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가 새나간다, 나라가 고갈된다

[1주년기념 해외게릴라 리포트 1] 한국두뇌 해외유출 현장

등록 2001.01.12 10:49수정 2001.03.13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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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가 새 나가고 있다. 나라의 고급두뇌들이 미국 등 특정국가로 하염없이 흘러나가고 있는데도 한국은 이를 그냥 바라보고만 있다. 외국으로의 두뇌유출에 대해 조직적인 대응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다.

한국의 경우 두뇌들이 취업을 못하거나 좌절하는 것도 모두 개인의 문제이지, 이를 사회적 국가적 차원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국 미국에 유학이나 연구 목적 등으로 방문한 고급인력들의 상당수는 현지에서 고스란히 흡수되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 현지의 한국인 두뇌사회에서는 "한국은 너무 단기적인 경제성과, 즉 돈을 버는 데만 급급한 나머지 과학 기술 분야의 정책적인 투자와 운용에 실패하고 말았다"고 지적하고, "이제부터라도 경제라는 근시안적 지표에만 매달리지 말고 과학과 산업기술이라는 측면에서 인재를 확보 육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장기적인 국가목표를 세워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선진국들과의 '경쟁'은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진단이다.

<오마이뉴스>는 한국이 시간과 돈 들여 육성한 고급 두뇌들이 고스란히 흡수되는 미국의 현지실상을 알아봤다.



나라 인재 자원이 다 새는데도 "밖으로 나가야만 산다"니?

한국에서 서울대학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서 초창기 요원으로 일하던 중 장학금을 받아 지난 1969년에 유학차 도미한 정호(57) 씨는 보스턴의 터프트(TUFTS) 대학에서 기계공학 전공으로 석박사과정을 마친 한국의 전형적인 엘리트 재원이었다.

졸업 후 MIT공대의 링컨연구소에서 약 2년간 일한 그는 그후 미 에너지성 산하의 국립 알곤 연구소에서 25년간 일한 후 2년전에 은퇴했다. 그는 지난해부터 미국 내 첨단기술 기업을 대상으로 한 기술자문과 경영자문을 맡아 해 주는 자문회사인 마이텍사를 경영하고 있다. 미국은 육성자원 한푼 들이지 않고 이 '고급두뇌'를 약 30년 이상 활용한 셈이다.

그가 현재 버지니아주에 본부를 두고 미국 내 4개의 대도시와 50개 주에 지회를 가진 재미과학기술자 협회(KSEA)의 회장으로 있는 정호 박사이다. 재미과학기술자협회는 두뇌급 한인 과학기술자들과 행정부 관리들, 석박사과정에 있는 한국인 유학생 교포 2세 등이 대거 참여하고 있는 미국 내의 한국인 과학자들의 구심체이다.


한국인 최초의 시각장애인 박사인 강영우 씨는 80년대초 미국 명문대학인 피츠버그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한 후 한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대학강단에 설 생각으로 이리저리 대학을 수소문했지만 모교를 포함해 서울의 대학들에서는 한결 같이 이 '맹인' 박사를 외면했다.

그는 결국 '하는 수 없이' 미국의 노스이스턴일리노이 대학에 교수로 취업했고, 당시 특수교육 분야에서 명문대학인 한국의 대구대학교(전신 한국사회사업대학)에서 그를 받아주어 방학 때마다 출강하는 계절교수 생활을 하게 됨으로써 조국에 기여하겠다던 그의 꿈은 적당하게 만족하는 선에서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미국에서 교수로 채용되자 강박사의 모교대학측은 비로소 그에게 '돌아와 줄 것'을 제의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그 한국의 제1호 '맹인' 박사인 강영우 씨가 지금은 부시 행정부에서 유력한 교육차관보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비단 이들뿐만이 아니다. 미 항공우주국 나사(NASA) 등 유수 국책연구소와 대학 등에는 고국으로부터 '퇴짜'를 맞고 미국에서 자기 갈 길을 가고 있는 이들이 부지기수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미국 사회에서 '소중한' 두뇌로 인정받으며 자신들의 분야에서 권위자로 통하고 있다.

캘리포니아 패사디나에 있는 나사 JPL 연구소에만 하더라도 40~50명 가량의 한국인 고급 과학기술자들이 대부분 이런 경로로 미국의 우주개발 노력에 동원되고 있다. 미국 내에는 현재 최소한 수만 명에 이르는 한국인 고급두뇌들이 유출된 상태이다


한국, '브레인 드레인(Brain Drain)'의 사각지대, "가서 훌륭한 미국 시민이 되라"고?

