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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9일 오전 청와대에서 여야 총재회담(영수회담)을 열고, 미국의 반테러전쟁에 초당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여·야·정 정책협의회'를 적극 가동키로 하는 등 5개 항에 합의했다는 기사를 <한겨레 신문>에서 읽었다.
9개월만에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총재가 악수를 하는 장면은 일단 보기에 좋았다. 나는 적이 반갑기도 해서 신문의 그 사진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그런 보기 좋은 장면에도 불구하고, 내 뇌리에는 오래 전부터 지니고 있는 이회창 총재에 대한 의문 하나가 또 한번 슬며시 머리를 쳐들었다.
이회창 총재는 소년 시절 그의 아버지로부터 과연 어떤 교육을 받고 자랐을까?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라와 민족과 관련해서, 그리고 현세적 욕망들과 관련해서 어떤 가치관을 아버지로부터 주입 받으며 자랐을까?
솔직히 말해 나는 이회창 총재에 대한 이런 의문을 꽤 오래 전부터 지녀왔다. 1997년 그의 두 아들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병역의무를 치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조금은 엉뚱하게 그런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는 과연 어떤 식으로 자기 자식들을 가르칠까?하는 의문도 들었으나(어찌 보면 그것에만 내 의문이 집중되어야 옳을 터인데도), 나는 이상하게도 그 의문보다 그는 과연 아버지로부터 어떤 교육을 받고 자랐을까라는 쪽으로, 말하자면 의문이 벌불져버린 것이었다.
그러다가 최근 이회창 총재의 부친 이홍규 옹의 친일 행적을 좀더 확실하게 알게 되면서 나의 그 의문은 더욱 증폭이 되고 말았다. 이 총재의 부친은 일제 때 검찰 서기로 일했다고 한다. 1930년 일제 검찰계에 투신한 이후 최말단에서 고속 승진을 한 대표적인 조선인이라는 것이다.
"조선인으로서 이 씨가 고속 승진을 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조선인 핍박 및 독립운동가 체포와 같은 친일 매국 행적을 했거나 그 공로로 일제로부터 훈장이나 포장을 받았을 수도 있다. 당시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 악명 높았던 대상이 조선인 일제 검찰 서기였음을 감안한다면 고속 승진을 한 이 씨가 어떤 짓을 자행했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은가."
이 말은 월간 '말'지 9월호에서 읽은 경기도의원 김용운 씨 증언의 한 대목이다. 그는 일제 검찰 서기 이홍규 씨에 대한 많은 자료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회창 총재는 일제의 한창 시절이었던 1933년에 태어났다. 서슬 퍼런 일제 검찰 서기를 아버지로 하고, 유복한 가정에서 처음부터 목에 힘을 주며 성장할 수 있었다. 일제 검찰 서기를 거쳐 해방 후에는 손쉽게 검사가 된 분의 아들이었기에,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속설의 한 켠을 사실로 입증하듯, 이회창 총재는 좀더 수월하게 법조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거기까지는 굳이 시비할 일이 아니다. 현실 감각이 뛰어난 유능한 검찰 관리를 아버지로 하고 태어난 그 유복한 팔자를 시비한다면 자칫 유치한 시기심이 될 수도 있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일제 검찰 서기였던 아버지로부터 이 총재가 받았던 교육의 내용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나는 그것이 궁금하기 그지없다.
자식을 가르치지 않는 아버지란 없다. 웬만한 집이라면 가정교육, 밥상머리교육이란 게 있다. 하루 생활에서 아버지와 자식이 눈 한번 맞추지 못하는 집들도 많고, 자식을 가르치지 못하는 아버지들이 너무 많은 것이 우리 사회의 큰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런 비정상적인 경우까지 포함하여 아버지는 어떤 형식이 되었든 자신의 삶 자체로 자식들을 가르치게 마련이다. 좋게든, 나쁘게든….
나는 이회창 총재가 품위를 지닌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만큼 거기에 부합할 정도의 좋은 가정교육을 받고 자랐을 것으로 믿는다. 아버지로부터 일본인에 버금갈 정도의 날씬한 '귀족정신'도 주도 면밀하게 주입 받았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조선인으로서의 애국애족의 정신을 아버지로부터 배웠을 것 같지는 않다. 따라서 애국애족과 연관하는 '정의감'의 기초 역시 그리 튼튼할 것 같지 않다.
