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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은 장장 4시간이나 걸렸습니다. 그리고 회복실에서 1시간.
그 다섯 시간은 내게 또 한번 가장 초조하고도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줄곧 묵주를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간간이 기도를 하기도 했지만, 온전히 기도에 열중할 수는 없었습니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기도 어려웠습니다. 수없이 일어났다 앉았다, 수술실 앞을 오락가락하며 수술실 문 앞 한쪽 벽에 부착되어 있는 상황판에 나도 모르게 눈을 주곤 했습니다. 그 아크릴 상황판에는 환자들의 이름 옆에 '수술중'이라는 말과 '회복중'이라는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자꾸 그것을 보게 되는 것은 어서 빨리 어머니의 이름자 옆에, '회복중'이라는 글자 옆의 빈칸에 동그라미가 그려지게 되기를 갈원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수술은 아무 차질 없이 잘 마무리될까? 어머니는 마취에서 별 탈없이 깨어날까? 나는 78세이신 어머니가 정말 아무 문제없이 마취에서 잘 깨어날지가 가장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친지 한 분으로부터 자기네 친정 백부의 예를 들었던 것이 내게 계속 이상한 중압감을 주고 있었습니다. 역시 대장암 수술을 받은 그 노인이 수술은 잘 되었는데, 그리고 마취에서도 깨어나긴 했지만 실성한 상태가 되었다는 말…. 아무도 못 알아보고,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상태로 몇 년을 사셨는데, 그런 큰아버지를 볼 때마다 너무도 속상했다는 말….
그 말이 자꾸만 내 귓가에 맴돌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노인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만 같아서 나는 절로 한숨이 나오곤 했습니다.
어머니가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시거나, 깨어나시긴 했어도 그 노인과 똑같은 상태가 된다면…? 그 만일의 경우를 상상하는 것 자체가 불길한 일일 것만 같았고, 절로 맥이 풀리는 노릇이었습니다.
내 어머니는 절대 그러실 리 없어. 그런 불행까지 겪으실 수는 없어. 나는 혼자 도리질을 하기도 했고, 묵주를 쥔 손에 꼬옥 힘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나는 초조했습니다. 어머니가 과거에 세 번이나 수술을 했던 그 전력이 자꾸만 떠오르고 나를 더욱 심란케 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수술 전력을 떠올리는 것은 나의 '과오'를 반추하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그 10년 전후의 수술 전력들이 오늘의 수술에, 도합 4번째가 되는 마취에 혹 나쁜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닐지 심히 염려스러웠고, 계속적으로 회오의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88년 2월이었습니다.
당시 65세셨던 어머니는 '자궁 적출'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자궁 적출 수술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성들에게는 흔한 일이라더군요. 여자가 폐경기가 지나면서 자궁이 밑으로 처져 생활에 불편을 주게 되므로 아예 그 필요 없는 자궁을 제거하는 것….
나는 그때 야릇한 감상에 젖기도 했습니다. 우리 7남매가 잉태되고 아기로 자라났던 어머니의 그 자궁이 어머니의 몸 안에서 없어지게 된다는 것이 정말 이상한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어머니의 몸 안에서 자궁―아기보가 사라진다 해도 조물주로부터 부여받은 어머니의 모성은 한 치도 변함이 없을 테지만….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어느 병원으로 가야 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주변에서는 자궁 적출 수술도 큰 수술이니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막냇동생이 대전에서 살림을 할 때도 아니고, 안양에서 사시는 누님은 그때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로 생활이 순탄하지 못한 상황이었고…큰 병원의 입원 경험이나 간병 경험이 없던 나로서는 어떤 병원으로 가야 할지 망설이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흙빛문학회의 회원 중에 외과의원의 사무장으로 일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내 사정을 듣더니 어렵게 먼 큰 병원으로 갈 것 없이 자기네 병원에서 수술을 하라고 권유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동네 의원치고는 꽤 큰 규모였습니다. X레이 장비와 수술실도 갖추고…. 원장은 서울대학병원의 일반외과 과장으로 오래 일한 경력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수술 실력만큼은 널리 인정받고 있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자궁 적출 수술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에, 그리고 원장이 자궁 적출 수술을 많이 해 본 분이라는 말에 나는 결심을 하고 말았습니다.
