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8월 말 고등학교 2학년에 다니고 있는 아들과 한밤중에 심각한 토론을 했다. 그 아이는 8월 내내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늦게 들어가서 씻고 나니 12시가 되었다.
"아버지께 상의드릴 일이 있습니다."
"이 밤중에?"
" 예, 내일 풍물반 연습이 있는데 그전에 처리해야 되어서요."
우리 아이는 1학년부터 특별활동으로 풍물반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여름방학 기간에 풍물전수를 가기로 했는데 갑자기 풍물전수가 아닌 사물놀이 전수를 간다고 해서 가기 싫다고 빠진 적이 있기에 심각한 것으로 짐작이 되었다.
그 동안 이 학교의 풍물반은 경희대 풍물패연합에서 지도를 해 주었으며, 그 풍물패는 호남좌도의 임실 필봉굿 계열이었기에 사물놀이가 아닌 순수 풍물놀이를 지켰고, 당연히 남원의 필봉굿 전수관으로 갈 줄 알았다가 바뀐 탓에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또 우리 아이는 풍물놀이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어온 터여서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저는 개학한 날(8월 27일) 가을 축제(사실 축제라고 쓰면 일본식 한자말이다) 때 사물놀이 공연을 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인터넷 다음사이트의 우리 풍물반 카페에 글을 올렸어요. '풍물반이 왠 사물놀이?'라는 제목으로 썼는데 저도 모르게 좀 감정적으로 흘렀어요. 그랬더니 대부분의 친구들이 제게 욕까지 하면서 풍물반을 나가라는 거예요."
아들은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채 심각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저는 사흘이나 고민했어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분명 사물놀이가 아니고 풍물굿인데 왜 지도선생님과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걸 깨닫지 못하는지, 이러다가 풍물굿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서 우정만 깨지는 것은 아닌지, 왕따 당하는 것은 아닌지 크게 걱정이 돼요. 아버지는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많이 가슴이 아팠겠구나. 그렇지만 우리 한번 생각해 보자. 지금으로썬 풍물굿과 우정 두 가지 모두를 껴안을 수는 없지 않겠니? 그렇다면 아픔이 있더라도 한쪽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겠다. 내 판단엔 우정은 나중에 얼마든지 복구될 수 있지만 진실은 한번 깨지면 영원히 되찾을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되는구나. 하지만 아버지는 단순히 조언만 할 따름이고 결정은 네 스스로 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이 외에 많은 얘기를 했다. 생각보다도 우리 아이는 큰 갈등 속에서 고통받은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나의 이 말이 끝나자마자 오히려 아이는 얼굴이 환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저는 사실 아버지의 그 말씀을 기대했었어요. 이미 마음 속으론 결정을 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없었거든요. 이제 홀가분합니다. 내일 학교에 가면 선생님께 분명히 말씀드리겠어요."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니?"
"아니 이렇게 아버지와 생각이 같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자신이 생겨요. 걱정하지 마세요. 차리리 풍물굿을 더 배우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진실을 지켰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할래요."
나는 깜짝 놀랐다. 이 아이가 벌써 이렇게 크다니.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하고 당당할 수 있다니 정말 뿌듯한 감정이 북받쳤다. 그 후 10월에 경희대 풍물패연합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을 때 나는 우리 아이를 자랑하는 팔불출이 되었다.
요즈음은 TV에서도 사물놀이 공연을 자주 볼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김덕수라는 걸출한 인물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더구나 문화를 사랑하는 세계인들도 사물놀이와 김덕수에 찬사를 보내고 있어 민족문화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화도 현대세계에 제대로 알리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마켓팅의 힘을 빌리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따라서 김덕수패 사물놀이의 마켓팅기법은 다른 모든 문화인들도 관심을 가질 법하다. 하지만 만일 철학이 결여된 마케팅이라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도 있어서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우리 아이처럼 사물놀이와 풍물을 확실히 구분짓고 사물놀이에 문제제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물놀이는 원래 있던 말일까? 그리고 풍물굿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아니면 같은 놀이의 또 다른 표현인지 한번 확인해 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아니 풍물굿에 대한 기원과 개념, 그리고 분류, 형태 등 모든 것을 공부해 보기로 하자.
