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서점> 느림을 배우는 헌책방 (2)

연대 앞 <정은서점> 이야기

등록 2000.11.28 12:51수정 2000.11.28 14:27
0
원고료로 응원
작고 값싼 책들

<규합총서 교주본>을 그제(11/26) <정은>에서 건졌죠. 이 책은 신구문화사에서 문고판으로 1974년에 펴냈답니다. 1974년 책값이 360원. <일제시대의 항일문학>은 400원입니다. 1975년에 나온 <김수영-거대한 뿌리, 민음사>는 500원입니다. 1977년에 나온 창비시선은 700원이니 해마다 책값이 많이 올랐음도 살필 수 있겠더군요. 그러나 1975년에 나온 <신기철,신용철-새 우리말 큰사전, 서울신문사>는 무려 1만9700원입니다. 허웅 스승이 1976년에 번역한 <용비어천가, 정음사>는 책값이 1000원. 1978년 한길사에서 나온 <김정한-낙동강의 파숫군>은 1500원입니다. 이런 값들을 놓고 보면 문고판 <규합총서>가 무척 싼 값에 나왔음을 알 수 있겠죠.


요즘 문고판 가운데 가장 싸다고 할 책은 역시 대원사 "빛깔있는 책들"로 4800원입니다. 창해ABC나 시공디스키버리총서는 7000원, 8000원을 웃돌고 있어서 문고판이라고 할 수도 없는 형편이지요. 범우사 문고판도 값이 꽤 비싸답니다. 대원사에서 출판사 자체 이익을 적게 남기며 `독자우선주의'를 하는 일을 생각하면 다른 출판사들은 책 보급과 대중화를 그다지 신경쓰고 있지 않고 있는 현실이지요.

<규합총서> 같은 고전은 처음 나올 때부터 널리 읽힐 목적으로 만든 책입니다. 그래서 이를 요샛말로 다시 펴낼 때는 더 많은 사람들이 손쉽게 사서 볼 수 있도록 `문고판'으로 자그맣게 만들고 값도 싸게 해야 알맞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나라 출판문화 현실은 이와는 거꾸로 가고 있어요. 너무 겉을 번지르르하게 꾸며서 책값은 책값대로 비싸고 잘 내지도 않으니 사서 보기가 힘들죠.

다른 나라(외국) 고전은 책방에 가득하고 손쉽게 사서 읽을 수 있지만 우리네 고전은 펴낸 숫자도 적고 책값도 비싸서 사 읽기가 힘들답니다. <정은>에 가 보면 마치 `문고판 전시장'이라도 되는 듯 갖가지 문고판이 가득합니다. 이곳에서 눈에 띄는 문고판으로 분도출판사에서 낸 녀석도 있고 `중앙일보사'에서 펴낸 문고판도 눈에 띄지요. 요새 중앙일보사는 중앙M&B라는 이름으로 돈 되는 책만 펴내고 있답니다. 중앙일보사는 지난날 자신들이 문고판으로 값싸게 양질 책을 냈던 일을 떠올려야 합니다. 신문도 똑바로 만들어야겠지만 책도 똑바로 제대로 만들어야죠.

대중성과 책 값어치

지난 달에 나온 <어린이공화국 벤포스타>란 책을 두고 윤구병 선생님은 "그 책을 만드는데 걸린 시간과 공을 생각하면 책값이 비싸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사람들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 책값만 일대일 절대비교를 한다"면서 그래서 책을 만드는데 든 공이나 시간을 헤아리지 못한다고 덧붙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오래 공과 시간을 들어 열매맺은 이야기를 혼자 나눌 생각이 아니고 책으로 펴낸다고 생각하면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바로 `대중성'입니다. `책을 읽는 대중'들은 얼마나 그 `공과 시간을 들인 값진 책'을 손쉽게 집고 찾아서 읽을 수 있느냐죠. 누구나 손쉽게 도서관을 찾아가서 책을 볼 수 있는 사회 환경과 문화 환경이 되어 있지 않은 만큼 `책 유통'은 책 문화에서 크게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렇기에 짐스럼(부담)없이 사볼 수 있도록 `공과 시간을 들인 책' 책값을 매기는 일도 중요합니다.