집에 와서 어머니께 말씀 드리니 어머니는 미심쩍은 기색이면서도 내 형편을 생각해서인지 반대를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불운한 내 어머니의 최초의 수술이었습니다. 마취에서 깨어 수술실 밖으로 나온 어머니를 입원실로 옮겨 뉘어 드리는 것으로 나는 큰 고비를 넘긴 것으로 알았습니다.
사촌 형님 한 분이 오셔서 수고했다며 원장과 사무장을 좋은 음식점으로 모시고 가서 저녁을 대접했는데, 나도 기분 좋게 포식을 하고 원장과 함께 병원으로 돌아와 보니, 어머니의 소변줄에서 오줌이 흘러내리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원장의 안색이 변했고, 곧 비상이 걸린 상황이었습니다. 원장은 타지에서 개업을 하고 있는 동창 친구들을 불렀습니다. 산부인과 전문의와 비뇨기과 전문의가 자기 병원의 일을 마친 후 먼길을 달려왔습니다. 당진 성모병원의 마취사도 다시 왔습니다. 그리고 그 한밤중에 수없이 X레이 촬영을 하고 사진을 보며 숙의를 거듭하더니 그들은 재수술을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밤 1시부터 새벽 5시까지 재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가슴을 치며 나의 못난 처신을 후회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잘못될 것만 같고, 내 평생의 한이 될 것만 같았습니다. 입속으로 수없이 하느님을, 성모님을 뇌었습니다. 수술실 문 앞에서, 그리고 밖에 나가 하늘의 별을 우러르며 수없이 기도를 하였습니다.
내 평생 동안 그때처럼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때처럼 하느님께 매달려 본 적은 없었습니다. 급기야는 스스로 하느님께 한가지 약속―맹세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느님, 제 어머니를 살려만 주신다면 제가 앞으로 이 세상을 살면서 '이것'만은 꼭 지키기로 주님께 맹세하겠습니다, 꼭 이 맹세를 지키겠습니다, 하고….
다행히 어머니는 목숨이 붙은 채로 수술실을 나왔고, 마취에서도 무사히 깨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날부터 어머니가 치른 그 고통을 내가 어찌 만분지일이라도 알 수 있을까요. 수술 초기의 그 통증은 말할 것도 없고, 장장 두 달 동안이나 병원 생활을 해야 했으니….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병상에서 고생을 하고, 나는 나대로 간병 고생을 하며 돈은 돈대로 몇 곱을 썼지요. 수혈을 한 모든 피값을 내가 부담했고, 모든 약을 약국에서 직접 사다가 댔으니까요.
주변에서는 말들이 많았습니다. 일종의 의료 사고라는 거였지요. 손해 배상을 청구하지 않는 것만도 감지덕지할 일인데, 모든 혈액 값과 약값을 환자 부담으로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고분고분하게만 처신하는 나를 타박하고 충동하는 말들도 없지 않았지요.
그러나 우선은 어머니가 고개를 저었습니다. 원장님과 병원 사람들의 고생을 몰라주어서는 안 된다며…. 그들의 실수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결국은 자신을 살려낸 것이 아니겠느냐며….
그리고 어머니는 퇴원을 하루 앞두고서는 원장 부부와 사무장 부부를 안흥의 횟집으로 모시고 가서 저녁 대접을 하라고 내게 부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미 약값 지출이 200만원을 넘었지만, 어머니의 부탁을 기꺼이 받아들여 별도로 생선회 값을 지출해야 했지요.
어머니는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드디어 퇴원을 하셨지만, 그것으로 모든 상황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줌이 무시로, 시나브로 흘렀습니다. 오줌이 방광과 요도를 통해서만 배출되는 것이 아닌 까닭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기저귀를 차고 살았고, 변기에 앉아 소변을 볼 때는 방광 부위를 이쪽저쪽 번갈아 누르기도 하고, 양쪽 엉덩이를 번갈아 들기도 해야 했습니다.
해가 바뀌면서부터는 배뇨를 해도 시원하지 않고 늘 잔뇨감이며 방광 부위의 이상한 통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방광 부위의 통증을 느낄 때면 온몸에 한축이 드는 현상도 겪어야 했습니다.