풍물굿의 기원
풍물굿의 기원은 첫째, 노동설로서 풍물이 농경의례 즉, 생산과 풍요의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둘째, 제의설로서 풍물굿이 제천의식인 소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로 집약된다. 삼국시대의 축원 형태로 나타난 제천의식의 기록에서 풍물굿의 기원을 찾고자 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며, 이는 자연적인 재앙을 막고 한 해의 농사가 잘 되기를 기원하며 추수를 감사하고, 가정과 마을과 나라의 모든 액을 막아주도록 신에 기원하는 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또 다른 생각은 수렵할 때에 짐승을 쫓으며 일제히 소리쳤을 함성이나 두드렸을 몽둥이 소리, 또는 짐승을 잡고 나서 질렀을 환호성, 엉덩이 춤 등의 반주악이 될 수 있는 타음의 소리 등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당시로서는 오늘날과 같은 악기가 다 갖추어진 것이 아니라 북과 같은 간단한 타악기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즉, 북이 풍물을 시작한 악기로 일 것이며, 여기에 꽹과리, 징, 장고와 소고, 날라리 등이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풍물의 기원에 대해 역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삼국지 위지 동이전' 등에 삼국시대 이전 '영고'나 '동맹', '무천' 등의 제천 행사에서 이미 풍물굿의 모습이 나타났다고 추측되어진다.
삼국시대 들어 주조술이 발달한 신라에서는 쇠나 방울로 두레농악(도솔가)을 지어 놀았다고 하며, 백제에서는 산천에 제사를 지낼 때, 군사들을 열병할 때 풍물을 쳤다고 하였다. 삼국시대에 군사들의 싸움에 풍물을 이용하여 사기를 올리고, 고구려의 조의선인, 백제의 소리, 신라의 화랑도 등에서 군사열병과 산천기도에 풍물을 이용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풍물이 국방예술로서 자리잡아 전쟁시 군사의 사기를 높이고 적을 교란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거란군의 침입시 최충현이 군사 열병식에서 적군 목베는 놀이굿인 도둑잽이굿을 하였다고 하고, 청자기로 만든 장고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조선시대의 김홍도 그림 속에서 무동이 춤을 추는데 풍물악기가 반주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악기를 연주하는 것에다 여러 가지 잡색(양반, 광대 등)까지 보태져 연희적 성격을 더해 온 것으로 본다. 그리고, 고구려 시대를 전후해서 서역 및 중국의 영향을 받아 악기들이 추가되고 짜임새도 바뀌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풍물굿의 의미
풍물굿이라 하면 꽹과리, 징, 북, 소고, 나발 등의 기본적인 악기를 사용하여 판을 구성하고, 춤을 추거나 놀이를 하며 생활과 노동, 놀이 즉 농경문화 속에 노동과 함께 나타난 민중의 생활의식, 공동체적 문화 양식이다.
풍물굿이 행해질 때에는 일단 판을 형성하여 악을 치고, 연희와 의식을 베풀어 관객의 흥을 고조시켜서 풍물, 판, 관객이 일체가 되어 신명나게 놀 수 있게 만든다. 풍물굿은 첫판이 시작될 때 고요 속에서 하늘을 열어젖히는 쇠(꽹과리)소리와 함께 시작되어 점차적으로 사람들의 삶의 모습 구석구석에 풍물의 소리들이 맺혀져 신명을 돋구고 그들의 감정과 정서에 응집된 한을 표출해 내도록 하는 것이다.
풍물굿은 연주자와 관객이 유리되어 따로 노는 그런 형태가 아니다. 한 덩어리가 되어 '더불어'를 이루어가는 우리 문화의 기본철학이 고스란히 실려 있다.
풍물굿의 이름
풍물 - 풋굿과 같이 신풀이 살풀이의 뜻으로 소원을 푼다는 뜻으로 풍년을 기원한다는 '풍장(풀이장구)굿'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다만 '풍물'은 단순히 악기만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어 놀이(연희)가 곁들여지고, 풍농, 풍어 등의 비나리(기원)의 성격이 있으므로 '풍물굿'으로 부르는 것이 좋겠다. '풍물놀이'는 기원의 성격이 없다.