<벤포스타>란 책은 일반 책보다는 작은 판이지만 문고판보다는 큰 책입니다. 이 책을 문고판 크기로 값싸게 만들고 종이질도 조금 낮췄다면 - 사실 재생지치고는 재생지 티가 안 나리만치 너무 좋은 종이로 만들었습니다 - 우리는 이 책을 더 손쉽게 사 읽을 수 있지요.


`느림' 자체도 잊어야 `느림'이지

요즘 우리 삶은 `빠르기'만이 앞서 있습니다. 어디서 무얼 하든 `빨리' `먼저'고 `으뜸' `일류' `최고' 아니면 제 값어치를 못 받습니다. 일자리도 돈을 많이 벌 수 있어야 사람들이 몰리지요. 그러나 일한 만큼 보람을 찾는 일에는 눈길을 두지 않지요. `느림'이란 굼벵이처럼 느리다는 `느림'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삶이 제 빠르기를 넘어서서 "빨리 죽으려고 기를 쓰는 모습"에서 벗어나자는 느림입니다. 너무 빨리 가고 있으니 발걸음을 죽이자는 얘깁니다.

헌책방에서 일하는 분들이 "책다운 책이 없어서" 장사할 맛이 안 난다는 얘기를 할 만큼 출판사들은 책다운 책을 만들지 못합니다. 이런 모습도 `빨리 책을 만들어내고 돈도 빨리 많이 벌어들일 수 있는 책'에 눈독을 들인 탓이 큽니다. 헌책방은 `책손님이 반가와 할 값지고 훌륭하고 멋지다는 책'만을 갖추지 않습니다. 헌책방은 말 그대로 `헌책'이라면 온갖 꼴을 갖춘 책을 책방에 쌓아두지요. 이 안에서 `진주'를 캐고 `옥'을 찾는 일은 바로 책손님이 할 일입니다.

인터넷에 책 목록을 쭉 올려놓아 자기가 찾는 책을 손쉽게 찾도록 하는 일도 좋지요. 그 `빠름'도 참 훌륭하고 쓸모가 많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빠름'을 좇는 삶 속에서 놓치며 스쳐지나가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경제성장만을 외치고 `경제 문제'만에 매달린 탓에 수천 수만이 훨씬 넘는 노동자들이 실업자가 되어 거리로 몰려나오는 일을 너무도 우습게 여기고 맙니다. 그래서 `정리해고'는 당연한 일로 여겨버리죠.

얼마 앞서 십만이 넘는 농민이 상경투쟁을 하겠다 했으나 경찰들이 모가지 비틀 듯 막아서 고속도로를 막고 엄청난 시위를 했습니다. 언론매체와 내로라 하는 전문가들은 "농민들 요구는 정당하다. 하지만 방법이 틀렸다"는 똑똑한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농민들 또한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경제성장' 희생양이 되어 애써 지은 농산물들이 똥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또한 `빠름'에만 눈길을 둔 우리들 현실이 빚어낸 아픔입니다.

함께 걷는 길

김남주 씨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노래했습니다. 경제만 앞서가는 것도 아니고 사회만 먼저 가자는 것도 아닙니다. 돈만 많이 벌기보다 문화생활을 누리며 행복하게 사는 일이 더 소중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책은 어떻겠습니까? 책을 찾는 책방은? 헌책방은?