한국의 두뇌들이 마구 방치되고 있다. 아니 조직적으로 유출되고 있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미국과 해외 각국들에서는 이를 브레인 드레인(brain drain), 즉 두뇌유출, 두뇌누수라고 말한다. 대학이나 대학원을 졸업했거나, 정호 박사처럼 한국에서 장학금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온 연구기관 종사자 등 한국인 두뇌들이 여지없이 미국의 '브레인 게인(Brain Gain)' 즉, 두뇌사냥 투망에 걸려들고 있다.

수십년 동안 국내에서 돈과 정성을 들여 육성된 고급 인재들이 고스란히 미국으로 넘어가는 가공할 인재 대탈주 현상이 한국 정부의 '공인' 아래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 96년, 김영삼 대통령은 방미 당시 로스엔젤레스와 뉴욕 등 현지교민들과의 리셉션에서 교민들에게 "훌륭한 미국인이 돼 주는 것이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김 전 대통령은 교포인력자원의 활용이라든지 '동포들이 조국을 잊어서는 안된다. 언젠가는 조국에 힘이 되어 조국을 살기좋은 나라로 만드는데 일조해 달라'는 당부 따위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한국의 본격적인 두뇌유출은 김영삼 정권 이전, 박정희 시대 전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박정권때는 그나마 해외에 있는 과학자나 인재들을 저돌적으로 데려와 국내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토록 하겠다는 의지라도 있었다. 수 차례에 걸쳐 실시된 경제계획 추진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상당수의 인재들을 되돌아오게 만들었고 이들은 자기 분야에서 나름대로 고국에 기여했다.

그러나 박정권 이후 20~3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은 심각한 브레인 드레인 현상에 거의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다.

미국에 와서 전공 분야의 선진기술을 배운 뒤 고국으로 돌아가 자기 분야에서 기여하기로 마음먹었던 고급 두뇌들은 대부분 현지에 남거나 귀국을 미루고 있다.

60~70년대만 해도 미국이나 외국으로 건너간 유학생들이나 과학자 등은 현지에서 박사학위 등을 마치면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인식했고, 미국 등 현지에 남아 직장을 잡는 것은 하나의 '보험' 정도로 간주했다.

그리고 설사 미국에 영주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항상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것이 '정상적'인 해외체류 두뇌들의 정서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국내에는 돌아가 봐야 자리도 없고 버티기도 힘들다는 인식이 팽배해지기 시작하면서 고국의 문턱은 이들에게는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강'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두뇌들을 수용할 여건도 여건이지만, 한국 정부와 국내 분위기가 해외 고급인력들의 귀국을 별로 반기지 않는 듯한 정책기조마저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권의 그 같은 대교민 선언은 해외교포들에게 '자기 길은 자기 알아서 가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게 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같은 두뇌의 해외'진출' 촉진정책은 김대중 정부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고급두뇌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이란 겨우 대학의 교수직이나 대기업 연구직종 등 제한 분야인데, 갈수록 문은 좁아지고 도무지 이들의 두뇌파워를 활용하겠다는 국가적 정책이 보이지 않고 있다. 한국사회가 현재 수용하고 있는 브레인들의 규모는 한 국가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기 위해 필요한 두뇌집단의 크기에 비해 터무니 없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한국, 미국과의 두뇌확보 전쟁에서 완패, '전쟁'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감지조차 못하는 상황

한국은 미국 정부와의 브레인 확보정책에서 철저하게 패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이 시간과 돈 들여 '만들어 놓은' 고급 브레인들을 보란 듯이 고스란히 흡수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에서 대학이나 대학원까지 나온 후 많은 달러를 써가며 석박사를 마친 고급두뇌들을 돈 한푼 들이지 않고 수확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벼를 가꾸는 쪽과 수확해 가는 쪽이 따로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한국 사회가 한국과 미국간에 이런 두뇌유출 '전쟁'이 있었는지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정부가 여전히 두뇌유출이 가져오는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 정부가 지금까지 취해온 관련 정책에서 잘 드러난다.

구속된 전미해군정보국 문관인 로버트 김 사건처럼 '그리 비밀스럽지 않은 비밀'을 공공연한 방식으로 한국 정부측에 넘겨 주었다가 미 국가기밀보호법 위반혐의로 사법처리되는 마당에, 한국측은 다 키운 인재들을 통째로 다 넘겨주면서도 아무런 조치나 대응을 취할 생각조차 않고 있는 것이다.

