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함께 살던 비단지네

삶이라는 심연

등록 2001.08.12 01:00수정 2001.08.12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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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지 않은 얼마 전 일이다. 취직 문제로 면접이 있어 서둘러 집을 나오다 팔 위쪽에 5센티미터쯤 되는 자상(刺傷)을 얻었다. 대문에 달린 우편함이 보여 바쁜 중에도 위로 젖혀 열게 되어 있는 문을 여니 우편물들이 주르르 쏟아지는 것이었다. 급히 몸을 숙여 우편물에 손을 뻗치는 순간 팔에 뭔가 베인 듯한 아린 기운이 흘렀다.


대문 앞 우편함 밑에는 아래층 할아버지가 심심풀이로 이것저것 모아다 불을 때곤 하는 드럼통이 있었다. 여기에 양철로 만든 커다란 집게가 거꾸로 처박혀 있었는데 그만 그 날에 긴 상처가 나버린 것이다. 양쪽으로 쫙 벌어진 상처를 확인하는 순간 아프다기보다는 쇼크를 받는 느낌이었다. 팔이 여러 번 부러진 적은 있으나 이렇게 길고 깊게 살이 패여 양쪽으로 벌어진 경우는 없었다.

정신없는 중에도 벌어진 데를 보니 그제서야 피가 모여들고 있는데 피부층 아래로 슬라이스 치즈 같은 지방층이 드러나 있고 그 아래로 다시 바알간 살이 저며 있고 또 그 아래로…. 희끄무레한 지방층이 보기 흉하다 싶자 이건 영낙없는 삼겹살 축소판이군, 하는 체념이 불쑥 솟아난다.

가까운 병원에 가서 꿰매야겠다는 생각이 천천히 들었다. 한 곳은 공사중이고 한 곳은 정형외과 의원인데 이곳에서도 살을 꿰매주나 하면서 들어가니 바로 치료실행이다. 의사가 들어오더니 두 말 없이 간호사에게 마취 준비를 하라고 한다. 예전에 누군가로부터 마취도 안 하고 바느질을 하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내심 걱정이 되던 차에 참 고맙다. 예쁘게 꿰매달라고 하자 의사가 나를 힐끗 쳐다보며 씩 웃고는 간호사에게 무슨 검은, 무슨 비단 같은 말을 하는 것 같다. 검은 비단실로 꿰매주겠다는 건가?

낚시바늘로 살을 툭툭 꿰어내는 느낌은 드는데 통증이 없다. 바느질처럼 한꺼번에 이어 꿰매는 게 아니고 한 땀 꿰매고 끊어내고 다시 한 땀 꿰매고 끊어내고 하는 식이다. 다 꿰매고 나서 보니 길게 베인 곳을 봉합해 놓은 실들이 꼭 지네 같다.

까만 비단지네로군. 왼쪽 팔에 까만 비단지네 한 마리를 붙이고 거즈로 싸서 보호를 하고는 병원을 나오자 이상스러운 느낌이 든다. 한 번도 안 와 본 곳에 왔는데 예전에 꼭 한 번 왔던 느낌 같기도 하고 어릴 적 학교에서 돌아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저물녘에 깨어난 느낌 같기도 하다.


새로 길 만드는 공사로 난리법석이 난 길을 따라 돌아오는데 이 소란은 뭐고 이 먼지들은 뭔가. 사람들은 다 어디를 바쁘게 가고 있고 나는 또 어디로 가려 하고 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 왼쪽 팔에 매달린 까만 비단지네가 떨어지지 않으려고 꼭 붙어 당기는지 새삼스럽게 다시 아리고 쓰린 기운이 퍼져 흘렀다.

그러면서 이상스럽게도 나는 이 친구가 오늘에서야 내 곁에 붙어살게 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몸 속 어딘가에 숨어 나와 함께 살다 벌어진 살갗 사이로 막 꼬물꼬물 기어 나온 것 같은 느낌…….


'이 친구의 존재를 모르면서 살아간다는 건 무섭고 징그러운 일이었는데 알고 보니 그렇지만도 않군. 이 새카맣고 귀엽게 생긴 비단지네를 데리고 봄날 나들이하듯 세상에 정을 붙여 봐야겠군. 어렵더라도.'

그날 나는 어딘가에 넋을 놓고 온 사람처럼 눈 스크린에 비치는 사람들을 무심히 바라보며 취직이라는 것을 해보겠노라고 지하철을 타고 철커덩철커덩 어딘가로 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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