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헌책백화점>을 찾아가던 날 저녁엔 책방에 다른 손님이 없었답니다. 그때 제가 문을 스르르 열고 들어갔는데 아저씨는 누가 들어온 줄도 모르시는지 소리내어 읽고 있던 책을 계속 읽고 계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 요즘 일본말을 새로 공부하신다면서 손님이 없을 때면 틈틈이 일본말책을 읽으신다더군요.
<헌책백화점> 아저씨는 당신 자식들을 모두 대학교 공부까지 마쳤지만 책방 장사를 늘 즐겁게 하는 한편 당신 공부를 부지런히 하십니다. `늘 공부하는 책방 주인'을 보노라면 헌책방을 찾는 책손님으로서 더 부지런히 책도 읽고 사회 속에서 할 일을 찾아 힘껏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헌책방은 아주 힘들어
"헌책방은 떨어지는 새"와 같다는 청구역 <헌책백화점> 아저씨 말씀을 가슴 깊숙히 새깁니다. "씨름을 할 때 아래에 눌리는 사람이 힘이 있겠느냐"며 바닥에 깔리고 바닥으로 쳐지는 게 바로 지금 헌책방 모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헌책방뿐이겠습니까. 새책방도 마찬가지요, 우리들이 살아가는 데 바탕이 된다는 모든 삶과 모습이 바닥을 기고 그 바닥보다도 더 아래로 쳐지고 어깨도 축 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헌책백화점> 아저씨는 그런 아픔(절망) 속에서도 웃음(희망)을 떠올립니다. 1980년대까지 헌책방들이 기운차게 일어섰다면 그때부터 앞으로 대여섯 해는 더 헌책방이 숨죽이고 있을 때이며 그 뒤로는 헌책방들이 새롭게 다시 태어나며 힘을 얻으리라고 힘주어 이야기합니다.
경제 공부를 하는 분들은 알지요? 천정까지 치솟는다 해도 다시 바닥을 기고 그러다 다시 천정으로 치솟는 줄(곡선) 말입니다. 마치 물결을 타듯 오르락 내리락 하는 줄 말입니다. 지금 우리네 헌책방은 바닥으로 곤두박칠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처럼 곤두박질칠 때 얼마나 살림을 잘 가꾸고 잇느냐가 참 소중하고 중요합니다. 지금 헌책방 살림을 잘 지키고 가꾸면 다시 헌책방 문화가 샘솟고 피어날 때는 그 동안 힘겹게 애먹던 아픔을 뜨거운 눈물 섞인 웃음으로 거듭 피어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메일인가 뭔가는 난 몰라
얘기를 듣고 나누며 죄송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나 제가 펴내는 헌책방 소식지를 낸 뒤에 아저씨에게도 `이런 저런 책을 찾는 전화'가 퍽 왔나 봅니다. 하지만 그 전화를 받으며 아저씨는 "잘 모르겠어요. 직접 한번 와서 구경이나 해 보세요"하고 말씀하셨답니다. 헌책방이란 곳은 스스로 몸을 움직여 찾아와서 봐야지 비로소 자기가 바라는 책이든 바라지 않았으나 생각치도 못한 반가운 책을 만나지 전화로 이런저런 책이 있느냐고 물어서는 책을 보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책'이라 하니 좀 가볍게 봅니다. 그러나 몬(물건,대상)을 달리 하여 우리가 살 집을 떠올려 볼까요? 우리가 평생 살아갈 집을 사고 짓는다고 할 때 집터를 보지도 않고 집터를 잡아서 집을 짓고 올릴까요? 아니지요? 책은 바로 우리가 평생 살아가는 동안, 그리고 죽어서는 자기 뒷세대들에게도 남고 이을 만큼 영향을 끼치는 앎과 슬기를 채운 창고입니다.
