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신안군 암태지서 터
박만순
앞뒤 잴 것도 없이 목포경찰서를 찾아갔으나 서장은 자리에 없었다. 일제강점기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있던 곳에 주둔한 일명 '백부대'(부대장 : 백남표 소령)를 찾아가 "오늘 중에 암태도로 진주하지 않으면 우리 부모들이 다 죽게 된다"고 사정했지만, "군의 사정상 그럴 수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백부대를 나와 대로를 걷는데 권총을 차고 말 채찍을 든 이가 경찰서장이란 말을 듣고 무턱대고 무릎부터 꿇었다. 사정을 이야기했으나 경찰서장의 부하들에 의해 제지를 당했을 뿐이었다.
이상득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아무리 급하더라도 절차를 밟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목포경찰서의 지인을 물색했다. 한 다리 건너 알고 있는 송아무개 경위가 중책을 맡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다른 이를 통해 송 경위에게 부탁한 것이 효과를 봤는지 드디어 목포항에서 백부대 무장병력 12명을 포함한 총 18명이 군사 작전상 징발한 여객선 금성호에 승선했다. 1950년 10월 15일경 오후 6시였다. 이상득의 마음은 급했지만 금성호는 암태도로 직항하지 않고 안좌도를 지나 마진에서 하룻밤 묵었다.
'오늘 밤을 넘기면 우리 가족이 몰살될 텐데'라며 발을 동동 굴렀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완전무장한 해병대가 야간전투(상륙)를 회피하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음날인 10월 16일경 암태도 항구에 도착했다. 놀랍게도 이미 경찰 선발대가 와 있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경찰은 지방 좌익을 소탕하기는커녕 지서와 면 소재지만을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백부대 일행이 암태지서가 있는 남강부두에 하선했지만 그때까지 암태지서 경찰들은 지방 좌익들이 암태도 동부지역에서 우익인사 가족들을 집단학살하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다.
결국 이상득이 집안 동생들로부터 가족이 위험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틀이 지나는 동안, 그의 가족 10여 명은 다른 세상 사람이 됐다.
그가 기진맥진해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는 큰아들의 헌 오바(오버코트)를 입고 새끼로 묶은 채 앉아 있었다. 그동안 도망 다니면서 고생한 모습을 이상득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랬다는 것이다. 그렇게 도망 다니는 와중에 어린 손녀를 잃기도 했다.
아기 업은 채 죽은 여성...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가족은 모두 죽었다지만 시신을 찾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학살됐다는 진작지 모퉁이 암태도 등대 부근을 샅샅이 뒤졌다. 천만다행으로 그는 아버지의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 희한하게도 아버지 시신이 바닷물에 떠내려가지 않고 갯가에 있던 것이다. 나머지 가족의 시신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가 이곳저곳을 다니며 학살된 이들의 모습을 목격한 것 중에 충격적인 장면이 있었다. 10살이 채 안 돼 보이는 어린이 셋이 철사에 목이 매여서 흡사 마람(이엉의 방언) 엮듯 엮어져 바닷가에 떠다니는 모습이었다. '아이들이 무슨 이념이 있고 정치색이 있단 말인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또 다른 곳에서도 끔찍한 장면이 있었다. 아기를 업고 있는 여성의 시체였다. 포대기에 업혀 있는 아기의 목에 뭔가 새카만 게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엄마의 머리를 아기 목에 묶은 것이다. 헛구역질이 나왔는데, 아기가 죽는 순간을 상상하니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이렇게 많은 주검들을 목격했지만 결국 아버지 이외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팔금면(팔금도) 고산마을로 갔다. 그곳 주민들은 인근 바닷가에서 떠밀려 온 시신들의 특이사항을 담은 '시체 기록부'를 작성해 놓았다. 예를 들면 성별, 연령대, 옷, 머리 모양뿐만 아니라 금니를 했으면 아랫니인지 윗니인지 등을 기록한 것이다.
그곳에서 작은아버지로 추정되는 기록이 있어 흙을 파헤쳤다. 작은어머니는 남편이 옥양목 중의적삼을 입고 나간 것 같다고 했는데, 시신은 모시 바지와 저고리, 허리띠 차림이었다.
작은집에 가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사촌 여동생이 '자기가 아버지 허리띠를 꿰매서 직접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동행했더니 작은아버지가 확실했다. 그렇게 작은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이상득, <나의 자서전, 가르치며 배우며>, 1991).
그렇다면 이상득의 가족 10여 명은 왜 지방 좌익에게 죽임을 당했을까? 이상득은 자신 때문에 아버지가 죽임을 당했다고 자책했다. 해방 후 목포공업학교 교사였던 그가 6.25 때 암태도 본가로 와서 분주소에 두 차례나 구금됐다가 석방돼 목포로 간 것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즉, 자기가 끝까지 남아 총대를 메고 가족을 지켰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가족이 집단학살된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상득의 막내 삼촌 이아무개는 6.25 당시 경찰 간부였기 때문이었다. 이아무개는 한국전쟁 전에 제주도 파견근무를 명받았는데, 이러저러한 이유로 거부했다. 그러다가 전쟁이 났고 암태도에서 좌익들에게 붙잡혔다.
그는 뒷결박을 당한 상태에서 암태도 마명마을 갯벌에서 도주를 했다. 하지만 횃불을 지켜들고 완장을 찬 이들에게 새벽에 붙잡힌 그는 마명마을 큰길에서 난도질을 당했다. 결국 경찰 간부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이상득의 아버지, 둘째 작은아버지, 증조할아버지 등 10여 명이 떼죽임을 당한 것이다.
여전히 베일에 가려진 암태도 민간인학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