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운 최제우, 조선왕조에 피체되다

[동학대서사시, 모두가 하늘이었다 16] 수운 최제우 선생 탄신 200주년, 동학농민혁명 130주년, 동학! 동방의 가르침이다

등록 2024.11.18 09:42수정 2024.11.18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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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 대신사 친필 거북귀(龜_구)자 거북귀·구(龜)자는 수운 선생이 남긴 유일한 친필이다. 수운 선생은 동경대전과 유동유사, 시문 등 많은 친필경서를 남겼지만 피체당시 모두 압수되었고, 일부 제자들이 소장하고 있는 친필 역시 모두 빼앗기거나 분실되었다. 본 거북귀(龜)자는 전북 부안 천도교 호암수도원 독공수련방 벽지 속에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다가 방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벽지를 모두 뜯어내다가 수운 대신사 존영과 함께 발견되었다. 거북‘龜귀·구’자를 파자해보면 가운데‘中중’ 칼‘刀도’ 바를‘正정’ 눈‘目목’이다. ‘바르게 뜻을 세워 만물의 이치를 헤아려라’는 의미이다. 또 거북이의 느린 동작을 빗대어 무슨 일이든 서두르지 말 것을 뜻하는 의미도 있다.
수운 대신사 친필 거북귀(龜_구)자거북귀·구(龜)자는 수운 선생이 남긴 유일한 친필이다. 수운 선생은 동경대전과 유동유사, 시문 등 많은 친필경서를 남겼지만 피체당시 모두 압수되었고, 일부 제자들이 소장하고 있는 친필 역시 모두 빼앗기거나 분실되었다. 본 거북귀(龜)자는 전북 부안 천도교 호암수도원 독공수련방 벽지 속에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다가 방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벽지를 모두 뜯어내다가 수운 대신사 존영과 함께 발견되었다. 거북‘龜귀·구’자를 파자해보면 가운데‘中중’ 칼‘刀도’ 바를‘正정’ 눈‘目목’이다. ‘바르게 뜻을 세워 만물의 이치를 헤아려라’는 의미이다. 또 거북이의 느린 동작을 빗대어 무슨 일이든 서두르지 말 것을 뜻하는 의미도 있다.동학혁명기념관

의연하고 당당하게 살아라

계해(1863)년 12월 초에 이르러 수운 선생은 뭔가 자꾸 불길한 생각이 떠오르곤 하였다. 그래서 청수단 앞에서 한울님께 마음으로 기원하는 심고(心告) 시간이 늘어나고 있었다.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동학의 앞날에 대한 걱정의 일환으로 이미 동학의 주인 자리를 넘겨준 해월 최시형에게 멀리 심부름을 보내며 당분간 용담을 찾지 말라고 부탁까지 하였다.

운명의 전야 12월 9일이 다가왔다. 수제자 중 해월 최시형 등 몇 명이 빠지고 이내겸 등 30~40명이 모여 동학에 대한 이야기와 주문을 읊으며 수련하고 있었다. 수운 선생의 제자들은 방 두 칸에 가득 차서 비좁을 정도였다. 기존의 제자는 물론 이제 갓들어와 배우기 시작한 이들도 있었다. 어떤 제자는 소매에서 곶감을 꺼내고 어떤 제자는 허리에 찬 요대를 풀어 약 3~4냥의 돈 등 예물과 성금을 바치기도 했다.