현재 석사 박사를 포함해 미국 내에서 유학 중인 외국 학생의 수는 49만1933명으로, 중국(5만1001명·전체의 10.4%) 일본(4만6406명·전체의 9.5%) 한국출신 유학생은 경제위기로 인해 작년(4만2890명)보다 8.6%가 줄어 3만9199명(전체의 8%)이었으나, 작년에 이어 여전히 세번째 규모이다. 한국 유학생들은 학부 1만6529명(42.2%), 대학원에 1만9109명(48.7%)이, 기타(영어 연수-교수 연수 등) 3561명이었다.

이들 중 거의 대다수는 한국으로 돌아가길 원하지만 국내에서는 이들을 수용해 줄 여건이나 환경이 되질 못하고 있다. 이들은 국내에서 시간강사나 전공과는 무관한 학원 영어강사 등으로 전전하거나 아니면 다른 일거리를 찾아야 하는 엄청난 국가적인 자원낭비가 계속되고 있다.

또 설사 자리가 보장된다 하더라도 해외에 장기체류해 온 이들로 봐서는 학연에다 지연, 집단 이기주의 등으로 상징되는 국내환경은 그리 매력적이지 못한 요인으로 각인되고 있다. 고국으로 돌아가봐야 제대로 배운 것을 써먹을지도 미지수이고 폐쇄적인 교수사회 등 국내의 고질적인 '텃세' 문화로 설자리가 변변치 않다는 것.


"두뇌 1인당 생산비 4억원" 미국과의 치열한 두뇌 확보전

미 카네기 재단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학을 나온 전문인 한 사람을 잃는 것을 비용으로 환산하면 약 30만달러(한화 3억7000만원)에 달한다. 한 사람의 두뇌를 만들어내기 위해 소요되는 교육비와 훈련비 등에 대체로 집 한 채 값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것에다 전문가 한 사람이 생산해내는 재화를 놓고 볼 때 조직적으로 두뇌유출을 당하는 것은 국가적 차원에서 볼 때는 엄청난 손실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또 고급두뇌란 공장에서 벽돌 찍어내듯 생산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기 때문에 각국은 두뇌확보를 놓고 갈수록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두뇌유출 문제는 비단 한국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두뇌유출의 대표적인 경우로 거론되는 캐나다와 미국간의 두뇌유출 논란은 캐나다측으로서는 상당한 골칫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캐나다 당국은 두뇌방출이 심각해지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이의 방지를 위한 갖가지 노력들을 기울이고 있다.

자국의 고급인력을 상당수 흡수하는 미국을 대상으로 미국 내 캐나다인 두뇌실태 조사를 하면서 자국 두뇌들의 방출방지 및 귀국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러시아의 경우 고급두뇌의 유출은 소련붕괴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한다. 러시아에 있어 소련붕괴를 전후한 지난 10여년 기간은 두뇌유출의 역사였다. 교육받은 계층이 소련을 속속 떠나 교육제도가 거의 붕괴될 지경에 처했고 연구소들은 연구인력이 부족해 아우성이었다.

러시아산 두뇌들은 주로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이스라엘과 미국 서유럽 등지로 이주했는데, 가장 전성기였던 지난 95년에는 한해에 11만명이 이 나라를 빠져나갔다. 이들은 6명에 1명꼴로 엔지니어나 연구자 등 고급두뇌였던 것으로 연구결과는 밝혔다. 이 기간중 러시아 내 연구인력의 수가 반으로 줄어든 것으로 러시아정부의 조사결과에서 드러났다.


중국 러시아 캐나다 인도 등 두뇌회귀 정책 효과

중국도 한때 심각한 두뇌유출을 경험했던 나라 중의 하나이다. 재능을 가진 젊은 두뇌층들이 대거 60~70년대를 거쳐 90년대까지 미국이라는 신천지를 찾아 엑소더스(대탈출)에 나섰고 이들은 현재 미국의 곳곳에서 첨단산업기업체와 연구소 등에서 재능을 발휘하고 있다. 인터넷 업계의 거인인 야후의 제리 양 회장도 이들 가운데 한 명이다.

