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름 가득한 녹차밭을 찾아서

그곳에는 언제나 봄이 머물러 있었다

등록 2001.02.08 11:14수정 2001.02.08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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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으로 간 이유

사무실 한켠에서 녹차를 내면서 창 밖을 본다. 눈에 들어온 세상은 밤색으로 덮여 있고 며칠전 내린 눈이 남아있는 곳만 기계충 먹은 아이의 머리처럼 하얀 색감을 보여준다. 단조로운 색감들이 벌써 몇 개월째인지.

하지만 한잔 따른 녹차의 색은 아직도 생명이 남아 있는 푸른색이다. 겨우 내내 바람과 눈과 안개를 머금고 힘을 뭉뚱그려 두었던 나무들이 안간힘을 다해 가지 끝으로 생명을 발산하여 세상과 조우할 때 그때 채취한 찻 잎으로 만든 녹차에는 아직 작년의 봄이 남아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벌써 10개월을 두었다가 꺼낸 탓인지 싱싱하기보다는 눅눅한 느낌이 더해진다. 이쯤 되면 별수없이 또 새로운 녹차가 나오는 봄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리한 겨울 대부분의 날을 인터넷 관광정보 컨텐츠와 씨름하였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왜 이다지도 삶이 단조롭고 한낱 모니터 안에서 모든 것을 다 해결해야 되는 것인지 의문스럽다. 컴퓨터가 없었을 때 그때의 세월들을 그리워하면서...

이런 외양의 적요와 내면의 혼란한 마음사이를 항해할 때 전화벨이 울린다. 한 방송국에서 지역문화의 해이자 한국방문의 해를 맞아 광주와 전남 지역 관광현안에 관한 문제점과 대안을 취재하자고 한다.

흔쾌히 약속을 하고 취재진과 만나 의견을 교환하고 사전 답사를 하고 콘티를 짜고 그리고 현지 답사후 다시 내용을 보완하여 촬영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나의 보성 여행은 시작된 것이다. 자의반 타의반을 반씩 섞은데다 새로운 체험까지 결부하여.

보성이 자랑하는 것 세 가지

보성은 전라남도의 남쪽이며 광주와 목포와 여수순천을 잇는 4각 구도의 한 축을 형성한다. 하지만 이것은 순전히 지도상의 편의에 불과할 뿐 보성군의 현실은 전혀 이와 딴판이다.

대도시와의 접근성 면에서는 과히 떨어지지 않지만 이렇다할 산업 시설이 전무한 상태이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 지역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전라도의 그 어느 지역과 비교해도 두루 빼어나 감히 보성 사람을 얕잡아 보는 일은 허락되지 않는다. 오죽했으면 일제시대에 삼성 삼평 사람 앉은 자리에는 풀도 안난다는 말을 했을까?

물론 당시의 이 말은 그들을 비하시키기 위한 의도적 발언이었다고 하지만 삼성으로 칭하는 장성, 곡성, 보성과 함평, 남평, 창평 이 여섯 고을 사람들의 저항 정신은 일제의 주구가 심하면 심할수록 더욱 빛났던 것이었다.

보성군의 경우는 일제때 금주령이 내렸을 때 큼직한 일이 있었다고 전한다. 당시 향교에서는 공자에게 제사(문묘대제)를 지내기 위해 일제의 금주령과 상관없이 술을 담궜는데 이 사실을 안 일본세무서에서는 술을 담근 유생을 색출하여 처벌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이때 보성의 유림들이 들고 일어서서 그 세무서 직원을 잡아 장작더미 위에 놓고 화형을 시키고자 결의하였다. 이에 놀란 그 세리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석고대죄를 하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당시의 법원에 계류되어 1921년부터 1923년까지 2년여를 끌다가 성인의 제사에는 금주령과 상관없이 술을 올려도 된다고 판결이 나 전국에서 보성 유림 덕분에 향교의 제사에는 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조그마한 예이지만 보성 사람의 사람됨을 살피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사례이다.