농악 - 1870년대까지 판소리 춘향가에는 '두레굿'이라 쓰였는데, 일본 제국주의의 농업 수탈정책의 하나인 농업 장려운동으로 원각사의 협률사라는 단체에서 농악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농악이란 말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농민의 음악'이라 하여 농사꾼이 하는 음악으로 여겨질 수 있다. 원래 풍물굿이 농경사회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일제의 민족 말살정책의 하나로서 일본의 탈놀이 능악(能樂)의 발음인 '노가꾸'를 본떠서 농악이란 말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제국주의는 우리의 민속신앙을 말살하고 농업 장려의 목적에 한해서만 풍물굿을 허용했다. '농악'이란 이름으로 신청을 해야만 굿판을 열 수 있었기 때문에 굿하는 단체들이 농악이란 이름으로 공연신청을 한 데서 일반화되다가, 8 15 해방 이후 많은 학자들이 국악이론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농악이라 부르게 되었다.
사물놀이 - 1978년 2월 서울 원서동에 있는 공간사랑에서 남사당패의 후예들인 김덕수패 사물놀이가 최초로 사물놀이 공개 무대를 연 데서 시작했다. 꽹과리, 징, 북, 장구 등 4개의 악기만 가지고 무대에서 앉아서 연주하는 형태이다.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사물놀이는 풍물굿을 새롭게 재구성하여 대중들과 세계인들에게 흥미있게 접근시켰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풍물굿이 대체로 각 지역의 가락만 연주하는 데 반해 사물놀이는 전 지역의 가락을 모아 재구성했다는 특색이 있다. 또 풍물굿과 달리 좁은 공간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그러나 사물놀이는 풍물굿을 서양문화화한 것으로 연주자가 무대에 유리되어 오로지 연주만 하며, 관객들은 연주를 지켜보다가 박수만 치는 서양문화의 특징을 드러낸다. 진법짜기, 무동놀이, 자반뒤지기 등의 풍물굿에서 하는 놀이(연희)가 없다. 따라서 사물놀이는 우리 문화를 쉽게 접근하도록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문화의 본류는 아니라는 것이다.
풍장 - 농사일에 많이 쓰이는 말로 김매기할 때 이루어지는 풍물놀이를 가리킨다.
두레 - 원래는 우리나라 고유의 마을 단위 일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이며, 특히 김매기를 위해서 만들어졌다. 풍물이 공동체적 놀이로서 일두레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풍물을 두레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걸굿 - 사찰의 보수 및 건축 기금 등을 모금하는 굿으로 가정을 방문하여 집안 신에게 매굿과 고사굿을 해 주고 양식과 베, 돈 등을 받는다. '동량'이나 '걸립' '걸량'이라는 이름으로도 기록이 되어 있다.
풋굿 - 푸리굿과 살풀이 등의 뜻으로 신에게 소원을 푼다는 뜻이지만 농사의 '풀밭 농사'로 해석하는 경향도 많다.
굿 - 모든 지방에 걸쳐 일반적으로 쓰였던 말로 '굿친다'라는 표현을 쓴다. 굿의 의미는 원래 '모인다'는 뜻을 갖고 있었다. 모여서 공동체 안의 모든 일을 의논하고 풀어 가며, 공동체적 바람을 집단적으로 빌며 신명으로 끌어 올려 새로운 삶의 결의를 다지는 과정을 담아내는 말이었으나, 요즘에는 무속에서의 신앙적 뜻만을 가리킨다.
매굿 - 매귀(埋鬼), 매구 라고도 하며, 땅 밑에 있는 나쁜 귀신이 나오지 못하도록 묻고 밟는다는 뜻으로 보통 섣달 그믐날 밤에 한다. 주로 경상도 지방에서 풍물을 일컫거나 꽹과리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군몰 - 군사훈련 및 전쟁에서 군사를 내몰아칠 때 사용하는 고무, 고취한다는 뜻으로 우리말의 '군몰' 또는 '군악' 등으로 쓰였다.
덧붙이는 글 | ● 도움 받은 자료
<풍물굿에서 사물놀이까지>, 김헌선, 귀인사, 1991
<서울 봉천놀이마당 민속자료집>
<풍물교실>, 풍물춤패 '깃발', 민맥, 1991
<양동훈 CD>, 어울 '98 양동훈, 2000
● 도움 받은 인터넷 사이트
봉천놀이마당 : www.norimadang.or.kr
인터넷 사물놀이 : www.samulnori.net
이형영의 탈춤풍물 한마당 : www.pungmua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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