그러나 유출된 고급두뇌 중 상당수는 이제 조국으로 돌아가 중국의 현대화에 앞장서고 있다. 이들을 다시 불러들일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이 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국 정부가 강한 의지를 가지고 저돌적으로 나서 이들에 대한 귀국을 장려했고 귀국하는 두뇌들에 대해 과감한 혜택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특히 최근 인터넷 시장 등 국가 경제규모의 폭발적 신장과 함께 젊은 재능꾼들에게는 자신의 꿈을 펼치기에 부족하지 않는 신천지로서 다가오고 있다. 현재 중국 내 닷 컴( .com) 기업의 대부분은 외국으로부터 돌아간 유학생들이 설립한 것이라는 통계도 있다. 중국은 두뇌확보를 통한 국가 경제 건설에 성공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 지적되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비단 중국뿐만이 아니다. 인도 또한 두뇌확보 전쟁에서 최근 과시적인 성과를 거둔 사례로 손꼽힌다. 한국과 비슷하게 지난 60년대부터 미국과 영국에 전문직 종사자들의 배출을 시작한 이래 인도는 국내의 가장 명석하고 우수한 인재들을 거의 대부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수십만명의 고급두뇌들이 서구로 새나가면서 과학자와 기술 엔지니어등 고급두뇌의 공백현상을 가져왔다. 이는 인도 정부가 졸업한 학생들에게 기회를 제공하지 못한 결과였다.

그러나 인도의 이 같은 망국적 증세는 최근 들어 서서히 변해가고 있다. 지난 1966년에 국영 전신공사가 더 넷(the Net)이라는 인디아 인터넷 혁명을 위한 조직을 설립한 이래 세계 각지에 나가 있던 하이텍 고급두뇌들이 인도로 차차 발걸음을 돌리고 있다. 실리콘밸리와 미국 각지에 퍼져 있는 인도 고급두뇌들 중 상당수는 인도에서 발견된 '기회의 금광'을 향해 돌아서고 있는 것이다.


"두뇌유출 문제의 구조적 차단 없이 국가 체질개선 불가능"

러시아나 캐나다 중국 등 강대국들이 미국 등 외국으로의 자국 두뇌유출과 결사적으로 맞서는 것은 고급 두뇌의 확보 없이는 뉴 글로벌 이코노미(신경제)라는 개방적 구도 아래 살아 남을 수 없다는 위기감에서 비롯되고 있다.

고급두뇌의 확보 없이 한 국가와 사회구성원들의 삶의 질 향상이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그 배경이다. 그저 '불황이니, 주식이니'하는 따위의 표피적인 경제지표에만 매달려서는, 국가경제 과학발전의 차원을 향상시키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정책집행하는 데 있어 불행히도 과학기술하고 경제분야를 제대로 아는 분들이 많지 않아요. 경제나 국가관리가 대개 정치판의 논리에 의해서 움직이고, 국회도 정파싸움에 의해 움직이다 보니 정책적인 차원으로 뒷받침될 만한 능력이 이제는 아무 것도 없어 보입니다. 한국에서 그걸 탈피하려면 파격적인 면에서 구조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새로운 물결이 일지 않고 이 상태로 가다가는 저는 한국의 장래는 부정적이라고 봅니다."
재미과학기술자협회 정호 회장의 말이다.

일부 극소수 기업을 제외하고서는 한국 정부나 대다수 기업들에서는 brain drain(두뇌유출)의 문제점과 brain gain(두뇌확보)의 필요성에 대해 거의 무감각한 상황이다. 국내 시장에서 이미 경쟁은 국내 기업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데도 두뇌경쟁은 아직도 국내 시장안에서 '도토리 키재기'식 차원에서 머물고 있다는 지적이다.

결국 미국 등 외부에 의한 두뇌유출에 대해 조직적인 대응의 필요성조차 여전히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나라의 고급두뇌들이 특정국가로 하염없이 흡수되고 있는데도 한국 사회는 이를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의 경우 두뇌들이 취업을 못하거나 좌절하는 것도 모두 개인의 문제이지, 이를 사회적 국가적 차원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국 일자리를 찾는 개인들의 입장에서는 '나라' 보다는 일자리를 제공해 주는 곳으로 갈 수밖에 없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지는 것이다.


'총성 없는 전쟁' 미국의 고급두뇌 확보 전략

미국에 있어서 두뇌확보는 하나의 총성 없는 전쟁과도 같은 개념이다. 이민을 받아들이는 이민법 자체도 우수인력을 차지하려는 '그물'의 하나이고 국가는 두뇌를 확보하고 개발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나라 전체가 흡사 두뇌라는 영양분을 빨아들이는 유연한 해면체와도 같은 구조이다. 일리노이대학(시카고 소재)에서 15년간 교수로 재직한 후 최근 노던일리노이대 전기공학과 학과장으로 일하고 있는 김규일 교수의 말이다.