그 보성 사람들이 오늘날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서편제와 동편제의 맥을 하나로 만들어 독특한 보성만의 소리(강산제)로 만들어낸 박유전과 정응민 그리고 그들에게 소리를 전수해간 수많은 현시대의 명창들의 본향답게 "예향"을 외치며,

임란 의병장이었던 박광전, 안방준, 최대성을 위시하여 그 훗날의 나철, 서재필 등으로 이어지는 "의향"의 정신이며,

이 땅에서 사라질뻔한 녹차의 맥을 되살려 내고 우리가 먹는 녹차의 30%를 생산하고 다도의 맥을 잇게한 본향이라는 "다향"이라는 세 가지 뽐내는 명칭이 그것이다.

초록이 깃든 녹차밭 대한 다원

푸르른날은 그 푸르름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한다. 온갖 인쇄물에 휩싸여 지내던 20대 초반 문득 아무 생각없이 군에 입대하고 신병 교육을 받을 때 내가 가장 그리웠던 것이 바로 신나 내음이 약간 배인 듯한 인쇄물이었다.

▲대한다원의 정취 ⓒ 전고필
어느 날 군에서 가장 바쁜 곳 중의 하나인 화장실의 한켠에서 장교들이 일을 보고 가면서 흘리고 간 신문의 한쪽 귀퉁이와 만났을 때 그 때의 기쁨처럼 이 겨울 보성에서 만난 녹색 삼나무의 의연한 모습과 그 밑에 대보름 시골 마을의 줄다리기처럼 약간은 비틀거리면서도 빽빽히 열식한 푸른 차밭의 서정은 혹한의 추위도 얼굴을 헤집는 해풍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삭막하기 이를데 없었던 다른 경관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색감이 그곳에 있었으며, 사람의 땀이 그곳에 함께 있었으며 내 사무실에서는 맡을 수 없는 차의 향기가 그곳에 살아 있었다.

몇 번의 다원방문이 있었지만 삼나무가 양켠에서 사열하듯 서 있고 그 사이를 걸어가면서 느껴지는 뿌듯함이란 이 겨울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일이리라.

새벽녘에 출발한 우리가 찾았던 곳은 보성의 수많은 다원중 원조격이라고 하는 대한다원이다. 요즘 텔레비전의 한 광고에 삼나무의 호리호리한 모습과 뒤편으로 보이는 차밭 사이의 둥그런 길에 자전거를 탄 수녀님이 지나가던 어린 스님을 태워 함께 가는 모습으로 방영되어 주목을 받았던 CF의 촬영지이자 곧 개봉하게 될 영화 "선물"의 세트가 설치되어 있는 곳이었다.

가파른 산 비탈을 개간하고 골짜기에는 배수로와 길을 내며 곳곳에 60여만 그루가 넘는 삼나무를 심고 계단처럼 단을 쌓아서 차나무를 심었던 곳이다.

보성에서 차를 경작하는 가구수가 500여 가구라고 하는데 그중 심도 있게 생산하는 가구들은 130여호이고 대규모 경작을 하는 기업단위의 경작 공간은 6곳 정도이다.

그중 대한다원은 1939년 일제시대 이곳의 녹차 경작 가능성을 타진하고 재배 적격지로 알려진 것에 기초하여 1959년대 중반 장명섭(대한 다원 회장)에 의해 일궈지지 시작한 곳이다.

처음부터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녹차에 대한 수요조차 상상하기 힘든 시절이었지만 그 주인은 뜻하는 바가 있었다. 녹차를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소멸된 문화를 되살리는 것이 그의 지상과제였으리라.

그렇게 시작된 대한다원에서의 녹차 재배는 주변으로 이어졌고 후발 주자로 나서게 된 대기업 태평양은 남도의 해남과 강진, 제주 등에 대규모의 다원을 만들고 대대적인 녹차 홍보에 들어간다.

