셨다. 피체 노정(하행길)
동학집강소
계해(1863)년 12월 11일(양.1.19) 아침, 선전관 정운귀는 서둘러 최제우(최복술), 이내겸의 손발에 쇠사슬로 된 자물쇠를 채우고 서울로 압송할 준비를 하였다. 이때는 소한과 대한 사이의 매우 추운 계절이었다.
첫 번째 도착지는 영천이었다. 이때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수운 선생께서 영천에 이를 즈음 하졸들의 언행이 불경스럽고 멸시함이 말할 수 없었다. 그러자 선생을 태운 말이 발굽을 땅에 붙인 채 전혀 움직이질 않았다. 수십 명 하졸들은 크게 놀라고 당황하면서, "소인들이 과연 선생을 몰라 뵈었습니다. 오직 선생께서 편안히 행차하기를 바랄 뿐입니다"고 아뢰었다. 그러자 다시 말이 홀연히 달리기 시작했다.
하졸들이 행패 부린 것은 당시에는 '죄인의 친척으로부터 뇌물을 바치게 하려는 수단'으로 행한 일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관행을 미리 아는 죄인의 인척들은 뇌물을 가지고 따라가다가 행패를 부리면 곧 뇌물을 바쳤다고 한다.
여기서부터 수운 선생의 행적을 수차례 답사하면서 꼼꼼하게 정리하여 놓은 표영삼 선생의 기록문을 중심으로 교중, 관변 등 여러 문헌을 참고하여, 서울 압상과 경상 환수의 과정 즉 피체 노정을 정리한다.
수운 선생은 12월 11일에 경주를 출발하여 영천(11일)→대구(12일)에 이르러 일박하고 금호(琴湖)를 거쳐 하루 60∼70리씩 서울로 이동하였다. 또 선산 상림(13일)→상주 낙동(14일)→상주 화령(15일)→보은(16일)→청안(17일)→직산(18일)→오산(19일)→과천(29일) 순서로 이동하였다.
당초 정운귀는 낙동역에서 영남로를 따라 새재를 넘어갈 작정이었으나 노선을 바꾸어 화령쪽으로 갔다.
이때의 상황을 <도원기서>에, '정운귀(정구룡)는 당초 새재를 넘어가려 했으나 동학도인 수천인이 모였다는 말을 듣고 겁이 나서 화령길로 바꾸어 보은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16일 저녁에 보은 역참에 도착하니 뜻밖에도 도인을 만나 도움을 받았다. <수운선생사적>에 '고을의 이방은 양계희(梁啓熙)라는 도인으로 성심껏 조석을 받들었고 먼 길에 쓰라고 돈 다섯 묶음까지 주었다'고 한다.
내가 비록 억울한 누명의 죄인이나
조선 왕조는 12월 8일(음, 양 1864년 1월 16일) 철종이 사망하고 겨우 12세인 고종이 등극하게 되자 흥선군(이하응)이 대원군이 되어 정치를 총괄하는 국정의 변화를 맞이한다. 그래서 수운 선생을 심문하여 다룰 여유가 없었다.
결국 최복술 등 두 죄수에 대해 포청은 서울로의 압송을 거둬들이는 환수(還收) 조치하고, 경상 감영으로 보내 심문하라고 지시하였다. 또한, 경주에 수감된 죄인들도 아울러 그 시작과 끝을 일일이 조사하여 죄에 대한 본질, 가벼움과 무거움을 가려서 국정을 총괄하는 비변사 즉, 묘당에서 제의하여 처리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때 수운 선생은 국상(國喪)의 소식을 듣고, "내가 비록 억울하게 잡힌 죄인이나 나라에 슬픈 일을 당하였으니, 이는 불행한 일이다"하며 애통함을 그치지 않았다.
그럼, 1863년 12월 21일 비변사에서 정운귀가 보고한 동학의 정형을 다시 조사할 것을 아뢴 내용을 살펴본다.
