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책은 빛나고 어느 책은 쓰레기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면서 빛나는 책과 쓰레기로 남는 책을 가리기도 해야 합니다. 10월 16일치 <한겨레>에 신경림 씨가 "책다운 책이 없다"고 말하는 글을 쓰기도 했지만 실제로 요즈음 나오는 책 가짓수는 엄청나게 많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책 가운데 알짜는 드물죠. 그래서 책 `부수'로는 우리 문화는 `앞선 문화'로 볼 수 있으나 알맹이는 텅 비어 있으므로 한참 뒤떨어진 문화로 나뒹굴고 만답니다.
헌책방에서 볼 만한 책을 찾지 못하겠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사서 본 뒤 내다파는 책들이 질이 좋지 못한 탓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좋거나 훌륭한 책을 사서 본 뒤 그 책들을 내다팔았다면 헌책방에서 갖추는 책들은 아주 좋거나 훌륭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가 책을 사서 보는 눈높이가 형편없이 낮고 출판사에서 펴내는 책들도 질이 썩 좋지 못하기에 헌책방에서 알짜 하나 찾는 일은 보물찾기와 똑같죠. 곧 우리들이 좋은 책을 가려내서 본다면 이는 우리 개인으로만 그치는 일이 아니라 사회와 문화로도 두루 영향을 미치는 일이 됩니다.
지난 주에는 용산에 있는 헌책방 <뿌리서점>에 갔습니다. 며칠 앞서도 갔고 또 갔는데 책을 본다기 보다 시간이 남아 이런 저런 책 구경도 하자는 마음에 찾아갔답니다. 그래서 그날은 책을 두 권을 고르고 나왔습니다. 한 권은 옛 동독에서 펴낸 책을 번역한 녀석이고 한 권은 <월간조선> 2000년 7월호 별책부록입니다.
<월간조선> 별책부록은 '좋은 문장'을 이야기하며 지금까지 나온 글 가운데 좋은 글(명문)이라 할 만한 글을 뽑아서 100가지를 담았다고 합디다. 그런데 맨 처음 실은 글부터 '나의...'로 말문을 엽니다. 얼마 앞서 돌아가신 황순원 스승 글은 그다지 '좋은 글'은 못 되는지 황순원 스승 글힘을 좇지 못하는 얕은 문학작품을 쓴 요즈음 작가들 글이 열 갑절은 길게 실려 있습니다.
뭐 <조선일보사>에서 펴내는 글이니 제 논에 물대기 하듯 글을 실을 수 있습니다. <한겨레>에서 이런 별책부록을 만들었다면 <한겨레> 사설도 한두 대목쯤 실었겠죠. 그러나 <월간조선> 별책부록은 정도를 훨씬 넘고 말았습니다.
초대대통령이라고 하나 리승만 글을 두 대목이나 길게 실으면서, 김구 스승 글은 십분의 일도 안 될 만큼 싣고 장준하 스승이나 김남주 시인, 문익환 목사, 전태일 열사처럼 우리 시대에 크게 획을 그은 사람들 글은 찾을 수 없네요. 이어령 같은 이들 글을 실으면서 민족교육학자 성내운 스승이나 참교육을 외친 수많은 교육자나 문학가들, 이원수, 마해송, 이주홍, 이오덕 같은 이 글도 없군요.
더불어 `한자'도 아닌 `한문'을 쓰지 않는 글은 `좋은 글'이 될 수 없다는 어디서 누가 얘기했는지도 모를 학설을 뇌까리고 그러면서 한자조차 제대로 쓰지도 않고, 더불어 김구 스승이나 여러 소설가, 글쟁이들 글을 실으면서 거의 모두 `한글로만' 실었습니다. 좋은 글을 쓰려면 한문을 써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주장한 글만 한자를 덕지덕지 얼추 끼워넣고 다른 글은 거의 한글로만 실으니 이를 보고 도대체 좋은 글이 어떤 글인지 제대로 알 수 있을까요?