1992년 가을, 어머니는 마침내 천안 순천향대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정밀 검사를 받은 결과 방광 안에 돌이 들어 있고, 방광의 밑부분에 작은 구멍이 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방광의 어딘가에 작은 구멍이 나 있으리라는 것은 우리 가족 모두 짐작을 하고 있었고, 그 문제를 해결할 마음으로 어머니를 입원시킨 것인데, 방광 안에 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예상치 않은 진단이었습니다.
천안 순천향병원 비뇨기과 과장 신(성만 기억하고 이름은 잊었음. 지금은 순천향병원에 계시지 않음) 교수님은 방광 안의 돌을 꺼내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요도와 연결되는 부위의 작은 구멍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가 고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방광에서 나온 돌은 자그마치 계란 만한 크기였습니다. 타원형으로 생겼지만 표면은 결코 매끄럽지 않은 물체였습니다.
유리병에 담긴 그 물체를 보는 순간 나는 결코 내가 효자일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였습니다. 표면이 거칠거칠한 그 타원형의 물체가 어머니의 방광 안에서 계속적으로 자라며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고 한 것이었습니다. 아아, 내가 참으로 불효자라는 숨길 수 없는 사실이 그대로 명명백백하게 증명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나는 그때의 한량없는 부끄러움과 자책감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그런 마음 때문에 더더욱 다시는 어머니가 병원에 가시는 일이 없기를 바라고 빌어왔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결국 9년만에 또다시 이번에는 대장암으로 수술대 위에 눕게 된 것이고, 도합 네 번째 그 표현할 길 없는 육신의 아픔을 겪게 된 것입니다.
나는 경기도 안산에서 사는 누이동생이 12시경 병원에 와줄 때까지 수술실 앞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수술실에서 혹 보호자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화장실에도 가지 못하며….
그 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내가 그날 밤 동생 집에서 여러 가족들에게 보낸 열 여섯 번째 메일의 일부 내용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제 목 어머니 수술 상황 양호
보낸 일자 2001년 9월 25일 화요일 오후 11시 41분 34초 GMT+0900
†. 사랑·평화 (오소서, 성령님. 새로 나게 하소서)
∼모두에게
어머니 간병을 새롬엄마에게 맡기고 밤 10시경 막내네 집에 와서 이 편지를 쓰네. 호스를 타고 눈금이 적힌 플라스틱 병에 담겨지는 어머니의 소변량을 매시간 기록해야 하고, 그 병의 소변을 수시로 비워야 하고, 그리고 코에 박힌 호스에서 가래가 녹은 물을 수시로 빼주면서 고통을 겪는 어머니의 몸을 추슬러 드려야 하는 등 밤샘 간병이 몹시 힘들 텐데 새롬엄마 혼자서 잘해 낼지 모르겠네. 평소 잠이 많은 사람이 오늘밤은 거의 뜬눈으로 지새야하겠지.
함께 어머니 병상을 지키려고 했는데, 새롬엄마가 내 등을 떠밀어서, 이 편지도 쓸 겸해서 택시를 타고 막내네 집으로 오고 말았네.
어머님이 수술실 안에 계시던 낮 12시경 병원에 왔던 세연에미는 저녁 8시가 다 되어 돌아갔네. 어머니 간병은 역시 딸이 최고라는 사실을 실감시켜 주고….
어머니는 오늘 아침 8시 30분에 수술실로 들어가셨네. 12시 30분경 주치의이신 일반외과 전문의 김지연 교수가 수술실에서 나오시기에 반색을 했더니, "수술이 잘 되었습니다. 생각보다 어머님의 병이 심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라고 해서 어찌나 기뻤는지…. 확실한 것은 암세포의 조직 검사를 해 봐야 알 수 있노라는 단서도 내게는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네.
20분쯤 후에 수술실에서 나온 수술팀 정성연 여의사 님께도 알은 체를 했더니, "수술이 잘 되었습니다. 완치가 되실 겁니다. 그리고 916호 병실로 올라가십니다." 해서 어찌나 반갑고 고마웠던지…. 내 입에서 "고맙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고….
어제 낮 12시경 김지연 교수 방에서 면담을 할 때는, 김 교수가 "초기가 지난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3기 정도일 것으로 짐작되는데, 3기도 전3기와 후3기가 있습니다. 후3기는 암세포가 다른 기관으로는 전이되지 않았더라도, 임파선으로 전이가 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을 말하죠. 역시 조직 검사를 해 봐야 알 수 있습니다만…." 해서 은근히 걱정을 했었지.
