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 송년회에 이런저런 말 못할 사정 때문에 불참하는 사람이 많다.
이혁진
어제 고등학교 동창 송년모임이 있었다. 언제부턴가 연말 송년회는 11월에 개최한다.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은 10여 명, 그러나 나온 사람은 7명이다. 반 정도가 불참했다. 못 나온 사람을 두고 동창들은 돌아가며 "그 친구는 항상 빠지잖아", "저 친구는 안 올 줄 알았어" 등등 한 마디씩 했다.
요즘은 '노쇼'를 하면 뒷말 듣기 십상이다. 톡이나 문자로 모든 걸 연락하는 세상에서 변명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것 같다. 한 친구는 "온라인 때문에 오프라인 모임이 시들었다"라며 그렇듯한 해석을 했다. 온라인으로 자주 소통하기 때문에 직접 만나 이야기하는 것이 별로 재미없다는 뜻이다.
한 친구가 나서 "7~8명이 대화를 나누기는 가장 좋은 인원"이라며 일거에 시빗거리를 정리했다.
송년회 풍경이 사뭇 달라졌다. 본래의 의미도 퇴색된 느낌이다. 송년회 문화 자체를 싫어하거나 거리를 두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직접 만나야 비로소 친구들의 근황과 동정을 제대로 알 수 있다며 꾸준히 참석하는 친구들도 있다.
젊을 때는 출세한 친구들이 얼굴 내밀기 바빴다. 지금도 지난 이력을 빼곡히 적은 명함을 돌리며 건재함을 보여주는 친구가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명예와 지위에 대부분 초연하고 자유롭다. 대신에 일상의 소소한 삶과 건강에 관심이 많다.
모임에 참석한 친구들의 건강은 일단 합격점이다. 얼굴에 그간 살아온 '인생점수'와 '건강점수'가 얼추 담겨있다.
어제 한 친구는 "벌써 2년째 백두대간 등산에 도전하고 있는데 자신 있다"라고 말했다. 그의 강한 체력에 모두 부러워하는 눈치다. 이에 질세라 다른 친구는 "지난해부터 마라톤을 준비했다"며 응수했다. 친구들 또한 놀란 입을 한동안 다물지 못했다.
그는 내년에 '서브 4' 달성을 목표로 뛰는데낙관했다. 서브 4는 풀코스 42,195km를 4시간 이내에 주파하는 단계를 말한다. 우리는 황영조와 이봉주 같은 세계적인 마라토너들만 생각하는데 친구의 마라톤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그의 마라톤 도전에 감동한 친구들은 기립해 박수를 보냈다.
또 다른 친구는 복용하는 비타민과 오메가3를 자랑했다. 몸에 좋다는 그의 말에 토를 다는 친구는 없었다. 옆의 친구는 열심히 메모까지 했다. 위에서 언급한 친구들이 우리 세대 모임에서 주목받는 스타들이다. 건강을 위한 도전과 장수는 누구나 바라는 로망일지 모른다.
인기 있는 친구
그러나 진짜 인기 있는 스타는 따로 있다. 오랜만에 나타난 친구를 찾아 알게 모르게 따뜻한 인사와 위로를 건네는 친구들이다. 이상할지 모르지만 모임에 왜 왔을까 싶을 정도로 친구들과 섞이지 못하는 친구들이 있다. 소심하고 외롭다는 표현이다.
코로나 이전 상처를 당하고 오랜만에 참석한 친구는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친구들이 반갑게 맞아주어 흐뭇하고 고맙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혼자 사는 친구가 제법 있다. 또한 이런저런 사정으로 불참하는 친구들이 늘고 있다.
친한 동창모임에 나오지 않으면 사이가 멀어진 것이 아니라 우울증이 온 것 일수도 있다. 정신심리치료 전문가들은 외출 빈도가 '우울증의 지표'라고 지적한다. 모임에 용기를 내 참석한 친구들에게 따뜻한 안부와 공감을 보내주는 한마디 만큼 소중한 게 없다.
실제로 한 친구는 "동창회 모임에 늘 참석했던 다정한 친구가 보고 싶어 왔다"라고 말했다. 세월 따라 친구의 관점도 달라졌다. 자주 만나는 친구가 아니라 그간 전혀 몰랐던 친구의 인생 사는 이야기를 접하곤 그를 동경할 때가 많다.
인간관계에서 '측은지심'이야말로 최고의 미덕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말없는 외로운 친구에게 다가가 반갑다며 손을 내미는 친구들이 새삼 존경스럽다. 친구들 간에 회자되는 친구들도 알고 보면 출세한 친구가 아니라 소외된 친구를 챙기고 인정을 베푸는 친구들이다.
송년회를 보내면서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히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는 김춘수 시인의 시구가 새삼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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