이 말은 책 한 권이 참으로 소중하고 자기 삶을 알뜰하게 이끌며 한낱 앎(지식)쪼가리가 아닌 슬기를 안겨주는 책이라 한다면 너무 가볍게 책을 사려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참말로 백령도나 영흥도, 장봉도 같은 외딴 섬이나 자그마한 섬에 사는 사람이거나 깊은 산골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어지간하면 손수 자기 몸을 움직여 책방을 찾아갈 수 있으며, 그렇게 책방을 찾아가서 `자기 두 눈'으로 여러 가지 책을 살펴보면서 자기에게 가장 알맞고 자기 삶과 앎을 살찌우고 이끄는 책을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지요.
그저 전화 한 통 돌리고 이메일주소 알아서 인터넷이나 통신으로 주문 받아서 책을 손쉽게 사서는 자기 것으로 곰삭이기 힘들다는 이야기입니다.
바탕(기본)
그러나 문제는 자기가 볼 책이지 책을 사는 `모습'이 아니지 않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책을 참말로 알뜰히 보는 사람은, 자기가 바라는 책을 아주 꼼꼼히 셈해서, 시간을 아끼며 책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주 손쉽게 끼니를 때우는 먹거리와 오랜동안 정성을 들여서 지은 먹거리가 얼마나 다른지요.
손쉽게 끼니를 때우고 손쉽게 돈을 벌어 손쉽게 살아가는 삶과 시간은 걸리더라도 정성들여 지은 밥을 먹고 시간은 걸리더라도 깨끗하고 보람차게 자기가 흘린 땀의 대가를 모아서 알뜰살뜰 살아가는 삶 가운데 어떠한 삶이 참 아름다움이며 자기뿐 아니라 언저리 사람들에게도 빛이 되는 삶일까요?
밥만 먹어도 힘 잘 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지난날 남의 땅을 부치던 가난한 농사꾼들은 고기라도 제대로 먹어서 힘을 써서 농사를 지었겠습니까. 여러 가지 맛난 먹거리를 먹지 못해도 한 가지를 알뜰살뜰 먹고 그러면서도 이웃과 도르리 하고 두레도 하고 품앗이도 하고 울력도 해가면서 즐거이 살았습니다. 책 한 권을 읽어도 도르리 하고 두레 하는 마음으로 읽으면 그 한 권은 백 권이나 천 권을 읽은 것과 마찬가지로 힘을 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손쉽게 책을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이는 그저 모든 일을 `빨리빨리' 이루고 `빨리빨리' 해치우는 조급증이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는 게 아닐까요? 손수 책방으로 발걸음을 떼서 책을 살피는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안 들인다고 해서 책을 한 권 더 읽고, 그만큼 더 알뜰살뜰 시간을 쓰고 뭇사람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으면서 우리 삶을 살찌울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품을 아끼고 시간을 아꼈으나 우리 사회는, 삶이, 정치가, 문화가 왜 이 모양 이 꼴이냐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효율'을 이야기했고 `편리'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편리와 효율이 우리에게 준 것은 무엇이죠?
<헌책백화점> 아저씨는 `기본(바탕)'을 이야기합니다. 제가 <헌책백화점>을 찾아간 때는 저녁 여덟 시가 넘은 때입니다. 아저씨는 열 해 앞서만 해도 "지금 시간엔 대학생 열 사람은 책방에 가득 들어차서 서로 사상과 철학 책을 고르려고 눈이 벌갰지. 자기가 볼 책을 혹시 다른 사람이 먼저 집지 않을까 해서 말야"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요즘 젊은 사람은 머리가 연해져서(물러져서) 자기 기본을 닦는 책을 보지 못한답니다. 그리고 그런 머리 무른 젊은이가 대학생이 되어 시간이 오래 걸리고 더딘 앎이라 하더라도 오랜동안 자기를 살찌우고 이끄는 앎과 슬기와는 거리가 먼 손쉽게 돈 벌고 손쉽게 해치우는 데에만 눈길을 두니 졸업장을 받는다 해 보아야 어디에 쓸모가 있고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배웠으면 깨달아야 한다
<헌책백화점> 아저씨는 보기로 `술'을 이야기합니다. "익어야 술이지 익지 않으면 식초밖에 못 된다"면서 "배워서 깨달아야지 배우고도 깨닫지 못하면 그게 무어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배웠으나 깨닫지 못한 `안 도덕'인 국회의원을 뽑아서 지금 나라가 이 꼴이 아니겠느냐는 말씀도 곁들입니다.