차 문화가 없어졌던 이 나라에 다시 차에 대한 관심이 시작된 것이다.
산사를 주변으로 해서 근근히 맥을 이어오던 차 문화가 처음에는 다소 고급스럽게 부활하여 우리 곁으로 한 걸음씩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나타나기 시작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티백이다. 봉지에 넣은 차를 의미하는 티백은 약간의 떨떠름한 녹차맛을 떨구기 위해 구수한 현미를 가미하여 만들어졌다. 그러면서 보다 더 가까이 우리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다원에는 녹차 시음장이 있다. 일인당 1000원을 주고 마실 수 있는 고유한 보성만의 차맛을 음미할 수 있다. 몇 년전까지만 해도 이곳의 차 값은 무료였다.

하지만 이 무료라는 것이 사람을 참 부담스럽게 만드는 애매함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정말 그냥 마셔도 되는 것인지. 혹 무엇인가를 사가야 하는 것 아닌지. 아님 댓가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지...

주인은 이런 손님들의 긴장을 풀어 주는 방법으로 시중 녹차값과는 비교되지 않을 가격을 정하고 심적 부담을 덜어 주고 있다.

다도에 주눅이 든 사람들이 있다. 물론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다도를 존중하긴 하지만 내 생활에 다도를 강요한다면 나는 녹차를 마시지 않을 극단적인 생각도 해 본적이 있다.

형식이 나를 통제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 다원에서도 녹차를 마시는 사람에게 다도를 강요하지 않는다. 나를 위해 마시는 것이므로 남에게 보이는 것에 메달려 자신을 잃고 맛을 잃어 버리는 것을 염려해서 이다.

다도를 존중하긴 하지만 다도가 나를 제어하는 것이 싫은 것이 이 집 주인과 내가 일치하는 부분이다.

차나무의 생애가 준 선물

보성만의 바람이 씩씩하게 불어오는 오전 한잔의 녹차로 몸을 녹이고 다원의 주변을 돌아 보았다. 차가운 날씨지만 족히 20m가 넘는 키의 삼나무가 바람을 막고 푸른 다원이 이곳 저곳으로 이어져 있다.

나보다 훨씬 나이를 더 먹었지만 내 키보다는 한참 아래인 차나무를 보면서 그들의 생애를 더듬어 보았다. 유순한 품성을 지닌 차나무는 뜨거움도 싫어하고 추위도 싫어하는 탓에 연 평균 기온이 13도 정도 되며 강수량이 많은 습한 곳에서 성장하는 나무이다. 번식은 대부분 종자에 의해 이뤄지며, 꽃은 10월부터 12월까지 하얗게 핀다.

뿌리는 곧장 아래로 뻗고 그 옆에 잔뿌리들이 형성되며, 뿌리가 2m 정도 땅속 깊이 내리기 때문에 옮겨 심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나무 스스로도 옮기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런 덕분에 옛적 차나무가 있는 곳에서 딸을 시집 보낼 때에는 친정 어머니가 마지막 날 주머니에 차의 씨앗을 세 개를 담아 주었다고 한다. 차나무처럼 그 집에 단단히 뿌리박고 살라는 의미였다.

름
▲삼나무 터널 사이의 신부 ⓒ 전고필
이런 차나무의 생애를 되새겨 보고 그 짙푸른 자태를 눈이 지치도록 바라보며 다시 삼나무의 길을 따라 내려오니 차나무 보다 더 눈부신 광경이 들어온다. 결혼을 눈앞에 둔 청춘 남녀가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다.

붉은 빛의 삼나무 등걸과 포장하지 않은 도로의 황토빛, 푸른 침엽수림 사이로 터널을 이룬 그 길 위에 하얀 드레스를 입은 예비신부가 서 있었다. 그 주변의 경관과 조화를 넘어서 하얀 드레스를 입은 도드라진 신부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여 아름다웠다.

