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뉴스에는 독톡한 향기가 있다

<발트3국 이야기> 빌뉴스에 가보자 1

등록 2001.09.19 15:10수정 2001.09.21 13:53
0
원고료로 응원
이 도시에 가면 독특한 향기가 있다. 내가 이 도시를 지독히 사랑하거나, 아니면 그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이 도시에 대해서 무조건 극찬만 하는 그런 이성 없는 인간은 절대 아니지만, 이 도시에 가면 곳곳에서 뭔가 기분 나쁘지 않은 케케묵은 향기가 나는 것이 정말이다.

빌뉴스 모든 지역에 그런 향기가 난다고 하지는 않겠다. 그 향기의 정체를 알고 싶은 사람은 빌뉴스(Vilnius)에 가게 되면 꼭 들러봐야 할 빌뉴스 대학교에 들어가보면 된다.

과거 구소련지역에서는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손꼽혔고, 또 전체 유럽에서 보더라도 가장 오래된 대학 중에 하나인 이 빌뉴스대학교는 창립연도가 1579년, 그러니까 올해로 422년이 된다. 일단 구시가지 한가운데 있는 빌뉴스 대학교 본관건물과 그 건물에 딸린 교회, 천정화와 벽화가 유명한 대학서점 등에 들어가면 이 학교에 역사가 얼마나 되었는지 자연적으로 느낄 수 있다.

건물벽에 습기를 먹고 자란 이끼가 뿜어내는 뭔가 케케묵은 듯한 냄새가 바로 그것이다. 인문대학, 도서관, 그리고 비밀통로처럼 얽힌 복도들 여기저기에서도 그런 냄새가 난다. 유럽의 대학이란 교정이 특별히 있는 게 아니라 단과대학 별로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는 게 보통이고 리투아니아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 향기를 맡아보겠다고 지어진지 얼마 안되는 건물에 무작정 들어가면, 시큼한 페인트 냄새만 맡을 것은 당연하다. 구시가지 universiteto 거리에 있는 대학본관과 그 부속교회들을 찾아가보면 된다.

빌뉴스 곳곳에 들어서 있는 구교성당과 지붕이 금빛으로 반짝이는 러시아정교회들, 전부 소련 당시 보드카 창고로 쓰이고 무신론 박물관이 되고, 화랑이 되어 여러 번 구실이 바뀌었지만 다시 제구실로 돌아오기까지, 그 수백년간 묵은 이끼와 곰팡이들이 뿜어내는 역하지 않은 케케묵은 듯한 냄새 역시 사람들에게 이 도시의 역사를 묵묵히 말해주고 있다.

그 대학교 정문 바로 앞에 위치해 있는 리투아니아 공화국 대통령궁을 보면 알 듯, 이 도시 빌뉴스는 리투아니아 공화국의 수도이다.
빌뉴스가 리투아니아의 수도로 등장하게 되는 것은 역시, 지난 회에 이야기한 바 있는 사냥 좋아하시는 대공작님 덕분이다. 케르나볘에서 잠깐 수도를 트라카이로 옮긴 후, 다시 빌뉴스로 천도하게 된 이유를 리투아니아의 한 사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트라카이로 천도한 후 오래 지나지 않아서, 게디미나스는 트라카이에서 4마일 떨어진 곳으로 사냥을 나갔다. 커다란 들소를 만나 쫓아가다가 네리스 강변의 산자락에 이르게 되었다. 이미 트라카이로 돌아가기에는 지나치게 늦은 시간이라 네리스 강변 들판에서 머물러 하루밤을 노숙하게 되었다. 그는 꿈에서 한 산꼭대기에 철갑을 두른 늑대 한 마리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소리가 어찌나 큰지 그 속에 늑대 백마리가 들어있는 것 같았다. 그 늑대를 활로 쏘아 죽이려 했지만, 그 활들은 전부 그 철갑에 맞아 다시 튕겨나올 뿐이었다. 게디미나스는 잠이 깬 후 트라카이에 돌아가 가장 유능한 점장이에 그 꿈 해몽을 부탁하였다. 그 점장이는 그 꿈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후 이렇게 말했다.

"대공작이시여, 그 철갑을 두른 늑대는 그 곳에 이 나라의 수도가 생길 것이라는 의미이고, 그 늑대의 소리가 백 마리 늑대 같았다는 것은 그 도시의 명성이 전세계에 퍼질 것이라는 뜻이옵니다." 게디미나스는 그 후 사람들을 보내어 그곳에 도시를 짓게 하고 그 도시 이름을 빌뉴스라 명하였다.


내 추측이지만, 그 점장이의 점괘를 들은 게디미나스가 이런 말을 내뱉지 않았을까?
"뭬이야?"