"간단한 개념입니다. 미국은 외국인 학생도 미국 내에서 교육을 시켜서 일할 능력이 제대로 됐다고 판단이 되고 그 사람이 미국에서 직장을 가지게 되면 '그 사람은 이 나라사람이다'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는 한국과는 자세(attitude) 자체가 다른 것이지요."

미국에서는 인재들을 확보하기 위해 각종 국가의 법과 제도들을 치열하게 적용하고 있다. 외국인의 고용시 인재누수를 막기 위한 각종 법적 제도적 장치들이 면밀하게 연구 적용되고 있다. 이 같은 분위기는 비단 국가차원에서뿐만이 아니라 각 주별로 각 단위 조직체별로도 이루어진다. 그러니 '되는 집안'이 안될 수 없는 노릇이다.

커네티컷 주의 경우 주의회가 다른 주로 우수학생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일정 기준에 부합되는 학생들에 대해서 장학금을 주는 제도를 마련한 것은 그 한 예이다. 그 조건은 고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다른 주의 대학대신 이 주 안에 있는 대학으로 가면 된다는 것이다. 커네티컷 주는 알래스카주 다음으로 타주의 대학으로 진출하는 학생들의 비율이 높은 주라는 것이 이 법안의 입법 취지였다.

코넬대를 비롯한 각 유수 대학들도 교수나 연구진 등을 대상으로 근무환경이나 만족도 등을 수시로 점검하며 두뇌유출의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다. 무조건 들어갔다 하면 '감지덕지'하면서 '어떻게 하든' 붙어있어야 하는 한국의 폐쇄적인 대학 분위기는 찾을 수 없다. 미국대학들에서는 이런 환경임에도 조직간의 인적인 이동이 비일비재하다.


갈수록 냉담한 교포사회 "로버트 김과 같은 '꼴'이 되기 때문이겠죠..."

미국에서 스파이 혐의로 복역중인 로버트 김 사건은 두뇌 단속에 대한 미국 사회의 의지가 얼마나 단호한지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로버트 김 옥중인터뷰가 육성과 함께 오마이 뉴스에 나간 후 기자의 이메일에는 미국 내 교포들로부터 온 편지들이 답지해 있었다. 주로 한국 정부의 대응에 대해 울분을 토로하는 내용들이었다. 그 중 한 시민권자는 "누가 앞으로 한국에 애국하려 하겠느냐?"며 울분을 삭이질 못했다.

"(중략)... 이번 사건으로 인해 미국에 사는 저희들로서 아쉬운 것은 미국에 거주하시는 많은 시민권자들에게는 '더 이상 한국 정부에 대해, 애국에 대해 생각도 하지 말라'는 논리인데, 능력 있는 2세, 3세에게 더 이상 우리 조국 한국에 대해 가르칠 것이 없어졌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미국시민권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애국하다 불이익을 당하면 로버트 김과 같은 꼴(?)이 되기 때문이겠죠... (중략)"

과거 박정희 정권을 전후한 시절만 해도 재미교포 사회에서는 미국에서 큰 돈을 벌거나 현지에서 '성공'하면 조국에다 기여하겠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서였다. 그리고 이들 중 상당수가 실제로 조국의 발전에 기여한 측면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설사 현실적으로는 그런 기여에 참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조국을 위해 보람 있는 일을 해 보겠다는 마음을 품는 것은 '당연한' 자세였다. 그러나 해외교포사회의 그 같은 정서는 로버트 김 사건 등을 고비로 거의 위험 수준의 냉소적인 단계로 뒤바뀌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로버트 김 꼴 날려고"라는 자조와 함께...


박사학위 받고 한국 돌아가 피자가게 하는 것도 또 다른 두뇌유출

한국에서 1년에 어느 정도의 인력이 미국으로 유출되는지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다. 그러나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수가 거의 200만명에 육박한다는 자료로 볼 때 한해에 최소한 수천명에서 수만명의 인력누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외교통상부가 내놓은 2000년 '외교'백서에 따르면 1999년 한국을 떠난 이민자 중 초청이민 등 연고이주는 전체 이민자들의 26%에 머문 반면, 취업이나 사업이주는 62%에 달했다. 10년 전만 해도 취업투자 이주는 전체의 17%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나마 실제로 고급인력의 주 보급창이 되고 있는 해외유학생들에 대한 미국 등 현지에서의 흡수현황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어 실제 상태는 이보다 더 심각한 상황으로 보여진다.


