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 평동으로 집을 옮겼습니다. 며칠 동안 책 갈무리하느라 꽤나 힘이 드는군요. 그러나 지난 날 살던 곳보다 훨씬 넓은 방에 책장도 가지런히 놓고 책도 가지런히 꽂아가니 기분이 좋습니다. 이미 읽은 책도 다시 한 번 제 손길이 닿기를 기다리고 아직 미처 읽지 못한 책도 제 손길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헌책방에서도 제가 찾아와 들춰내길 기다리는 책들이 있죠.
아직 새 집에서는 밥을 해먹을 수 없어서 사랑이(애인)네 집에 놀러갑니다. 129번 버스를 타고 가다가 아현동(애오개) 굴레방다리 가까이 왔을 무렵 이곳에 있는 <문화서점>에 잠깐 들를까 하는 생각이 퍼득 들었습니다. 저녁 먹으러 가기로 한 시간이 아직 많이 남기도 해서 얼른 내렸습니다.
해는 이미 졌고 어둑어둑해지는 때. <문화서점>에 찾아가니 아저씨가 오랜만에 왔다며 반갑다고 손을 잡습니다. 집 옮기고 바쁘다고 한 달 반만에 찾아갔거든요. 이 날도 제가 찾아갔을 때는 다른 책손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나오기 앞서까지 책손님이 두 분 오셨네요.
아저씨는 헌책방 장사가 잘 안 된다며 다른 곳들도 그러냐고 물어오십니다. 그래, 다른 헌책방들이라고 그다지 뾰족한 수가 있지 않으니 힘들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헌책방들이 갖출 수 있는 `좋은 책'에는 한계가 많은데-왜냐하면, 우리 나라에서 나오는 책 가짓수는 많지만 참으로 좋다고 할 만한 책은 그렇게 많지 않으니까요- 엎친 데 덮친 꼴로 사람들이 책을 읽어 스스로를 다지는 일과는 나날이 멀어져 가는 데 있습니다.
책이란 `간접 경험'이기에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아도 자신이 몸소 몸으로 뛰고 부딪히며 세상살이를 겪고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대부분이 하는 일은 `돈 많이 벌어 제 한 몸 잘 살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요. 우리 삶 밑바탕이라 하는 농사와 공장노동이 푸대접받고 힘겨운 일이라며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줄어들기만 하니까요. 정부에서 `벤처' 이야기를 하고 뒷배한다지만 벤처로 만들어내고 일구는 일을 `현장에서 움직이며 뛰는 사람들'도 있음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헌책방은 바로 `그 현장'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천년 오월 가운데 무렵에 문을 연 <문화서점>은 아직 이곳을 아는 이도 적고 언저리에 사는 사람들과 학생들도 자주 찾는 편이 못 되어 퍽 힘들어 합니다. 오래오래 남기며 함께 나누고 찾아볼 수 있는 책들을 갖추는 헌책방 한 곳이 어렵게 문을 열었지만 살림을 꾸려가기는 참 힘들군요.
헌책방 가운데 홍보가 퍽 잘 된 편이라 할 수 있는 노고산동(신촌) <숨어있는 책>도 이익도 손해도 아닌 고만고만한 살림을 꾸려가고 있기에 무언가 남다른 일거리를 찾고 생각을 넓혀서 새로 발돋움을 하려 해도 힘들어 합니다. 아무리 투자하고 무언가 새롭게 거듭나더라도 찾는 사람들 발길이 뜸하다면 헌책방도 힘들어서 주저앉고 말죠.
이런저런 고민들을 하고 얘기를 나누다 아저씨가 챙겨준 책들을 봅니다. 하나는 소화 19년(1944)에 소화사진인쇄소에서 펴낸 <경주사진첩(慶州寫眞帖-新羅千年の古都>입니다. <문화> 아저씨는 이 사진첩을 보며 옛날엔 고분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느냐며 그 사진도 찾아 줍니다. 석굴암이 지금과는 달리 아무런 꾸밈이 없이 그저 산 속에 굴이 나 있는 채로 찍은 사진도 있고요. 무척 많이 더럽혀지고 때가 묻고 닳아버린 많은 돌탑과 부처상들 사진이 퍽 깨끗한 모습으로 찍은 모습이 있고 첨성대 또한 뒤에 `사람이 사는 초가'가 있는 사진입니다.
1990년에 전국 대학신문기자연합회 만화분과에서 엮어서 펴낸 `대학교 신문에서 실은 만화'를 모아 80년대 역사를 꾸려낸 <터지는데 5분 버티는데 6분, 미래문학사>라는 책도 얻었습니다. 아저씨도 재미있게 보았다며 제게 찾을모가 있을 듯해서 챙겨 주셨답니다. 아닌 말로 대학교신문에 실렸던 만화지만 무척 깔끔하게 그린 만화부터 엉성한 만화까지 다 있는데 아주 날카롭게 문제를 파헤쳐 비판한 만화들이 가득합니다.