어제(11월 27일) <정은서점>을 다시 찾아가서 맡겨 두었던 <한글문화자료집> 세 권과 1947,1948년에 나온 교과서 네 권과 <우표요론(1969)> <남북한말비교사전(1995)> <양성우-낙화(1985)> <서대문형무소, 열화당(1988)> <정호경-나눔과 섬김의 공동체, 분도출판사(1984)> <그 날이 오면, 정음사(1974)> <유태종-한국의 명주, 중앙일보사(1978)> <손석춘-여론 읽기 혁명, 한겨레신문사(2000)> 들을 더 골랐습니다.

짧게는 몇 달 앞서 나온 책부터 길면 쉰세 해가 되는 책까지 골랐습니다. 앞서 가고 빨리 가기만을 바란다면 나온 지 한 달, 아니 며칠만 지나도 `낡은 책'이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새로 나온 책이라 해도 오랜 세월을 곰삭고 준비해서 나왔음을 떠올려야겠습니다. 1947년 <중등수학> 교과서를 엮으려고 지난 수천 해 동안 거듭난 수학밭 연구물을 모았을 테며 손석춘 씨가 <여론 읽기 혁명>을 내려고 여러 해 동안 <한겨레>에 싣던 글을 모았습니다.

<한국의 명주>란 책이 나오기까지는 오랜 세월 동안 우리 한아비(조상)들이 빚어온 술이 있었지요. 오랜동안 집집마다 내려오고 고을마다 내려온 `전통술'이 없었다면 <한국의 명주>란 책은 빛을 볼 수 없습니다.

`느림'이란 바로 이러한 앎과 슬기를 깨우치자는 말입니다. 오래 오래 이어온 앎과 슬기를 소중히 여겨 스스로 곰삭이고 이웃과 나누자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날이 오면>이란 시모음이 193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읽히듯 언제나 우리 곁을 아름답게 수놓는 이야기를 만들자는 말입니다. 그래서 혼자 앞으로 백 발자국 가기보다 백 사람이 어깨동무하고 노래도 부르고 신나게 놀이도 하면서 한 발자국 가자는 말이지요.

<중앙일보>와 <중앙M&B>

오마이뉴스 기사에서도 `중앙일보 책 소개' 이야기가 올라온 적 있습니다. 책 이야기를 `문화'가 아닌 `오락 연예' 쯤으로 다루는 - 기사에서 `엔터테인먼트 섹션'에 책 이야기 있답니다 - <중앙>이 참으로 생각이 있는지 묻고 있죠. 시대를 앞서가고 뭐를 앞서간다는 <중앙>이 책을 이처럼 다루는 일이 `시대를 앞서가는 일'이냐고 다시 묻기도 합니다. 그런 <중앙>이지만 70년대엔 자그마한 문고판으로 `중앙신서'를 펴냈습니다.

<중앙신서>는 바로 그와같은 시대적인 요청에 따라 새로운 안목과 새로운 `스타일'로 기획된 책이다. 이것은 후세에 물려주는 우리의 지적유산일 뿐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밝은 눈과 원숙한 지성과 품격의 지남침도 될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중앙>에서 내는 책은 `후세에 물려줄 만한 지적유산'도 `오늘을 살아가는 밝은 눈'도 `원숙한 지성과 품격의 지남침'도 될 만하지 못합니다. 한때 잘 팔릴 만한 책으로 가득하고 한 번 읽고 버리기에 알맞은, 어쩌면 거들떠볼 만한 값어치도 갖추지 못한 책이기 일쑤입니다.

세월을 묵고 세월을 거듭날수록 더욱 더 아름다워지잖고 되레 거꾸로 가는 까닭은 무얼까요? 처음엔 높고 해맑은 뜻을 가졌다가도 뒤처지고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짓만 하는 까닭은 또 무얼까요? 모든 뿌리는 아니겠으나 `빠르기'에 너무 매달린 나머지 서로 아름답게 어깨동무하며 한 걸음씩 내디딛기보다 자기 뱃속을 채우는 일에 앞장선 탓도 크지 싶습니다.