당시 유생들과 관리들의 지목은 물론 감시가 극도로 강화될 때여서 도인들은 이웃의 눈치 등 신경을 아니 쓸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함에도 수운의 제자들은 '의연하고 당당하게 살라'는 스승의 훈계처럼 주위의 눈치를 보지 않고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동경대전총목 [동학론] 동경대전(東經大全) 인제경진초판본(麟蹄庚辰初版本)에서, 동경대전총목(東經大全總目) 즉 목차를 보면 포덕문(布德文)·동학론(東學論)·수덕문(修德文)·불연기연(不然其然)·탄도유심급(歎道儒心急) 등 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세상에 알려진 동경대전 목차에서 논학문(論學文) 대신 동학론(東學論)으로 되어있다. 논학문과 동학론의 내용은 같다. 그러나 논학문이 동학론의 제목으로 경전이 편찬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인제경진초판본(麟蹄庚辰初版本)은 1880년 6월에 목활자로 편찬되었다.
동경대전총목 [동학론]동경대전(東經大全) 인제경진초판본(麟蹄庚辰初版本)에서, 동경대전총목(東經大全總目) 즉 목차를 보면 포덕문(布德文)·동학론(東學論)·수덕문(修德文)·불연기연(不然其然)·탄도유심급(歎道儒心急) 등 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세상에 알려진 동경대전 목차에서 논학문(論學文) 대신 동학론(東學論)으로 되어있다. 논학문과 동학론의 내용은 같다. 그러나 논학문이 동학론의 제목으로 경전이 편찬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인제경진초판본(麟蹄庚辰初版本)은 1880년 6월에 목활자로 편찬되었다.동학혁명기념관

동학론(논학문)이 으뜸이다

이날 9일 용담집 방안에는 수운 선생 자리 앞에 여섯 자가 한 구를 이루는 형식과 두 마디가 한 덩이씩 짝이 되게 지은 한시의 글인 육언구문(六言句文)가 쌓여있었다. 그것은 작자의 생각이나 눈앞의 경치 같은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한문 문체의 부(賦)와 같은 것으로 수십 장이요, 한 종이에 십여 구가 되었다.

수운 선생은 붓을 들어 꼼꼼히 살피면서 이르기를, "무릇 나의 학(學)은 이루어졌으니 한울님 외에는 두려울 것이 없다. 여러 서책은 다만 동학을 높이 숭상할 줄 알게 하는 것이다. 어찌 동학 이외에 다른 학이 없겠는가? 그렇지만 다른 학들은 깊이 탐구해 보면 본 뜻을 잃은 것이니 동학에 더하고 합친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시면서 동학의 독창성과 순수성을 강조하였다.


수운 선생은 서책 중 '논학(論學) 즉 동학론(東學論)'이라는 한 권을 집어내어 "이 책은 동학의 본지에서 매우 타당하여 일등에 뽑아 놓는다"고 하였다. 그 책 한 권을 왼쪽에 앉아 있는 제자에게 내 보이며, "이것은 내가 지은 것으로 이렇게 지은 연후에야 가히 본뜻에 타당하리라"고 하였다.

벽상에도 또한, 써 붙인 필적이 많았는데 어떤 것은 범서(梵書)와 같은 자획이 있었다. 서책과 걸어놓은 필적들은 동학을 말하고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때 처음 수운 선생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부적이나 글씨를 원하면 대부분 써주지 않았다. 다만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는 예절에 있어 남달랐고, 동학에 입도코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수제자를 시켜 동학의 주문(呪文)을 써주게 하였다.

그때 동학에서 공식적으로 통용되는 주문(呪文)은 세 종류였다. 모두 제자주문으로 첫째는 초학주문 13자요, 둘째는 강령주문 8자요, 셋째는 본주문 13자인 평생주문이었다.

이러한 이야기의 주요 내용은 당시 수운 선생을 체포하는 책임을 맡은 선전관 정운귀의 서계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때(12월 9일) 양유풍과 고영준을 동학에 위장 입도시켜, 수운과 제자들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파견한 밀정의 보고 내용을 정운귀가 조선 정부에 올리는 장계에 세밀하게 기록한 것이다.

이처럼 수운 선생은 자신의 운명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줄 알면서도 슬기로운 지혜와 대담한 용기를 발휘하면서 그야말로 순도(殉道_순교)를 각오한 거룩한 성자의 모습에 변함이 없었다.