광주에서 사진 촬영을 위해 이곳을 찾았다는 그들의 의지도 대단했지만 정말 이런 아름다움이라면 인공의 박물관이나 문예회관보다는 백번 잘 선택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뒤로 하고 다시 삼나무 길을 걸어 보니 다원의 모든 공간은 나도 모른 사이에 고요한 상념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어지러운 일상보다 더한 문제를 들고 왔던 이번 보성 차밭 여행은 그 길을 걷는 동안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조차 잊어 버릴 만큼 저절로 해탈로 이끌었던 것이다.

다시 차밭

▲붓재다원 전경 ⓒ 전고필
다원에는 겨울이 없었다. 겨울은 내 두터운 옷자락 속에 있을 뿐 나무랄데 없는 눈부신 초록앞에 겨울은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 다원을 나서는 순간 곧 겨울이 있었다. 살을 에이는 바람이 다원 밖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우리는 고스란히 그 겨울을 안고 또 다른 다원을 찾았다. 봇재라고 하는 곳에 있는 "봇재 다원"이다.

경사진 산비탈을 개간하여 차밭을 조성한 그곳에는 삼나무가 없고 전망대가 있었다. 전망대에 올라보니 보성만의 서정과 다원의 모습이 한눈에 조망된다. 하지만 마음이 훵하다. 날씨 탓일까? 아니면 일에 대한 중압감일까?

이유는 분명했다. 바로 겨울속의 다른 계절을 맛 볼 수 있는 대한다원을 먼저 갔기 때문이었다. 봇재다원은 겨울에 갈 다원이 아니었다. 겨울의 다원은 대한다원이다.

삼나무가 대신 막아주는 겨울 탓에 바람의 한기를 느끼지 못하는 대한 다원에 비해 봇재다원은 단일한 규모의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다원이지만 아쉽게도 남해 바다의 세찬 바람을 막아줄 그 어느 것도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여름의 다원이라는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런 세찬 바람속에서도 한 농부가 어깨에 무엇인가를 지고 있었다. 호기심속에 다가가 여쭤 보았다.
"무슨 일 하세요?"
"씨앗 뿌릴려고요."
"벌써 씨를 뿌리세요?"
"예 지금 심어 두는 것이 시기적으로 좋아요."
"그렇군요. 수고하세요."

그의 어깨에 걸린 망태를 보니 그 속에 차의 씨앗이 있었다. 언제가 친구녀석이 고소한 오동나무 열매라면서 나에게 구슬보다 적은 열매를 줘서 껍질을 벗기고 오도독 씹었다가 그 떨떠름함에 혀를 내두르며 실체를 밝히라고 했을 때 처음 접한 차 씨가 그곳에 있었다.

일반적인 농사가 4월에 시작되는 것에 비해 두 달이나 빨리 시작되는 농사란 생각과 어쩌면 그 농부의 망태속에 봇재다원의 봄이 시작되고 있고 보성의 봄이 시작되고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다음 행선지로 길을 나섰다.

덧붙이는 글 | 광주에서 가는 길

보성 터미널에서 30분 간격으로 차가 있다. 보성읍에서 18번 국도를 타고 회천(율포) 방향으로 7킬로 정도 가면 "대한 다업(주) 보성다원"이라는 간판이 있다.
행정 구역은 전남 보성군 보성읍 봉산리 129번지이고 전화번호는 061-852-2593번이다.
전망대가 있는 봇재 다원까지는 회천 방향으로 2킬로 정도 가면 된다.

덧붙이는 글 광주에서 가는 길

보성 터미널에서 30분 간격으로 차가 있다. 보성읍에서 18번 국도를 타고 회천(율포) 방향으로 7킬로 정도 가면 "대한 다업(주) 보성다원"이라는 간판이 있다.
행정 구역은 전남 보성군 보성읍 봉산리 129번지이고 전화번호는 061-852-2593번이다.
전망대가 있는 봇재 다원까지는 회천 방향으로 2킬로 정도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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