법도 중요하지만 도덕으로 정치를 하지 못하기에 이렇게 문제가 많지 않느냐는 말씀. 그래요. 그렇지요. 법도 법대로 지키지 않고 도덕도 도덕대로 살리지 못하는 지금 우리 사회 뿌리는 어디부터일까요?
얼마 앞서 목동역 언저리 헌책방 <수현헌책방>에서 건진 <이오덕-거꾸로 사는 재미>를 읽노라면 이 선생님이 국민학교 교사였던 때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1960년대에 버스를 타던 때 이야기를 보노라면 젊은 학생들이 나이든 사람이나 선생들에게 자리 양보하기를 꺼려한다면서, 그러나 애써 자리를 양보할 때도 자리를 내놓지 않으면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늙은이들을 보고 그네들은 속으로 저 영감탱이 언제 죽나 하고 생각할 거라고 이야기하지요.
생각해 봐요. 그때 그 젊은 학생이 누구일까요? 바로 요즘 우리나라를 이끈다는 사오십 대입니다. 그리고 그때 그 젊은 학생은 이제 `자리 양보를 받는 늙은이'가 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그때 그 젊은 학생들도 자기들에게 고래고래 소리지르던 그 늙은이가 되지 않았던가요? 한 마디로 말해서 `젊은 것'들을 나무랄 일이 아니란 소립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듯 오래 살고 높은 자리에 있다 하는 사람이 모범이 되지 않기에 더러운 물이 자꾸 흐르고 더 더러워집니다.
파도가 치고 물이 흘러야 더러움이 씻기는데 파도도 안 치고(개혁도 없고) 물도 안 흐르니(세대교체도 없으니) 다들 이 모양 이 꼴인 셈이죠.
<드래곤볼>을 골랐습니다
<헌책백화점> 아저씨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중용> 책을 펼치며 `온고지신'을 못하는 우리들 모습을 안스럽게 이야기하기도 하십니다. 아저씨는 제가 책방 문을 열고들어갈 때 손님이 온 줄도 모르고 일본말로 된 책을 부지런히 읽고 계시더군요. 아저씨는 손님이 없을 때는 일본책을 읽기도 하고 고전(한문)을 읽기도 하며 공부를 하십니다.
누가 무어라 하는 사람도 없고 헌책장이가 책공부를 하고 삶공부를 해 보아야 무엇 하겠냐는 소리도 들으나 스스로 자기 `바탕(기본)'을 다지려고 공부를 하십니다. "깨달아서 배우고 남을 가르칠 수 있어야 `성(性)'이 선다"는 이야기를 담은 고전을 줄줄 외면서 깨우침 없이 앎(지식)만 머릿속에 가득하여 손쉽게 떼돈을 벌어 평생 손쉽게 살려 하는 사람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걱정하십니다.
자기 가게가 없어 애먹는 다른 헌책방 이야기를 듣습니다. 한 자리에서 오래 붙어 있으면 장사가 잘 되나 싶어 가겟세를 올리는 주인이나, 헌책장이들 심리를 악용해서 헌책장이들이 전셋가게를 자기 가게로 사려 하면 터무니 없이 높은 값을 불러서 가게를 사지 못하게 하면서 셋값을 엄청나게 올리는 못된 집주인들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집주인 탓에 헌책장이는 10년 장사를 하면 집주인에게 고스란히 1억 원을 가겟세로 내는 셈이 되어 자기 스스로도 남는 게 없지만 헌책방 스스로도 발돋움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꺼냅니다. (헌책방은 으레 가겟세를 집주인에게 백만 원은 내고 있으니 열 해면 적어도 일억 원은 갖다 바치는 셈이지요)
헌책방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는 때라서 그럴까요? 가슴 시린 이야기만 듣기 뭣해서 책방을 헤집으며 여러 가지 책을 살핍니다. 그러면서 <드래곤볼> 마지막 권인 42호를 봅니다. 중고등학생 때 이미 본 만화지만 다시 보니 그 느낌이 또 새롭습니다. 폭력과 성 비틈이 깊은 만화라 하지만 재미를 주는 <드래곤볼> 힘은 여전합니다. 그리고 이 만화 안에 담긴 또 다른 즐거움은 그저 만만히 여겨 넘겨볼 만한 이야기가 아님을 느낍니다.