고종실록 1권, 고종 즉위년 12월 21일 계사 2번째 기사 1863년 청 동치(同治) 2년, 비변사에서 정운귀가 보고한 경주의 동학의 정형을 다시 조사할 것을 아뢰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선전관(宣傳官) 정운귀(鄭雲龜)가 서계(書啓)한 경주(慶州)의 동학(東學) 죄인 최복술(崔福述_최제우) 등의 일에 대하여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최가가 비록 두목이라고 하더라도 도당(徒黨)이 이미 번성하였으니 응당 철저히 캐내야 할 것이나, 거의 천 리나 되는 땅에서 기찰과 체포가 계속 이어지면 연로(沿路)에 소란을 끼치게 될 것이니 매우 민망합니다.
최복술 등 둘은 포청(捕廳)으로 하여금 본도(本道)의 감영(監營)으로 압송하게 하고 경주부에 가두어 둔 죄인들과 아울러 일일이 그 내력과 소행을 조사합니다. 또 경중(輕重)을 나누어서 이치를 따져 중요한 사실을 임금에게 알리고, 조정의 지시 등을 의논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대왕대비가 윤허하였다.
경상도 경주 동학 선생이라는 죄인 최제우를 해당 감영에 보내어 문초하라는 전교가 내려졌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12월 26일 경에 수운 선생과 이내겸은 포청 관졸들에 의해 과천을 떠나 대구로 향했다. 용인 양지역(陽智驛)에서 일박하고 27일에는 충주 달천역(達川驛)에, 28일에는 문경 요성역(堯城驛)에, 음력 그믐날인 29일에는 유곡역(幽谷驛)에 이르렀다.
수운 선생이 되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동학도 수백 명이 28일에 새재 첫 관문인 주흘관(主屹關) 상초곡(上草谷) 마을에 모였다. 충주(忠州) 달천(達川)에서 일찍 떠났으나 눈 길 때문에 저녁 7시경에야 상초곡에 당도하였다.
동학도인들은 관솔불을 켜들고 수운 선생의 뒤를 따르며 눈물을 흘렸다. 이때 수운 선생은 "나의 이 길은 천명에서 나온 것이니, 제군들은 안심하고 돌아가라"하자 도인들은 좌우로 나뉘어 선 채 일제히 절을 하고 눈물로써 배웅하였다는 기록이 당시 안타까운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동학도인들이 어렵지 않게 수운 선생을 구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운 선생은 자기 한 몸을 바쳐 도를 살리고 세상을 구제하는 데 희생하기로 작심하여 그 어떤 구제책도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는 하늘의 뜻이요 선생의 사명이었다.
<도원기서>에는 "과천에서 떠나 새재를 넘어 문경 초곡에 이르렀다. 수백 명의 동학 도인들이 여러 주막에서 엿보는가 하면 혹은 관솔불을 켜 들고 따르기도 하고 혹은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기도 했다. 이렇게 애절한 정경이 벌어지니 어린아이 마음을 보는 것 같다"고 기록하였다.
문경읍에서 동쪽으로 2km 떨어진 요성역에 도착한 것은 캄캄한 밤 8시경이었다. 이튿날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음 12월 29일)이므로 일찍 서둘러 점촌(店村)쪽에 있는 유곡역으로 향하였다. 점촌에서 북쪽으로 4km 지점에 있는 유곡역에 당도한 것은 점심때쯤이다. 이 역은 영남로(嶺南路_영남대로)의 18개 역참을 관할하는 찰방역(察訪驛)이다.
새해 설맞이로 사흘을 체류했다가 1864년 1월 4일(음)에 다시 대구로 향하였다. 상주 낙동역에 이르러 일박하고 5일에는 선산군 상림(上林)을 거쳐 1월 6일(1864년 2월 13일) 마침내 경상 감영인 대구에 도착한다.
수운 선생은 12월 10일에 체포되어 1월 6일까지 거의 한 달간 매서운 한겨울 바람을 맞으며 노상(路上)에서 참혹한 고생을 했다. 그리고 경주 옥에 있던 동학도인 20여 명도 이곳 대구 감영으로 옮겨와 수운 선생과 함께 수감된다.
수운, 홑옷의 칼바람 참혹한 겨울, 노상에서 끌려 다닌 한 달간의 생지옥, 도인들의 피눈물, 절하고 울고 부르짖는 애통한 절규, 아! 성자의 모습은 이리도 참혹한 것일까? 미어지는 가슴, 쏟아지는 눈물, 수운은 왜, 그 길을 자초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