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신문'이란다. <조선일보> 주장이다. 전국 우체국에선 '조선일보 창간 80돌 기념 특별엽서'를 팔고 있다. 정보통신부 우정국장은 연간 5개만 발행하는 특별엽서라며 소장할 만한 희소가치가 있다고 거든다.
서울시청앞 광장엔 기념조형물이 세워졌다. 언론사를 전공한 중견 언론학자도 기고했다. "어려운 시대상황에서 흔들리지 않는 자세를 견지하려 했던 노력이 오늘의 위치를 가능케 했을 것"이란다.
물론 조선일보사 분위기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만은 아니다. 분수만 지킨다면 자화자찬은 '쓸쓸한 사람'들에겐 권리이기도 하다. 고위관료나 학자도 표현의 자유는 있으니 딱히 놀랄 일만도 아니다. 다만 학자라면 역사적 사실에 얼마나 가까운가는 한번쯤 짚어야 했다는 아쉬움은 남는다.
문제는 대통령이다.
대통령이 진실을 공공연히 왜곡하고 호도한다면 그저 웃어넘길 수 없는 일이다. 하기야 김대중 대통령의 오지랖이 얼마나 넓은가는 일찌감치 드러나긴 했다. 당선 직후 전두환 노태우 석방에 '가담'한데 이어 박정희 기념관을 국민혈세로 짓겠다지 않은가. 유럽을 순방하느라 안타까워서일까.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린 창간 80돌 축하연엔 영상 축하메시지를 보냈다. 그 내용은 조선일보 1면에 "새 천년에도 민족 앞길 제시를" 제하에 사진과 더불어 실렸다. 그는 일제 때 조선일보를 인수한 '방응모 선생'을 '민족지도자'로 추켜세웠다. 친일파 명단에 방응모가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 1면에 실린 대통령의 80돌기념휘호도 '압권'이다. 한자로 쓴 '달필'은 '민족정론'이다.
그래서일까. "조선일보는 할말을 하는 신문임을 지향해 왔다"로 1면 사설은 운을 뗀다. 반면 사설제목은 봉건시대를 방불케 한다. '상소의 정신으로'다. 하지만 정작 사설의 핵심은 시민단체를 겨냥했다. "특정매체가 자기들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또는 자기들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그 매체를 음해하고 모략하고 깎아내리다 못해 '법'으로 영향력을 제어하겠다는 발상은 그야말로 독선적이고 권위적이며 시대착오적"이라고 날을 세운다.
낙선운동 공간에서 유력언론들의 비틀어진 여론몰이와 지역감정 조장으로 일고 있는 언론개혁 여론을 가로막을 속셈이다. 여기서도 예의 흑백논리가 묻어난다. 도대체 '입맛에 맞지 않고 생각이 다르다고 법으로 영향력을 제어하겠다'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참으로 궁금하다. 적어도 언론개혁운동 안엔 그런 '시대착오'적 인사는 없다.
정기간행물법 개정운동은 신문사주의 신문사 유물화를 막고 민주주의 보루인 신문사 편집국부터 민주화하자는 상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입맛에 맞지 않고 생각이 다르다고 법을 들이대는 독선은 누구의 몫인가. 사상검증에 나서는 조선일보 아닌가.
"조선일보가 영향력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독자의 폭"이라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만일 참으로 독자의 판단으로 경쟁하겠다면 신문공동판매에 당당히 나설 일이다. 든든한 자본력에 바탕을 둔 판매망이 조선일보 부수 유지의 큰 요인임은 두루 알려진 사실이다. 기실 조선일보 끊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사설 '상소의 정신'에서 엿보이듯 조선일보는 앞으로도 김 대통령을 상대로 줄다리기에 나설 것이 분명하다. 이미 김 대통령은 질질 끌려왔다.그가 계속 밀리는 것은 물론 그의 자유다. 김영삼 정권에 이은 파국으로 끝나더라도 솔직히 말해서 두 김씨 개개인의 불행엔 관심 없다.
문제는 나라와 겨레의 운명이다. 민족정론 휘호에 그를 대통령으로 뽑아준 민주 시민들이 분노하는 까닭이다. 여전히 새 천년에도 친일파들이 '민족지도자'로 둔갑하고, 일본 '천황폐하'의 '탄신'을 1면 사설을 통해 극존칭 문체로 찬양한 친일언론이 '민족지'이어야 하는가. 보안법으로 언제든지 양심이 검증당하고, 겨레의 삶이 동서남북으로 조각조각 난 잿빛시대를 새천년에도 살아가야 하는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더이상 관용의 미덕만을 보일 때가 아니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도 진지하게 추궁해야 한다. 누가 감히 참칭하는가. '우리 신문'을.
덧붙이는 글 | 이 칼럼은 3월 9일 한겨레신문 <손석춘의 여론읽기>에 실린 글입니다. 손석춘 기자는 한겨레 여론매체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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