<이청준-잔인한 도시,홍성사(1978)>와 <김성인-이 사람을 믿어 주세요,거름(1988)>와 <야마모토 오사무-사랑의 집 2,대원(1997)> <남영신-맞춤법,표준어사전,한강문화사(1990)>과 <이희승 감수-글짓기 모범글(1991)>을 봅니다. 남영신 씨 낱말책(사전)은 울산시립남부도서관 도장이 찍힌 책입니다. 이 책은 어느 분이 도서관에 빌린 뒤 돌려주지 않고 서울까지 가지고 왔다가 흘러나온 책이지 싶습니다. 1978년에 이상문학상을 받으며 내로라 하는 문학상을 거의 모두 탄 이청준 씨 소설을 모은 <잔인한 도시>라는 책도 퍽 볼 만합니다. 하지만 이 책에 실린 글은 사놓고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길에서 살피니 모두 고등학생 때 읽은 글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해 봅니다. 내가 비록 지난날 읽은 글이라 하더라도 그때 읽은 느낌과 어른으로 자란 이즈음 다시 읽을 때 느낌은 같지 않으리라는 생각과 어릴 적에는 미처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 이야기를 이제는 남다르게 보고 느낄 수 있으리라고요.
어디까지 곤두박칠치나 보자
바닥을 헤매고 곤두박질칠 때 떠올리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만화를 그리는 김수정 아저씨입니다. 김수정 아저씨는 만화가로서 자기 자신을 너무도 절망하던 때 부산으로 내려가 비 오는 날 바닷가 여관에서 깡소주를 비우며 나는 도대체 무언가 하고 자책했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여기서 더는 내려갈 수 없는 바닥까지 왔구나 싶었다고 느끼며 "그래, 이제 바닥 끝까지 내려왔으니 이제는 올라갈 하늘만 있지 않겠냐" 하면서 드디어 다시 자기 그림을 찾아서 그 뒤로 <1남 4녀 막순이>를 그리고 다음으로 <아기공룡 둘리>를 비롯한 온갖 아름다운 만화를 그려낼 수 있었답니다.
지금 우리네 헌책방도 이와 같은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직 더 곤두박질칠 바닥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꾸 곤두박질치면서 더는 곤두박질칠 바닥이 없을 때 "이제는 올라갈 하늘만 있구나!"하고 깨닫고 느끼면서 우리 책 문화를 아름답게 꽃피우리라고요. 그렇게 믿습니다. 지금은 모두 힘들고 어려우나 춥고 시린 겨울을 이겨내면 따뜻한 봄을 맞이하듯 헌책방도 힘겨운 나날을 슬기롭게 딛고 견디면 따뜻한 봄날을 맞이하리라 믿습니다.
올해로 스무 돐(1982년부터)을 맞이한 <헌책백화점>이 앞으로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가지고 책손님을 맞이할 수 있기를 꿈꾸고 바랍니다. 더불어 다른 헌책방들도 함께 힘을 얻고 내면서 즐거울 수 있으면 좋겠고요.
덧붙이는 글 | [청구역 헌책백화점] 02) 2252-3554
- 지하철 5호선이나 6호선을 타고 `청구'역에서 내려 4번 나들목으로 나오세요.
- 사진은 캐논 이오에스5번 50미리(f 1.8)렌즈 감도 400필름으로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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