물론 이것은 이 총재의 부친이 일제 검찰 서기였다는 그 신빙성에 근거하는 하나의 추측일 뿐이지 내가 자의적으로 단언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이런 추측을 스스로 부정할 수 없다. 나로 하여금 그것을 부인케 하는 근거들이 현실적으로 너무도 박약하다.
지존하고 지엄한 이 총재에게 (또 그의 부친에게) 소졸하고 꾀죄죄하기 그지없는 나 같은 서민을 (또 내 아버지를) 비교하는 것은 참으로 어색하고도 죄송스러운 일이지만, 조금은 재미도 있을 것 같다.
일제의 첩첩산중 시절이었던 1920년에 태어난 나의 아버지는 일제에 고분고분 순응하며 살아온 무지렁이 백성이었다. 저 만주 벌판으로 가서 독립군에 가담한다는 건 감히 생각도 못하고 사신 심약한 분이었다.
조실부모하고 보통학교를 3년 중퇴한 처지임에도 뒤넘스럽게 고시공부를 한다고 퇴침만한 육법전서를 구입해서 공부를 하다가 밤마다 형수님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석유 닳는다고 등잔불을 끄고 하는 통에 그만 공부를 포기하고만 참으로 불우한 분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청년 시절이 너무 초라하다고 생각했다. 극적인 일이 하나도 없는 것이 늘 불만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어머니로부터 아버지의 청년 시절의 극적인 일화 하나를 듣게 되었다. 결혼을 한 이듬해 아버지는 신혼살이의 단꿈이 채 깨기도 전에 일제의 징용에 걸려들고 말았다. 꽃 같은 신부를 남겨두고 징용을 가는 아버지는 울면서 열차에 올랐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부산에서 친구 한 명과 함께 야밤에 탈출을 감행한다. 그리고 산길로만 걷고 걸어 신부가 있는 전주에 도착한 다음 고향인 충청도 태안으로 가지 않고 경기도 능곡, 깊은 골짜기 속으로 몸을 숨긴다.
그것이 일제에 대한 내 아버지의 유일한 '저항'이었다. 진짜로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서 징용의 행렬에서 탈출을 한 것인지, 신혼의 단맛을 반추케 하는 신부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탈출을 한 것인지는 내가 알 수 없되, 아버지는 일본 땅에까지 끌려가지 않고 부산에서 탈출을 감행하고 성공을 한 것이었다.
청년 시절에 그 사실을 안 나는 적잖이 흥분했다. 그런 용기가 있었던 아버지를 달리 보기 시작했다. 그 길로 아예 만주로 가서 독립군에 가담했더라면 더 좋았을 걸 생각하면 아쉬움이 크지만, 아버지가 그러셨다면 나는 이 세상 고해(苦海)를 구경도 못했을 테니, 그걸 생각하면 이상한 아쉬움과 다행스러움이 교차하기도 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내게 당신이 직접 자신의 그 '징용 탈출'을 자랑하지는 않으셨지만, 밥상머리에서 일제를 규탄하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더불어 내게 애국애족의 정신을 주입시키려고 애를 쓰셨다. 나는 그것을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내게 가난을 물려주신 아버지를 내가 존경할 수 있는 또 한가지 이유다.
이회창 총재의 부친이 친일파(이 친일파라는 지칭에는 반론이 있을 수 있겠지만)였다는 것을 알게 된 오늘 나는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의문을 갖는다. 일제의 강제 징용자 대열에서 탈출을 감행한 내 아버지가 만약 이 총재의 아버지 이홍규 검찰 서기가 있는 그 관할 지역에서 경찰이나 검찰에 붙잡히게 되었다면, 그리하여 이홍규 검찰 서기로부터 조사를 받는 처지가 되었다면 내 아버지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또 한가지 재미있는(?) 의문 한 가지. 이회창 총재의 아버지 이홍규 옹이 일제 시대 검찰 서기였다는 사실과 이 총재의 두 아들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병역의무를 치르지 않은 사실에는 아무런 상관성이 없을까? 그 사실들 사이에서 함수관계의 어떤 법칙 같은 것이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다시 최초이자 최종적인 나의 의문. 이회창 총재는 소년 시절 일제 검찰 서기였던 아버지로부터 과연 어떤 교육을 받으며 자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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