당시 수운 선생은 곧 닥칠 큰 화가 코앞에 왔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날 용담 집에는 낮에 있었던 30~40여 명의 제자 중 23명이 남아 강론과 수행을 끝내고 잠을 자고 있었다. 수운 선생은 제자들이 자다가 혹시 걷어찬 이불을 덮어주려고 두루 살피는 등 위기의 순간에도 도인들을 각별히 아끼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늘 그래왔던 것처럼 촛불을 켜고 책을 보면서 침묵의 시간을 맞이한다. 그리고 12월 10일 자시(새벽1시)가 다가오자 수운 선생은 갑자기 마음이 얼어붙으며 몸을 움직이지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마치 바위처럼 굳어버리는 느낌이었다. 선생은 순간 '올 것이 오고야 마는구나' 하고 직감하였다.

「수운, 죽음을 초탈한 성인의 모습이어라.
수운, 그 무엇이 이토록 당당하게 하였을까.
수운, 스스로 하늘이 되어 아무것도 두려움이 없었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 피체(被逮) 수운 선생은 선전관(宣傳官) 정운귀(鄭雲龜)가 이끄는 관군에 의해 계해(1863)년 12월 10일에 경주 용담에서 여러 제자들과 함께 피체(被逮_체포)된다. 본 그림은 현재 경주 용담정 수운 대신사 존영 우측에 위치한 병풍속 그림중에 하나이다. 수운 선생 피체당시 참혹한 상황에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전문가의 평가이다. 수운 대신사를 존경하는 화가가 공손하게 끌고가는 관군과 약간은 태평하게 포박되어 따라가는 모습으로 그린것 같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 피체(被逮)수운 선생은 선전관(宣傳官) 정운귀(鄭雲龜)가 이끄는 관군에 의해 계해(1863)년 12월 10일에 경주 용담에서 여러 제자들과 함께 피체(被逮_체포)된다. 본 그림은 현재 경주 용담정 수운 대신사 존영 우측에 위치한 병풍속 그림중에 하나이다. 수운 선생 피체당시 참혹한 상황에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전문가의 평가이다. 수운 대신사를 존경하는 화가가 공손하게 끌고가는 관군과 약간은 태평하게 포박되어 따라가는 모습으로 그린것 같다.천도교 용담수도원

수운, 조선 왕조에 피체되다

조선 왕조는 유교의 성리학에 반하는 어떤 종류의 도(道)와 학(學) 즉 종교를 이단으로 몰아붙이며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수운 선생과 동학을 지목하여 탄압해오던 중, 아예 뿌리를 뽑아버리기 위해 1863년 10월부터 압살할 계책을 논의하여 왔다.

급기야 11월 20일 조선 정부로부터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된 정운귀(鄭雲龜)가 이끄는 관군에 의해 계해(1863)년 12월 10일(양.1.18)에 경주 용담에서 수운 선생은 여러 제자들과 함께 피체(被逮_체포)된다.

정운귀(정운구)는 최복술(최제우)을 체포하여 서울까지 압상(押上)한 전후 경위를 임금에게 보고하는 문서인 서계(書啓)에서 자세히 밝혔다. 선전관 정운귀가 올린 서계 '고종실록 1권, 고종직위년 12월 20일 임진 6번째 기사 청 동치(東治) 2년 선전관 정운구가 최제우와 동학에 대해 보고한 문건'을 살펴보겠다.

또한 수운 선생의 체포과정과 순도과정을 강시원(강수)의 <최선생문집도원기서>, 그리고 표영삼의 <동학이야기> 등을 중심으로, 당시 상황을 재현시켜본다.

정운구는 11월 20일에 무예별감(武藝別監) 양유풍(梁有豊), 장한익(張漢翼), 좌변포도청군관(左邊捕盜廳軍官) 이은식(李殷植) 등을 거느리고 경상도 경주 등지에서 동학의 괴수를 자세히 탐문하여 잡아 올릴 목적으로 바삐 성 밖으로 나가 신분을 감추고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갔다.