아저씨가 골라준 책으로 1965년에 나온 동화책이 하나 있습니다. `주 미'란 사람이 쓴 <딸기밭, 경향문화사>이란 책인데 지은이가 박화목 스승에게 선사한 책입니다. 어쨌거나 이 책을 사들고 와서 짧은 동화를 열 편 즈음 읽었는데 줄거리가 많이 엉성하긴 합니다. 요즘 나오는 동화들을 떠올리니 그 동안 참 많이 발돋움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지금 같은 동화가 나오기까지는 줄거리가 좀 엉성하고 느슨하며 너무 `계도성 짙은 이야기'만 펼쳤던 이와 같은 책들이 나오면서 스스로 거듭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죠.
김요섭 씨가 1973년에 펴낸 <햇빛과 바람이 많은 골목, 보진재>이란 동화책도 한 권 건졌습니다. 불교동요집도 한 권 집고 `김지미 씨가 미원 광고로 나온 그림이 책 뒤에 실린' <여원 1958년 12월호 부록-경제적인 고기와 생선 요리>와 <여성계 1955년 11월호 특별부록-가정요리핸드북>도 건졌습니다. 상태는 아주 깨끗하네요. 나중에 이 녀석들을 사랑이 어머니에게 보여드리니 당신 어머니가 어릴 적에 이 책들을 보며 자기에게 여러 가지 요리를 만들어 주었던 기억이 있다고 하시는군요.
마지막으로 <맥스 사피로/박정삼 옮김-인플레로 돈버는 사람들, 한울(1991)>을 집었습니다. 옮긴이는 정부가 `좀 더 나은 생활수준을 보장하는 것 같지만 조금 지나면 물가상승으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점점 더 여유가 없어지게' 만드는 `물가상승(인플레)' 문제를 파헤친 책이 우리 현실에도 와닿는 곳이 많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여러 책들을 들고 나오며 사람이 따뜻하면 그가 갖고 있는 책들도 따뜻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헌책방을 꾸리는 분들이 따뜻하게 책손님을 맞이하면 비록 책을 한 권도 사지 못하고 그냥 꾸벅 인사만 하고 나가도 헌책방을 찾아온 시간이 헛되지 않고 보람차지 않을까요. 책은 사람이 만들어서 나누는 만큼 이 책을 만들 때 들인 정성은 읽을 때도 느끼지만 책방에 진열해서 팔 때도 느낍니다. 사는 사람은 사는 대로 파는 사람은 파는 대로 따뜻함을 책에 담아내지요. 그래서 책을 사서 읽는 사람은 만들고 파는 사람이 나눈 따뜻함을 한 몸에 받으며 `책을 읽은 뒤 얻은 앎과 물미'를 자신이 살고 일하는 곳에서 펼치고 나누게 됩니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책이 흐르는 길'이건만. 책을 책으로 보지 못하고 돈이나 처세나 권력이나 다른 연모로 생각하니 아무리 쏟아져나오는 책 가짓수가 많고 책방엔 새 책이 넘쳐난다 해도 알짜 하나 찾기 힘들고 책은 많아도 읽는 사람 드물고, 읽는 사람도 좋은 책을 제대로 골라내지 못하지 않냐 싶습니다.
참말로 좋은 책 한 권을 보는 일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책을 보는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가지는 일도 소중하지요. 책을 보려고 시간과 틈을 내는 일도 소중할 뿐더러 책을 찾으러 책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일도 소중합니다. 그냥 빨리 보고픈 책을 손에 쥐고 읽어내면 그만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책을 기획해서 엮고 만들어낸 뒤 이를 종이로 찍어내고 제본하고 마무리 손질을 한 뒤 배본사로 실어 옮기고 서점으로 나누어 돌리며 이를 우리 앞에 내놓아 파는 손길'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책방 찾아가기'를 해 본다면 책 한 권 읽는 뿌듯함 못지 않은 살아가는 재미와 따뜻함도 나눌 수 있으리라 봅니다.
덧붙이는 글 | * <문화서점> 가는 길
지하철 2호선 아현역 1번 나들목으로 나와 그 길로 곧장 10미터 남짓 걸어가거나 영등포쪽에서는 103번 버스가 다니고 공항버스 601번이 다닙니다. 시내버스는 5-1,50,70,73,134,131,328-1,439,142,143,
328,31,130,542,8,8-1번이 다닙니다. 굴레방다리로 가는 버스면 이곳을 지나갑니다.
* 연락할 곳 : 02) 392-4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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