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도 체제의 종언과 극복--김민웅의 뉴욕리포트

등록 2000.04.27 12:03수정 2000.04.27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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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4월 중순,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는 국제금융기구 IMF와 세계은행에 대한 시민단체들의 반대시위가 거세게 일어났다. 이들 두 기구가 가난한 나라들을 더욱 빈곤의 수렁에 빠뜨리고 있다는 점을 문제삼은 것이다.

한편, 쿠바의 아바나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제3세계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정상회담 G-77이 폐막되면서, 현재의 세계경제 질서가 역시 가난한 나라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주장을 했다.

이 두개의 사건은 모두 기존의 세계화를 앞세운 세계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논란이자, 특히 이는 "1945년이래 지속되어 온 국제질서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워싱턴에서의 반 IMF, 반 세계은행 반대시위는 근본적으로 투기적 금융대자본의 지배구조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투기적 금융자본의 국제적인 행동방식이 가지고 있는 약탈적 성격에 대한 저항이 표출된 셈이다.

IMF를 국제금융자본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는 이른바 <병마개 따개>라고까지 하는데, 구조조정을 앞세워 일단 대상국가 경제의 보호막을 해체해놓은 뒤 자본력 자체가 엄청난 국제금융자본의 주도권이 그 나라 경제의 잉여를 마음껏 유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가령, 한국 증시의 급격한 변동이 뉴욕 증시와 외국인 투자가들의 움직임에 "동조화"라는 이름 하에 종속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것도 국제금융자본의 주도권이 압도적으로 관철된 한국경제현실의 반영이다.

비슷한 시기에 쿠바의 아나바에서 열린 제3세계 정상회담 G-77회의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의 신제국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반대를 표명했다는 점에서 워싱턴의 반 IMF 시위와 그 의의와 목적이 동일한 맥락에 있다고 하겠다.


하나는 그 신제국주의 질서의 중심부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라고 한다면, 쿠바의 아바나는 바로 그 신제국주의질서의 대상인 주변부 국가들의 집단적인 목소리라는 특징이 있는 것이다.

G-77은 지난 1964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소수의 서방국가들이 유엔을 비롯하여 국제경제를 좌우하는 사태에 대한 저항과 정의로운 세계질서를 지향하는 제3세계 77개 국가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회원국가들은 133개국으로 늘어났으나 이 이름의 역사성으로 해서 그대로 G-77으로 쓰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회의 개최지 쿠바의 카스트로는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세계자본주의 경제질서는 부정의하고 부당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환경, 빈민, 노인 등을 보호하지 못하며 일부 투기꾼들에게만 돈을 벌게 하는 지금과 같은 시스템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또한 정작 세계화되어야 할 것은 자본의 이익이 아니라 정의와 이를 위한 연대라고 하면서 이번 2000년 밀레니움 G-77의 의의를 정리했다. 마하티르 총리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는 대응여하에 따라 제3세계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식민주의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아시아를 비롯한 제3세계 지역이 새로운 제국주의에 무릎을 꿇기 위해 구(舊)제국주의와 투쟁을 벌였던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투기적 외국금융자본의 지배를 받아들이면, 그 결과는 경제를 살리고 투자효과를 통해 부를 증진시키기보다는 이들 약탈적인 본성을 가진 외국자본이 그 나라의 경제를 장악하고 결국에는 그 나라 전체를 집어먹을 수 있는 상황을 가져올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이러한 저항들이 국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의미는 한마디로 앞서 언급했듯이 <1945년 체제>의 동요를 의미한다. 여기서 <1945년 체제의 동요>라 함은 제2차대전이 끝나고 미국을 패권적 중심으로 하는 세계질서의 재편이 진행되면서 제3세계 국가들이 이러한 질서에 종속적 지위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 변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승전국 미국의 국제적 구상이 일방적으로 통용되고 이에 따라 제3세계 국가들이 과거의 식민주의에서는 벗어났으나 새로운 신식민주의적 질서 속에 편입되어 들어가야 했던 상황이 더 이상 지속되기 힘든 단계에 역사는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남북간의 정상회담도 보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바로 이러한 맥락 속에서 1945년 체제의 극복을 감당해야 할 사안이다. 우리의 분단과 전쟁, 그리고 냉전적 대결의 구도는 일차적으로 이 <1945년 체제>가 낳은 역사의 모순이자, 미국에 대한 우리의 종속적 위상에 기인한 약탈적 세계화의 IMF형 억압구조도 바로 이 체제의 전개과정에서 가능해진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따라서 단지 민족내부의 화합과 단결이라는 차원만이 아니라 함께 지향해야 할 새로운 질서의 내용은 무엇인가를 포함해내야 하는 것이다.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지금 지구촌적 저항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질서 속에 한반도 전체가 종속되는 길을 걸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2000년 4월의 워싱턴과 아나바, 그리고 서울과 평양의 현실은 자본의 국제적 운동의 본성과 깊은 맥락으로 서로 얽혀 있는 현실인 것이다. 이것을 주시하지 못하는 우리의 선택과 진로는 시대적 장애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에 성공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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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 기자는 경희대 교수를 역임, 현재 조선학, 생태문명, 정치윤리, 세계문명사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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