이 게디미나스의 이야기는, 빌뉴스의 한가운데 대성당 광장에 서 있는 게디미나스 동상에 가면 다시 상기해 보게 될 것이다. 그 동상 근처 어디에도 이런 전설과 관련된 설명이 없기 때문에 처음 보는 사람은, 그 이순신 닮은 사람이 무엇을 한 사람이기에 그 자리에 서있나 의아해 하기 마련이다. 가운데 서있는 사람은 게디미나스이고 그 옆으로 게디미나스의 말이 서있고, 그리고 그 밑으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울부짖고 있는 늑대 한 마리가 있다.

위에 기록한 사기의 내용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동상의 내용이 무엇인지 짐작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 동상을 받치고 있는 사면에는 리투아니아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여러 공작들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대성당 뒷편으로는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산이라 부르기 마지않는 한 언덕이 있고 거기에 그 게디미나스가 지은 성터가 남아있다.

그 성터 위 노랑, 초록, 빨강의 리투아니아 삼색기가 펄럭이고 있는 전망대에 올라가면, 빌뉴스의 붉은 지붕들이 만들어내는 구시가지의 모습이 아주 아름답다. 그리고 그 광장에서 국회 쪽으로 이어지는 빌뉴스에서 가장 큰 길의 이름은 바로 '게디미나스 대로'이다. 구시가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그런 역사적 사실들을 다분히 담고 있는 '철갑늑대(Gelezinis Vilkas)'라는 나이트클럽이 있다. 꼭 가볼 필요는 없다.

왜 하필 이 도시는 이름이 빌뉴스가 되었을까? 질문이 생기면 참지 못하고 물어보아야하는 어린왕자처럼 이 필자도 물어물어 그 이유를 찾아본 결과 그 전설의 주인공인 늑대는 위에 소개한 나이트클럽 이름에서 보듯, 리투아니아어로 Vilkas(빌카스)라고 불린다. 빌뉴스와 빌카스 두 소리의 연관성을 살펴보면 아무래도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자리에 수도를 천도할 것을 일러준 그 늑대의 명칭을 따서 수도이름을 정했다는 것이 일반정설이 아닌 야사에 내려오는 내용이고, 케르나볘처럼 주변을 흐르는 강의 이름을 따서 도시명을 정했다고 하는 게 정설의 내용이다.

그러나 빌뉴스를 흐르는 강은 네리스(Neris)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빌뉴스라는 소리와 아무리 연관성을 찾아보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일부러 찾아보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연관성이란 없다. 그 네리스 강의 한 지류 중 리투아니아어로 빌리아(Vilia)강이라는 것이 있고, 폴란드어를 비롯한 슬라브어에서는 그 네리스강이 그 지류의 명칭인 빌리아강이라고 불린다. 그 빌리아 강변에 위치한 도시이므로, 그 강의 이름을 따서 빌뉴스가 되었다는 것을 거의 100% 정설도 하고 있다. 빌뉴스에는 '빌리아 강변(Znad Wilii)'이라는 폴란드어 라디오 방송국이 활동하고 있다.

폴란드에서는 이 도시를 '빌르노(Wilno)'라고 부른다. 중세시대에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한 연합국으로 존재한 적이 있었던 만큼, 폴란드와의 연관은 아주 깊고, 폴란드쪽에서 나오는 리투아니아에 관한 정보도 아주 많다. 리투아니아에 대해 접할 수 있는 정보 중 많은 수가 폴란드에서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책에서 리투아니아에 관한 정보를 '퍼온' 책들인 경우 빌뉴스 대신 '빌르노'라는 이름이 쓰여있을 수가 있고, 유럽에서도 w가 미국에서처럼 소리가 난다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은 '윌노'라는 지구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도시이름으로 기록하는 경우도 있다.

'빌르노'건, '윌노'건 '빌노'건 그 단어가 나오는 책의 문맥상 리투아니아에 관한 것이면 전부 빌뉴스로 이해하면 되고, 그 단어를 이용한 사람은 백이면 백, 다 폴란드어나 폴란드어에서 번역된 책을 보았다고 하면 틀림없다.

덧붙이는 글 | 발트3국에 대한 필자의 정보방 :http://my.netian.com/~perkunas

덧붙이는 글 발트3국에 대한 필자의 정보방 :http://my.netian.com/~perkunas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고장난 우산 버리는 방법 아시나요?
  2. 2 마을회관에 나타난 뱀, 그때 들어온 집배원이 한 의외의 대처
  3. 3 삼성 유튜브에 올라온 화제의 영상... 한국은 큰일 났다
  4. 4 세계에서 벌어지는 기현상들... 서울도 예외 아니다
  5. 5 "청산가리 6200배 독극물""한화진 환경부장관은 확신범"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