아쉬운 `그 날이 오면'

`전집'은 어느 훌륭한 한사람(개인)을 기리며 그이에게 많은 것을 본받고 배우자는 뜻에서 펴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전집'은 되도록 널리 읽힐 수 있도록 펴내야 좋습니다. 그리고 `전집'은 오래도록 둘 수 있도록 `소장본'을 만들 찾을모도 있고요. 그런데 우리 책 문화는 `소장본 전집'만 만들고 `보급하는 전집'은 전혀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심 훈 전집>도 양장으로는 나오겠으나 문고판으로 값싸게 사 읽을 만한 판형으로는 나오지 않죠. 오직 하나 있다면 외솔 스승이 낸 책은 정음사 문고판으로 전집이 다 나왔다는 것 하나. 정음사를 외솔 스승이 열었기에 이곳에서는 외솔 뜻을 이어받아 그렇게 문고판 전집을 냈지만 <문익환 전집>도 <예용해 전집>도 <이철용 전집>도 <박경리 전집>도... 하나같이 `전집'을 다 사려면 십만 원이 훨씬 넘는 돈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은 또 어떻습니까.

시 "그 날이 오면"을 읽으면 "그 날이 오면...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 종로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라 /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 조각이 나도 /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하고 목놓아 부르짖습니다. 저도 마찬가지 마음입니다. 우리가 좋은 책을 부담없이 사 읽고 나눌 수 있는 책 문화 환경을 갖고 죽자사자 앞서거니 뒤서거니 치고박고 다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저 또한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책을 보면서

<정은서점>을 둘러보면, <친일파> <오래된 미래>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고인돌 3> <살아 있는 그림 그리기> 같은 요즘도 꾸준히 팔리는 책이나 절판된 책부터 구비문학대계> <황금찬 시모음> 1940년대 교과서, 북한에서 펴낸 말글 연구서 영인본까지도 찾아볼 수 있지요.

책을 보면서 무얼 얻고 무얼 사회에서 나눌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남들에게 이렇게 말하기 앞서 저부터 `느림'을 올곧게 헤아리고 곰삭여 늘 즐겁고 조촐하게 살아가야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 [연대 앞 정은서점] 02) 323-3085


* <정은서점> 언저리(연대 앞)에 서는 버스들 *

일반버스 : 5-1, 41, 8, 70, 73, 130, 135, 142-1, 141, 142, 143, 133-2, 205, 205-2, 588-1, 588-2, 542, 543, 328

좌석-공항버스 : 68, 12, 130, 773, 800, 903, 903-1, 1000, 567, 61-2, 62, 77-2, 77-3, 915, 915-1

덧붙이는 글 * [연대 앞 정은서점] 02) 323-3085


* <정은서점> 언저리(연대 앞)에 서는 버스들 *

일반버스 : 5-1, 41, 8, 70, 73, 130, 135, 142-1, 141, 142, 143, 133-2, 205, 205-2, 588-1, 588-2, 542, 543, 328

좌석-공항버스 : 68, 12, 130, 773, 800, 903, 903-1, 1000, 567, 61-2, 62, 77-2, 77-3, 915, 915-1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경남, 박근혜 탄핵 이후 최대 집회 "윤석열 퇴진" 경남, 박근혜 탄핵 이후 최대 집회 "윤석열 퇴진"
  2. 2 "V1, V2 윤건희 정권 퇴진하라" 숭례문~용산 행진 "V1, V2 윤건희 정권 퇴진하라" 숭례문~용산 행진
  3. 3 "집안일 시킨다고 나만 학교 안 보냈어요, 얼마나 속상하던지" "집안일 시킨다고 나만 학교 안 보냈어요, 얼마나 속상하던지"
  4. 4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5. 5 "윤 대통령 답없다" 부산 도심 '퇴진 갈매기' 합창 "윤 대통령 답없다" 부산 도심 '퇴진 갈매기' 합창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