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빨리빨리'가 아닌 여유를...

편리와 속도의 시대, 천천히 살 순 없을까?

등록 2001.05.29 10:10수정 2001.05.29 10:44
0
원고료로 응원
스코틀랜드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지식의 함축판으로서 넘볼 수 없는 철옹성으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세트 당 1500달러를 육박하는 이 사전도 50달러 정도에 불과한 CD롬에 따라잡히고 말았다. 이처럼 정보혁명 이후의 편리함과 신속함의 추구는 고색 창연한 전통까지도 순식간에 압도하곤 한다.

요즘 대학교 근처나 지하철에서는 대학생을 상대로 한 신용카드 회원가입 권유가 한창이다. 모두들 카드사용의 이유로 신속성과 편리성을 첫째 이유로 꼽는다. 이러한 카드의 미덕 이면에 내재한 자본의 의도는 물론 '소비의 가속화'일 것이다.

현금을 건네는 행위를 건너뛰고, 곧바로 지불로 환산되는 소비는 그 자체로 빛의 속도에 비견되는 유통속도를 창출하고 있으니 말이다. 한마디로 카드가 가져다준 '빠름'은 불필요하거나 망설이는 소비까지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의 마술일 뿐이다.

편리와 속도의 가치를 갖는 이 시대의 대표적 도구는 리모콘이라 하겠다. 쉼없이 채널을 변경하는 시청자의 눈과 귀를 붙잡기 위해 방송물은 자극을 극대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복잡한 과정도 서사도 없다. 단지, 시원한 속도에 압도되어 매사에 15분 이상을 집중하지 않는 신세대(사회학용어로 쿼터족이라고도 불리고 있다)의 성향과 함께 매체의 신속성과 압축성은 꾸준히 발전되어 왔다. 본질과 과정의 빈자리를 차지한 강렬한 이미지는 속도로 승부하고 속도로 먹고 살아가는 것이다.

하긴 우리가 한 사람을 대할 때(누구나 외모보다는 마음이 우선이라고 믿고 싶겠지만) 외양이 좋은 사람에게 더 큰 호감을 갖듯이, 무언가를 파악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에 대해 우리는 집단적인 콤플렉스를 가진 것일지도 모른다.

한편, 최근 '빨리빨리'에 대한 강박증에 저항이라도 하듯 '느림의 미학'에 대한 관심이 증폭하고 있다. 일본의 '다레팬더'와 '스노캣' 등 그저 누워 잠을 자거나 뒹구는 모습의 느림보 캐릭터가 한국 팬시업계의 최고 인기상품으로서 자리잡았다. 게다가 최근에는 느릿느릿하면서 능청스러운 '마시마로'라는 국산 플래쉬애니메이션 캐릭터가 등장하기도 했다.

또한, 느림과 여유에 대한 고찰을 보여주는 출판물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추세다. 어쩌면 이러한 현상도 일시적인 신드롬으로 재빨리 끝날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제껏 절대적인 미덕으로 추앙되던 '빠름'에 대해 되돌아볼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허무개그가 대중을 웃는 계층과 웃지 못하는 계층을 양분하게 된 가장 큰 요인 또한 누가 뭐래도 '속도'이다. 과거 호출기에 전화번호와 함께 8282를 찍어야 직성이 풀리던 우리였다. 이처럼 '빨리'는 지난 세월 우리를 이끌어 온 하나의 가치인 것이다.

이제는 좀 느리게 살아봐도 좋을 듯 하다. 잽싸게 행동하는 것도 좋고 후딱 일을 끝마치는 것도 물론 좋지만, 약간의 여유는 챙겨야겠단 말이다.

끝으로, 그동안 '그놈의' 속도에 짓눌려 살아온 우리들 자신에게 묻고 싶다. 옛날에는 부산에서 서울까지 쉬지 않고 걸으면 30일 이상이 걸렸다지만 이제는 자동차로 대략 6시간이면 족하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단축된 29일 18시간만큼의 여유를 얻었는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2. 2 깜짝 등장한 김성태 측근, '대북송금' 위증 논란 깜짝 등장한 김성태 측근, '대북송금' 위증 논란
  3. 3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4. 4 '명품백 불기소'에 '조국 딸 장학금' 끌어온 검찰 '명품백 불기소'에 '조국 딸 장학금' 끌어온 검찰
  5. 5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너무 겁이 없다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너무 겁이 없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