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서 한권에 담긴 조선의 출판문화

KBS 역사스페셜팀 방송 예정 <조선 고서의 비밀>

등록 2001.07.05 18:30수정 2001.07.06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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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97년 9월 24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었다.

"백제불교의 최초 전래지로 알려진 전남 영광의 불갑사에서 석가의 일대기를 기록한 月印釋譜(월인석보)와 경전, 불교 의식집 등 보물급 고서가 다량 발견됐다. 영광군과 불갑사는 지난 19일 사찰 입구 천왕문 안에 있는 사천왕상(지방유형문화재 159호)의 복장(腹藏:가슴 한복판)에서 조선 세조 때(1459년) 목판본으로 간행된 월인석보 2권(전체 25권중 21번째)과 수육무차평등 제의 섭요(水陸無遮平等 齊儀 攝要) 등 불교의식집, 십지경론(十地經論), 금강경(金剛經) 등 모두 50권의 고서가 발견됐다고 24일 밝혔다."


아마 서지학자들, 국문학자들은 이 기사를 보면서 적잖이 흥분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귀중한 고서가 무려 50권이나 일시에 발견되는 기쁜 소식인 것이다.

그러나 이 빛바랜 고서들, 그 속엔 어떤 보물이 숨어있길래 학자들은 그리 소중히 생각할까? 일반 대중들이 볼 때는 그저 고리타분하고, 냄새나고, 지저분한 옛날 책에 불과할 뿐인데...

세계적으로 우리나라만큼 고서가 많고 또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나라도 없다고 한다. 어쩌면 이같은 이유 때문에 우리의 고서가 평가절하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여기에 착안한 KBS 역사 스페셜팀은 너무도 흔해 그냥 지나쳐왔던 고서 한 권을 집중 조명하기로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책은 어디서 출판되었는지, 책의 제본은 어떻게 했는지, 인쇄는 어떠했는지 다양한 의문을 던져보고 특히 고서의 제본 상태가 어떠한지 알아보기 위해 고서를 철저히 분해하여 100% 재현해보기로 했다.

절은 민간 출판의 중심지였다


고서는 크게 관서와 민간 서적으로 구분된다. 관서야 물론 관청에서 출판했겠지만 도대체 민간 서적은 어디서 출판되었을까? 그 답은 조선 후기의 학자 박세당(朴世堂)의 저서인 서계집(西溪集)에서 찾아본다. 서계집을 보면 절에선 불경 외에 많은 민간서적을 찍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절이 찍어낸 판본수를 보면 경판수가 513, 민간서적으로 분류된 경사자집류가 150여판으로 나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통도사의 경우 종이를 만들 때 사용하는 기구인 구유를 구비하고 있었다. 절에서는 책을 만들기 위한 기구와 사람들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었으며, 불경 간행으로 축적된 노하우가 충분하기 때문에 민간서적 출판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 - 고서의 제본

조선시대의 책들은 꼭 다섯 군데만을 엮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 제본 상태를 좀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비교적 흔한 고서 한 권을 완전 해체시켰다. 겉장을 찢어내자 종이 뭉치가 두 군데 보였고 이것은 '지정'이라 하여 실 외에 책을 잡아주는 '종이못'이었다. 취재진은 실제로 실을 제거해 보았는데 책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 지정은 어떻게 박은 것일까? 책 두께만큼의 종이를 놓고 드릴로 뚫어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지정을 박은 원리만큼이나 취재진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것이 또 하나 있었다. 조선시대는 어떻게 네모 반듯하게 책을 재단할 수 있었을까? 실험 결과 한지를 손이나 작두로 자르면 네모 반듯하게 자를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직 모르고 있는 종이 공예의 비밀이 남아 있다는 건데 대체 뭘까?

실험을 거듭한 결과 취재진은 그 미스테리를 풀 수 있었다 한다.

자료의 보물창고, 책 표지를 주목하라

얼핏보면 그저 밋밋한 고서의 책표지였지만 그 안쪽 면에는 감춰진 또 다른 문양이 있었다.책표지 안쪽에 백지를 대고 연필로 문질러보니 이른바 '능화문(菱花紋:마름모 무늬)'이라고 불리는 화려한 문양이 드러난 것이다. 이 숨겨진 능화문 무늬는 왜 필요했을까? 능화문은 요철을 만들어 종이끼리 강력하게 접착이 되도록 해준 것이다.

책표지가 완성되면 치자물(노랑물을 들이는데 쓰는 식물, 한약으로도 쓰임)을 들이는데 이는 방충 역할을 한다고 한다. 또 치자물 위에 밀랍(꿀 찌꺼기를 끓여서 짜낸 것으로 절연제, 광택제, 방수제 등으로 쓰임)을 칠하는데 그것은 수분에 강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같은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표지가 만들어졌다는 것도 놀랍지만 취재진을 더욱 흥분케 한 것은 책표지 속에 감춰진 자료였다. 표지 안쪽에 스프레이로 물을 뿌리자 종이가 한 장씩 분리되었는데 이 종이들은 이면지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떨어져 나온 이면지는 동시대이거나 앞시대의 기록물로 추정되었는데 그 중에는 구하기 힘든 귀중한 자료도 있었다. 그야말로 자료의 보물창고인 것이다.

활자의 미학

고서의 한 줄 한 줄을 채워나갔던 활자는 단순히 내용만을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나름의 미학을 가진 하나의 예술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활자가 쓰여졌는데 목활자와 금속활자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목활자는 거친 대로 소박함이 묻어나고 금속활자는 정교함과 세련미를 자랑한다. 이렇듯 활자는 재료에 따라 느낌을 달리하였고 쓰는 이의 조예가 깃들어 인간적인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살아 있는 예술이다.

다양한 의문과 실험을 통해 밝혀지는 고서 한 권의 가치는 그 시대의 제본 기술과 유실된 자료, 활자의 미학과 더불어 삶의 해학까지 담겨 있었다. 결국 조선의 고서는 당시의 시대상과 사회상을 반영하는 '역사적인 유물'인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고서의 값어치를 거의 모르고 지내왔지만 이제 이 역사 스페셜팀의 귀중한 작업으로 인해 새롭게 눈을 뜰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주 토요일(7월 7일) 밤 8시 KBS 1TV에 채널을 맞춰보자.

덧붙이는 글 | 김기표 PD : 781-3555, 011-753-2054

덧붙이는 글 김기표 PD : 781-3555, 011-753-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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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으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글쓰기와 강연을 한다. 전 참교육학부모회 서울동북부지회장, 한겨레신문독자주주모임 서울공동대표, 서울동대문중랑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전통한복을 올바로 계승한 소량, 고품격의 생활한복을 생산판매하는 '솔아솔아푸르른솔아'의 대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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