그리고 어제 저녁 또 한 명의 주치의인 차선욱 여의사 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설명'을 듣는 중에 "수술 후 상황에 따라서는 6층 중환자실로 가실 수도 있습니다" 라는 말도 들어서 내심으로는 무척 긴장을 했었네. 오늘 아침 일찍 6층에 가서 보호자도 들어갈 수 없는 중환자실 풍경을 보면서 제발∼이라는 생각과 함께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를 했고….
어제 저녁 어깨의 혈관에다 링거 바늘을 꽂고(이제부터는 손등이나 팔에 바늘을 꽂지 않고 끝까지 어깨 혈관 하나로 모든 주사를 해결한다는군. 피검사를 위한 채혈 주사만 빼고…), 오늘 아침에는 요도에 호스를 꽂고, 코에도 산소 호스를 넣고, 그리고 침대차에 실려 어머니가 수술실로 들어가신 후 회복실에서 나오실 때까지 장장 다섯 시간을 나는 묵주를 손에 쥐고 있었네. (4시간 수술, 1시간 회복)
마침내 회복실에서 나온 어머니는 나와 세연에미를 쉽게 알아보시고 말도 하셔서 나는 정말이지 뛸 듯이 기뻤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소리가 절로 나왔고….
9층 외과 병동의 수술 받은 환자들 방인 916호실 '준중환자실'로 들어간 어머니는 잠을 자지 못하게 하는 우리들의 성화에, 그리고 심호흡을 하라는 아들딸의 주문에 힘껏 응답을 해 주셨네. 끈질기게 졸음과 싸우고 간헐적으로 심호흡을 해서 마취 기운을 모두 배출하고 폐기능을 거의 회복시킨 다음 저녁부터 간간이 잠을 자기 시작하셨네.
의료보험 대상이 아닌, 사용료가 얼마일지 모르는 '통증 조절기' 덕택에 통증이 많이 완화되고 있는 상태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고통을 참는 기색이 역력하셨는데, 역시 우리 어머니는 고통을 잘 참아내는 그 정신력은 참으로 타고나신 것만 같네. 담석 제거 수술을 받고 함께 916호실로 들어온 올해 74세시라는 할머니에 비하면 더욱….
누님은 안양 수리산 성지에 가셔서 11시 미사에 어머니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셨다는데, 기쁜 마음을 안고 내일 매형과 함께 내려오시겠다는군.
새롬엄마는 내일 하루 연가를 얻어 가지고 오늘 오후 4시경 버스 편으로 출발해서 9시경에서야 병원에 도착을 했네.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연가를 얻을 때 "우리 장모님은 여든 살에 수술을 받았는데,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해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다"는 말을 들은 터라서 잔뜩 걱정을 했었던지, 어머니가 마취에서 잘 깨어나셨다는 말에 기쁘게 달려온 모양일세.
뒷동 제수씨는 좋은 소식에 너무 감격해서인지 말소리가 거의 울음소리더군.
오늘 출근길과 퇴근길에 병실에 들른 막내 부부도 어머니에 대한 안쓰러움과 수술이 잘된 기쁨에 아들 며느리로서의 한결 정겨운 모습을 보여 주었고….
어머니는 침대에서 자신의 힘으로 일어나 앉고 눕고 옆으로 몸을 돌리기도 하시는데, 의사와 간호사들이 좋아하더군. 장의 유착을 방지하기 위해서 내일부터는 슬슬 운동을 해야 한다는데, 어머니는 그것도 무난히 하실 것 같네. 오늘 기침과 게트림을 하신 것으로 보아 가스도 쉽게 나올 것 같고….
그렇지만 입원은 앞으로도 2주 정도는 더 해야 한다는군.
그러니 올 추석은 어머니나 나나 대전성모병원의 병실에서 지내야 하게 생겼네.
이만 줄이네.
어머니 수술 받으신 날 밤
대전 막내네 집에서 어머니의 큰아들 적음
수술 직후 9층 외과병동의 준중환자실인 916호실로 들어간 어머니는 놀랍게도 다음날 일반병실인 912호실로 옮겼습니다. 병상에서 내려서서 스스로 걸어서 병실을 나가는 어머니를 같은 날 담석 제거 수술을 받은 할머니의 보호자들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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