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네살배기 길벗과의 여행

길 위에서 쓰는 편지를 부치지 못한 것에 대한 궁색한 변명

등록 2001.10.25 08:08수정 2001.10.25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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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에도 길 위에서 수많은 날들을 보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변명 같지만 제 삶에 변화를 준 네살짜리 꼬마 친구 때문이었습니다.

아직도 그 친구를 극복(?)하지 못했지만 이러다간 끝내 자멸하는 것 아닌가 싶어 용기를 내어 그런 이유를 실토하여 강호제현들의 용서를 구하고자 자판을 두드립니다.


부디 본 글(여행 안내)은 아니더라도 이해하시고 이 글을 보신 분은 마음닿는 대로 생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여행의 즐거움은 혼자 오롯하게 느껴보는 것이 정말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기쁜 것은 여행의 모든 과정에 함께 호흡해줄 좋은 길벗을 만나는 것입니다.

준비된 친구가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불쑥 길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그야말로 복이 넝쿨째 들어오는 것이라 여깁니다. 저에게도 그런 친구가 생겨 좋았는데 어느 순간 그 복이 제 가슴을 후벼파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그 일은 가을이 다가오는 날 답사지로 가는 한 시간 반 동안의 이동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차를 타고 가다 실내공기가 덥게 느껴져 가만히 창문을 열어주었습니다. 뒷좌석에서 책을 보던 재하는 바람이 책장을 넘겨 버리는 뜻하지 않은 상황을 맞이하였습니다.


"어. 바람이 책을 읽네."

그 말이 제 귓전으로 흘러왔습니다.


쩝~ 말문이 막히는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이 친구의 입에서 이런 얘기가 나올 수 있는지.

하지만 놀라운 일은 계속 되었습니다. 옆자리의 엄마에게 창문을 열어 달라고 하더니 손을 조금 내밀며 바람을 한 웅큼 잡아 얼굴을 문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재하야. 뭐하니?"
"응. 바람에 세수하는 거야."

쾌청한 바람이 재하의 조금은 뜨거운 얼굴을 씻겨주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다 우리들이 타고 있는 차를 앞지르는 검정색의 차가 가는 것을 보고 재하는 또 한마디를 하였습니다.

"삼촌. 저기 씨차 간다."
"뭐? 무슨 차라고"
"응. 씨차"

갑작스런 "씨차"라는 말에 감을 잡지 못하는 저에게 여덟살 난 재하의 누나가 참견합니다.

"삼촌. 재하는 검정색 차를 씨차라고 해요. 왜 그런지 모르시죠?"
재하의 누나 채운이는 동생의 마음을 너무 잘 헤아리고 있는 친구라서 저는 그 친구의 입에서 나올 얘기에 잔뜩 기대를 품으며 기다렸습니다.

"재하는 자기가 먹는 과일이나 꽃씨가 검정 색이라고 검정 색 차를 보면 '씨차'라고 해요."

이제는 이 두 친구들의 얘기가 나오길 기다리거나 더욱 말을 붙여 그런 아름다운 표현의 방법들을 알고 싶은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조금 있으니 하얀 색의 차가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여지없이 재하가 초롱한 눈빛을 띄우며 "당구차 간다"라고 이전보다 더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재하야 왜 당구차지?"

이번 대답도 채운이가 참견합니다.

"삼촌 아빠가 언제 재하 데리고 당구장에 갔는데 아빠가 하얀 공을 치며 재하와 놀아주지 않으니까 재하가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당구공이라고 하니까 하얀색만 보면 재하는 당구색이라고 얘기하고 차는 당구차라고 말해요."

저의 표정이 어땠냐구요. 정말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물을 곧이곧대로만 읽고 있는 저의 째진 눈과 수많은 프리즘을 갈아 끼우는 해맑은 친구의 눈과 너무도 극명하게 대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차는 이런 저의 놀람과는 상관없이 터널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재하야 여긴 어떤 색이지?"

이미 제가 그 친구의 발언에 길들여 가고 있는 셈이 된 것입니다.

"시다."

재하의 대답이었습니다. 뜻밖의 상황입니다. 터널의 색이 시다고 하니 말입니다. 이내 재하의 언어를 내 머리로 분석해 보았습니다.

'시다' 라는 말이 담은 뜻과 터널 내부의 색.

재하의 말이 틀림없었습니다. 터널 내부는 오렌지 빛이 나고 있었습니다. 선팅된 차의 내부로 그 색이 번져 오면서 말입니다.

오렌지를 연상하며 재하가 던진 색에 대한 발언은 오렌지의 신맛 그대로 내게 다가왔던 것입니다. 참 모처럼 만에 다행스런 일이다 싶었습니다.

"재하 너 오렌지 생각했지?"
"예."

답사지에서도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재 혹은 화려한 들꽃보다는 땅을 기어가는 개미나 무당벌레 등에 더 깊은 애정을 표하는 그 친구의 모습을 보며 언젠가부터 잃어버린 그런 상상과 응용력의 밑천에 대해 제 스스로 자각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으로 몰아준 것입니다.

그런 여행이 끝나고 그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던 날 영화에 관한 얘길 나누는 도중 재하가 극장에서 한 말을 재하의 엄마를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아직 어린 재하에게는 가족들의 극장 나들이는 무리였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를 어쩌지 못하고 함께 극장에 갔던 날이었습니다. 5분 정도 지나니 따분하기 그지없던 친구가 엄마에게 말했답니다.

"엄마 집에 언제가?"
"영화 끝나면."
"영화 언제 끝나."
"인제 시작했으니 좀더 있어야 돼."
"그럼 영화는 지가 끝나라고 하고 우리는 집에 가자."

엄마 또한 이런 재하에게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말았다는 얘길 들은 것입니다.

이제 한참 말할 나이인 네살의 재하가 보여주는 이런 언어의 선택 구조에 대해 저는 잘 알지 못하지만 갑작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던 몇 가지가 있었지요.

그것이 바로 일방적인 내용들로 가득한 제 글쓰기에 대한 후회였고, 한 공간 내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숙제를 하듯 황망하게 풀어 버리는 생각 없는 낱말들의 배설로 인해 독자가 느껴야 했을 언어 폭력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더불어 재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친구가 조금 자라 학교에 들어가면 지금의 모습들은 어떻게 변해 갈 것인지에 대한 이른 걱정이었습니다.

어릴 적 메트로놈의 신비한 움직임에 푹 젖어서 쉬는 시간에 가지고 놀다가 흠뻑 두들겨 맞았던 경험으로 인해 음악 시간만 되면 겁이 났던 기억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지금, 그런 누군가를 또 만나면 이 친구는 어떻게 견뎌낼까 하는 그런 기우들 말입니다.

게다가 찬바람이 불어오면서 느껴지는 내 스스로에 대한 고독함들까지 가세하니 이건 도무지 견디기 어려운 일이 되고 만 것입니다.

꼬마 친구 재하와의 여행에서 주고받은 몇 마디 말들이지만 분명 내 스스로의 세상을 읽는 방식에도 변화가 있어야 되겠구나 하는 그런 무거운 화두를 안고 이렇게 길 위에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만간에 다시 길 위에서 편지를 쓰도록 할렵니다.

가을이 깊어갑니다. 가족들의 손을 잡고 조금만 길을 나서 보십시오. 조금만 눈 높이를 낮춰도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감지하실 것입니다.

더불어 아이들의 표현 양식에 귀를 쫑긋해 보시는 것 잊지 마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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