그리고 그들은 수운 선생과 제자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용담 인근에 몸을 숨기고 숨소리도 발소리도 죽여 가며 모두가 잠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운명의 그날, 마침내 1863년 12월 10일(음) 새벽 1시에 이르자 갑자기, "암행어사출도야!!" 하는 청천벽력과 같은 함성이 울리면서, 용담 집을 포위한 병사들이 기습으로 덮쳐왔다.

무예별감 양유풍과 장한익, 좌변포도군관 이은식, 종자 고영준 등이 앞장서 칼과 창으로 위협하였고, 교졸들은 육모방망이를 사정없이 휘두르며 쳐들어왔다. 순간 잠들었던 방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했으며,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와 함께 피를 흘리며 끌려나오고 있었다.

수운 선생은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내 기다린 지 오래다.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으니, 나를 잡아가라!!"며 천지가 진동하듯 소리를 외쳤다.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지더니, 별감 양유풍은, "이건 어명이요!"라는 왕명임을 강조하면서, 한 번 예를 갖추고 수운 선생을 결박하라고 지시한다.

교졸들이 멈칫하며 두려움에 떨자 별감 장한익은, "어명이다! 최복술(최제우)을 결박하라!"라며 다시 명령을 내린다. 수운 선생이 전혀 반항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교졸들은 결박하기 시작했다. 이에 수운 선생은 결박된 상태로 '하늘을 우러러 큰 한숨을 짓고'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양유풍은 수운 선생의 인격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라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나, 장한익은 공을 세우려고 수운 선생에게, "대역죄인은 당장 무릎을 꿇어라!" 하며 고함을 질렀다. 이에 응하지 않자 별감 장한익과 포도군관 이은식은 힘센 교졸 몇 명에게 다그치며 죄인을 무릎 꿇리라고 소리를 지르며 명령하였다.

그래도 꿈쩍하지 않자 장한익, 이은식과 덩치가 큰 교졸들은 방망이로 사정없이 수운 선생을 구타하였다. 이렇듯 강제로 무릎을 꿇리는 과정에서 수운 선생의 옷이 찢겨지고 온몸에 피멍이 들었다. 더 심한 것은 머리 부위를 가격당해 피가 흘러내려 누군지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수운 선생과 제자 23명을 차례로 오라에 묶어 무릎을 꿇렸다. 박씨 부인과 맏아들 세정(世貞)도 함께 체포되었다.

용담집에 없었던 최자원(崔子元)과 이내겸(李乃兼)은 어사 출도 전에 본 부(府)에 긴밀히 글을 띄워 잡아 가두라 했으며, 밀정에게 속아 동구에서 길을 안내해 준 장가도 같이 잡아들이라 하였다.

체포된 인원은 모두 합쳐 30명이나 되었으며 수운 선생을 제외한 나머지는 일단 경주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때 체포되어 끌려간 수운 선생과 제자들은 형언할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다. 다행히 최경상(최시형)은 수운 선생의 지시대로 움직여 화를 면했다.

「수운 선생이 피체될 때
이를 직접 목격한 제자들과
가족들의 구전이 전해지는데,
옷이 다 찢겨졌고
산발한 머리부터
온몸에 피가 난자하여,
누군지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전혀
굽힘의 자세가 없었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대장부의 모습이었다.」
덧붙이는 글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
#동학 #천도교 #용담수도원 #동학혁명130주년 #수운최제우탄신2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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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영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장」, 동학민족통일회 공동의장, 평화민족통일원탁회의 공동의장,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공동대표, 전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문위원, 또 현(現)천도교선도사·직접도훈, 전(前)전주녹색연합 공동대표, 전(前)전주민예총 고문, 전(前)세계종교평화협의회 이사 등 종교·환경단체에서 임원을 엮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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