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복순이 대신 '하내'를 새식구로 맞았어요

복순이를 잊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털복숭이 강아지 한 마리를 가져다 주었다

등록 2001.02.26 09:00수정 2001.02.26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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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오늘 아침
하늘이 먼저 말문을 연다
입 다물고 있던 땅이
말 대신 풀잎을 틔어내고
목이 마른 강아지는
풀잎을 헤집고 뛰어다니고 있다
누구보다도 반가워하는
여덟 살 난 딸아이가
강아지와 풀잎을 번갈아 가며
열심히 다독거리며 이야기를 한다
"비 맛있게 먹고 무럭무럭 자라라"
어눌하지만 그 진실한 말 한마디에
풀들은 꼬리 살랑이며 발밑을 기어오르고
강아지는 제 키보다 더 높이 등을 치켜들고 있었다.


아이들은 새로 한 식구가 된 강아지 '하내'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하내라는 강아지 이름이 어째 좀 이상하죠? 그러나 그 이름은 그냥 둘러붙여진 것이 아니고 '하내'라고 이름 지어진 아픈 이유가 있답니다.

지난번에 '아들녀석의 복순이 사랑'이란 기사가 나간 적이 있습니다
몇 년을 함께 자란 강아지 '복순이'가 죽자 아들녀석이 복순이무덤을 만들고 친구들의 딱지를 홀겨서 무덤집에 쌓아놓았다는 내용이었죠.
요즘은 아이들이 복순이무덤을 들르는 횟수가 눈에 띄게 작아졌지만
아직도 담벼락 아래 따뜻한 집에서 복순이는 아들녀석이 모아준 딱지를 가지고 놀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일 이후 아이들을 보노라면 안쓰러움이 가슴 한 구석에 무거운 짐으로 쌓여가고 있더라구요. 고민고민하다 옆집 식육점 정씨 농장에서 조그만 강아지 한 마리를 얻어 왔습니다.

처음에 아이들은 털복숭이인 강아지를 애써 외면하더라구요.
아마도 복순이에 대한 깊은 정 때문에 그 자리에 다른 강아지를 채우기가 싫었던 모양이죠. 아이들에게 문전박대를 받고 있는 강아지가 다른 한편으로는 얼마나 불쌍하였던지요. 깨끗히 목욕을 시켜서 자르르 윤기나는 털을 아이들 볼에 부벼보기도 하고 애완견은 아니지만 이쁘게 악세사리를 달아주기도 하였지만 아이들은 그런 강아지가 이쁘다고 어루만져주거나 데리고 놀지도 않는 것입니다.

참 이상한 녀석들이네 그랴.
혼자 또 다른 고민에 빠져 강아지하고 아이들 눈치만 살살 보고 있었죠. 그러던 차에 평소에 가깝게 지내는 목사님이 들렸습니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끝에 '복순이무덤'과 새로 한 식구가 된 강아지의 설움(?)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아 그런데 목사님은 다르긴 다르더라구요. 종교인이라 그런지 아이들을 불러놓고 아이들의 응어리진 가슴을 한 올 한 올 풀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새침하게 앉아 있는 아이들의 눈을 참말로 글썽이는 눈빛으로 보더라구요. "음... 강아지 이름이 뭐야?"
"몰라요."
아이들은 심술이 났는지 영판 대답이 짧아집니다. 그런 아이들의 눈치는 아랑곳 않고 "근데 말야. 강아지 눈을 볼래? 찬찬히 들여다봐. 꼭 복순이 눈을 닮지 않았니?".
복순이란 이름 때문에 그때사 그 또랑또랑한 눈을 찬찬히 들여다봅니다
"비파 너. 복순이무덤에 요즘도 가니?"
"딱지 가져다 놓으면서 무슨 기도 같은 거 해 본 적 있어?"
"......"
"혹시 죽은 복순이가 다시 돌아와 주길 하나님께 기도해 보지 않았어?"
"내 말 잘들어봐라 잉? 목사님이 강아지 이름을 지어줄테니 한 번 불러 봐라. 이름은 '하내'라고 하면 어떻겠니?"

'하내'라 거참 강아지 이름치곤 이상키도 하여라. 아이들하고 나는 '하내'라는 이름에 의아해 하는 눈빛을 역력하게 드러내놓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내려줌'이란 말을 줄여서 하내라고 지어본 거야."
"아! 그럴싸한데?"
"아마 너희들이 복순이를 다시 볼려고 하는 이쁜 마음이 하나님에게 전달되었을 거야. 그래서 너희 아빠가 이 강아지를 가져 온 걸 거야. 그렇죠? 김선생님?"
목사님은 나를 곁눈으로 보고 한쪽 눈을 찡긋거린다.

"그럼 그럼 엊그제 꿈속에서 어떤 분이 그랬던 기억이 나네. 아참 그랬었지?"
그때서야 생각났다는 듯이 호들갑을 떨면서 강아지를 어루만지고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면서 장난을 쳐댔다. 그리고는 살짝 강아지를 녀석들에게 밀쳐 놓았다.

물론 아이들도 하나님이 내려줬다는 말은 믿지 않을 것이다.
뭐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없는 줄 알면서도 크리스마스 이브에 당연히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께 선물을 받아야 한다는 마음과 그 선물을 주신 분이 산타였으면 하는 마음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그러나 그때부터 아이들 눈에 생기가 도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하내야, 하내야."
생전 처음 부른 이름을 아주 정답게 부르면서 서로 강아지 다툼을 한다. 볼을 부비고, 입을 벌려 가지런한 이빨을 만져보고, 귀를 후벼보고 쭉 밀쳐 방에서 미끄럼을 태우기도 한다.
저렇게 좋아할 수가?

이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 목사님은 자뭇 의기양양해 하며 어깨를 들썩이지만 아이들의 조그만 마음 하나도 어루만지지 못하고 치료하지 못한 아빠의 어깨는 한없이 한없이 움츠려들 수밖에.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한 마당을 가지고 있는지라 아이들은 며칠을 방안에서만 강아지를 데리고 놀았다. 하나도 귀찮지 않다는 듯 즐거운 얼굴로 오줌똥 수발도 들어주고 있었다. 아! 저 지극정성이 아이들 아빠로서도 한껏 부러워지네 그랴.

봄비가 내린다.
겨울의 눅눅한 묵은 때를 벗겨내기라도 하듯 새록새록 어린비가 내리고 있다.

아이들은 하내를 데리고 도서관뜰로 마실을 나갔다. 비오는데 비 그치면 나가 놀지 하는 아빠의 걱정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돌아올 때가 지나도 아이들이 보이지 않자 우산을 받쳐들고 도서관뜰로 나가보았다. 하! 그런데 아이들은 하내와 열심히 무언가 말을 주고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도서관뜰을 자기네 안방인 것처럼 뛰어다니면서.

"풀들아, 하내야 비 맛있게 먹고 무럭무럭 자라라!"
그 진실하고 따뜻한 말 한 마디에 풀들은 머리를 치켜들고 발밑을 기어오르고 '하내'의 등은 한 뼘이나 높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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