그래서 이런 책들은 제 돈 주고 사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그냥 묻혀두거나 버리자 하니 이런 잘못을 저지른 이들이 자기들이 지난날 무슨 잘못을 했냐고 억지나 떼를 쓸 일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민언련이나 여러 언론단체에서는 울며 겨자먹기로 `쓰레기 책이나 신문이나 다 자료'로 갖춥니다. 이네들이 언제 또 다시 비루먹은 이야기를 꺼낼지 모르니 그때를 대비하는 셈이죠. 적을 알고 나를 안다고 할까요? 좋은 책을 더 보고 좋은 이야기를 더 듣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끔은 `좋은 책과 좋은 이야기'를 훼방놓거나 가로막으며 비트는 이들 모습도 살피고 헤아리기도 해야죠. 바깥을 둘러보고 다른 쪽에서는 어떻게 어줍잖은 논리를 펴면서 사람들 눈을 홀리려 하는지도 알아야 한단 얘깁니다. 그래서 이런 책이나 자료는 헐값에 살 수 있는 헌책방에서만 삽니다. <월간조선>이나 <신동아> 같은 잡지는 나온 지 한 달만 지나면 헌책방에 자연스레 굴러들어오니까요.
한 달만 지나면 헌책방에 자연스럽게 굴러다니고 서너 달 지나면 쓰레기가 되어 폐지수집상에게 보냅니다. 이 말은 무얼 뜻할까요? 한 달이면 낡은 책이 되고 서너 달이면 폐지가 되는 책을 과연 '좋거나 훌륭한 책'이라 할 수 있을까요? 글쎄. 저는 이런 책은 감히 '쓰레기 책'이라 합니다. 참말로 `감히' 하는 말이죠.
용산 헌책방 <뿌리서점>에서 가서 산 다른 책은 볼프강 라이쇼크씨가 지은 <물으면 바보야?, 좋은책(1989)>입니다. 동독에서는 1985년에 첫판이 나온 책으로 동독에서 학교교육을 받는 아이들이 일상에서 부딪히는 '교육문제'와 교육평가와 공부, 개인 행동과 공동체, 아이와 늙은이, 생활자세 들을 틀에 박힌 대로 여기거나 생각하며 아이들을 억누르지 말고 창조성을 가진 아이로 자랄 수 있도록 가르치고 이끌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비록 동독은 서독으로 스며들었으나 이 책은 동독과 독일을 뛰어넘어 우리에게도 여러 모로 일깨움을 줍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열다섯 해를 넘으며 우리에게 알뜰한 이야기를 주고 있지요. 더불어 앞으로도 이 책은 헌책방을 돌고돌며 우리에게 `교육'을 어떻게 바라보고 아이와 어떻게 함께 하며 아이들 생각을 듣고 얘기를 나눌지를 보여주는데 길잡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같은 책을 가리켜 `스스럼없이' 빛나는 책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책은 '감히 쓰레기 책이다'고 말하고 어떤 책은 `스스럼없이 빛나는 책이다'고 말합니다. 이 둘 사이는 종이 한 장처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다름은 저만이 아니라 책을 찾고 읽는 누구나 내릴 수 있는 가름(정의)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책 문화가 없다면 책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에게 돈벌 생각밖에 없는 문제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빛나는 책과 쓰레기 책을 제대로 가름하지 못하는 사람들 문제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스스럼없이 빛나는 책을 헌책방에서 찾아 읽을 수 있거나 새책방에 쏟아지는 '처세책과 베스트셀러'란 산을 넘고 넘어 제대로 진열되어 있지 않아도 오래도록 우리 가슴을 적시는 샘물 같은 책을 찾아 읽는 '평가자'가 많다면 한 달만에 쉬 헌책방에 들어오고 세 달이 지나면 폐지가 되어버리는 책은 앞으로는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쓰레기 책이 나와도 이런 책에 빌붙어 처세를 얘기하거나 권력의 단맛에 길들여지기만 한다면 쓰레기 책은 더 날뛸 테고 그나마 겨우 숨을 붙이고 있는 스스럼없이 빛나는 책들은 하나둘 자취를 감출 테죠.
덧붙이는 글 | * 최종규 기자가 내는 헌책방 소식지 <헌책사랑>을 받아보고 싶으신 분은 인터넷편지로 연락해 주십시오. http://pen.nwonuri.net에 가셔도 최종규 기자가 쓰는 헌책방과 우리말 이야기 글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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