한국인 해외이주 현황
연도---연고초청(비율)----취업. 투자 이주(비율)

1989---18,281명(70%)-----4347명(17%)
1990---불확실------------4622명(20%)
1996---5139명(40%)-------6637명(51%)
1997---5860명(46.9%)-----5556명(44.5%)
1998---6638명(47.5%)-----5984명(42.8%)
1999---3342명(26.4%)-----7849명(62%)
<자료: 외통부 2000년도 외교백서>


일전에 파리 솔본느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고급두뇌가 서울의 한 골목에서 피자가게를 차렸다는 소식이 국내언론에 전해진 적이 있었다. 이런 제2 제3의 <피자가게 박사>는 미국 등 현지에도 수두룩하다. 로스엔젤레스판 한국일보나 중앙일보 구직면을 보면 UCLA에서 석사나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지에서 교포자녀들을 대상으로 영어나 수학 과외를 가르치는 사람들의 전화번호가 널려 있다.

비단 미국에 '빼앗기는' 것만이 두뇌누수가 아니라 이처럼 개인이 가진 능력이 제대로 활용해 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사장되는 구조자체도 브레인 드레인 문제인 것이다.

두뇌유출은 또 고급두뇌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숙련된 컴퓨터 관련 엔지니어들의 상당수가 미국으로 흡수되고 있다. 이 분야에서 한국인 인력은 언어(영어)구사 문제로 인해 한국에서 직접 '수입'되는 경우는 인도 필리핀 등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는 적지만 미국에 공부나 기술연수 목적 등으로 방문한 인력들 중 상당수가 현지에서 흡수되고 있는 상황이다.


두뇌유출의 행렬의 끝은 어디인가?

문제는 두뇌유출이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 앞으로 더 심각해질 것이라는 데 있다. 유럽의 경우 향후 2년간 기술분야에서 약 170만명의 인력충원이 필요하며, 미국의 경우 내년 한해에 160만명을 확보해야 할 상황이라는 통계가 나와 있다.

이런 인력 부족을 메꾸기 위해 미국과 유럽 각국 정부는 이민 쿼터를 늘이는 한편, 고급인력에 대해서는 이민비자를 받는 것을 갈수록 쉽게 만들어가고 있다. 미의회는 2년전에 하이텍 비자로 불리는 H-1(전문직 취업비자)를 두 배로 늘렸고 올해부터 연차적으로 계속 늘여나간다는 방침이다.

전문직 취업 비자로 미국에 일단 도착한 사람이 미국에 영주권을 신청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다. 이들에게는 보수향상과 주식옵션 등 각종 인센티브라는 먹음직한 미국산 '미끼'들이 기다리고 있다.

두뇌유출이 심각한 이유는 무엇보다 한국이 두뇌유출의 문제성을 깨닫지 못하고 이를 방치하고 있다는 데 있다. 노던일리노이대 전기공학과 학과장 김규일 교수는 미국에서 교수생활을 한 지가 근 20년이 됐지만 자신은 일부러 시민권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가능성도 열어두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연어의 생리처럼 태어난 곳으로 '회귀'하겠다는 이들 한국산 '연어'들은 태생지가 '수질오염'됐다는 소식에 돌아갈 생각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재미과학기술자협회장 정호 박사는 "한국은 너무 단기적인 경제성과, 즉 돈을 버는 데만 급급한 나머지 과학 기술분야의 정책적인 투자와 운용에 실패하고 말았다"고 진단하고 "둘러가는 방법이란 있을 수 없고 이제부터라도 경제라는 근시안적 지표에만 매달리지 말고 과학과 산업기술이라는 측면에다 초점을 맞추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국가목표를 다시 추구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재들을 다 뺏기고 나서는 미국 등 선진국들과의 본질적인 '경쟁력'이 불가능하다"고 단정한다.

미국 현지의 재미교포 두뇌사회에서는 한국이 지금부터라도 인력수요를 '시장원리'에 맡겨둔다는 시장논리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국내 시장에서는 그것이 부합할지 모르지만 외국과의 경쟁에서 그런 방임은 일종의 '다 가져가라'는 식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미국 등 각국의 치열한 인재확보 노력이 잘 말해준다.

한국은 이제 눈앞에 보이는 경제지표에만 매달리는 미시경제 정책에서 탈피해 좀 우악스러워 보이긴 하지만 박정희식의 제2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같은 새로운 국가개발모델이 필요한 시점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의식의 전환이 요구되는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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