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치않는 얼굴 조선농꾼들 만났다

전라도 남원땅 운봉골에 살고 계신 장승 12분

등록 2001.08.24 17:43수정 2001.08.2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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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그 핏빛 고원을 지켰던 사람들의 얼굴이 있었다.

흔하게 길을 떠나는 나에게 역사 속에 등장하는 길, 일종의 이름난 길을 더듬는 것은 그다지 흥미로움은 없고 오히려 잔뜩 긴장감만 돌게 만든다. 수 없는 칭찬세례에 널리 알려진 그 명성으로 인해 그 언저리에 감춰진 많은 것들이 무시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전라북도의 남원에서 나는 똑 같은 경험을 했었다. 벌써 몇 번을 갔던 곳인가. 하지만 그 남원에 대한 기억들은 모조리 춘향이로 인해 다른 어느 것과도 만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오로지 그녀와 관계가 있었던 공간들인 광한루, 오작교, 오리정, 박석고개, 춘향이 묘에 그녀가 태어난 날인 초파일이라든가, 이도령과 만난 단오날 등에 세뇌되어 있었던 탓이다.

눈을 질끈 감고 춘향이 없는 남원을 상상해 보며 길을 상정해 본다. 남원을 넘어서 함양 방향 길목, 그 옛적 이성계와 고려의 백성들이 왜적을 맞아 힘차게 싸웠던 황산벌,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넘나들며 함께 장을 만들었던 인월장, 바로 지리산을 마주하고 있는 고원지대인 운봉의 들녘을 떠올렸다.

이 책 저 책을 넘나들며 자료를 탐색한다. 그리고 그곳에 이성계 보다 더 매섭고 생명력 있는 사람들이 아직까지 시퍼런 눈을 뜨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바로 돌장승이다.

사실 그들을 만나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너무나 말쑥하여 말붙이기 거북한 사람들이 많은 무늬 화려한 이 공간에서 벗어나 때론 과묵하기도 하고, 때론 위엄을 부리기도 하고, 때론 웃음 흠뻑 머금고 있기도 한 그들의 정직한 모습을 보면서 말없는 그들의 시대를 가늠해 볼 수 있고 여러 가지 상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일요일, 아직은 그 늙은 장승보다는 들판의 꽃과 익어 가는 벼와 하늘을 나는 나비와 잠자리에 관심이 깊은 꼬마시인 두 친구 가족들과 함께 그 길을 찾았다.

남원에서 함양방향으로 가는 24번 국도를 따라 여원치 고개를 차고 오르니 운봉 땅이다. 운봉 어디선가 들어봄직한 그 지명은 또 춘향이를 떠오르게 한다.

이몽룡이 초라한 모습으로 변사또의 생일잔치에 합석하여 술 한잔을 청하고 지었던 시를 본 운봉현감은 사태의 심각함을 알고 재빨리 자신의 치소로 돌아가 위기를 모면하는 구절 속에 운봉이 있었던 것이다.

오랜 시대부터 군사적인 전략지로 알려진 이곳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통하는 길목으로 중요한 순간마다 싸움의 터가 되었던 것이다.

권포리의 4장승

고개 마루에서 장동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으로 길을 잡고 산정에 군사시설이 있는 고남산을 보고 권포리를 찾아가니 새사도 교회 곁의 지리산 방향쪽으로 장승이 두 기가 서 있다. 왼편의 장승은 머리가 잘려 나간 것을 이어 놓은 자욱이 선명한데 팔짱을 낀 남성의 모습이고 그 맞은편에는 여성스러운 장승이 서 있다.

장승 하면 떠올리는 그런 무서운 모습보다는 친근한 마을 아줌마 아저씨가 있는 듯해 정겹다. 그리고 마을 가까이 다가가 보니 회관 앞에 두 기의 장승이 또 있다. 낮은 자세로 서 있는 두 기의 장승은 빛이 바랜 사진처럼 마멸된 모습을 하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바로 그 곁에는 조탑이 서 있다. 돌을 사랑하고 그 돌에 신심을 가졌던 옛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특이한 것은 어떻게 한 마을에 두 쌍이나 되는 장승이 있을까이다.

꼴을 베고 있는 마을 어르신에게 물었지만 그냥 있었다는 말 밖에는 달리 내용이 없다. 못내 서운한 마음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지리산의 모습이 병풍과 같이 아늑하고 바람이 너무나 시원하다. 내 친구들은 장승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잠자리와 염소와 쑥부쟁이 꽃을 보느라 정신이 없다.

서포리의 대장군

아쉽지만 염소 안녕, 잠자리야 안녕, 장승 안녕을 외치고 모두 권포리를 빠져 나와 운봉 시가지 서천리 곁을 지나니 좌측으로 선두숲이 들어온다. "선두숲" 일종의 뱃머리와 같은 의미일까?

그 앞으로 흐르는 강물과 마을의 모양이 혹시 배가 떠나는 형국을 하고 있어서 배를 고정시키려고, 혹은 그곳이 수구가 돼서 험한 기운이 몰려오는 곳이니 방어하자고 세운 사공과 같은 의미를 지닌 장승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선두숲의 나무를 보면 그다지 오래된 숲 같아 보이지는 않지만 막상 그 곁에 가보니 아무개 불망비니 하는 비석들이 있어 꽤 오래된 숲임을 짐작하게 하고 이를 뒷받침하듯 아직도 당산제를 지내는 재단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 입구에 정말 야무진 모습의 장승이 있다.

높이는 2미터가 넘는 방어대장군과 진서대장군의 이름표를 차고 있는 이들의 얼굴 자체를 뜯어보니 그 옛날 도깨비의 모습을 닮았지 않나 여겨질 정도로 무서워 보인다. 툭 튀어나온 퉁망울 눈, 볼록한 광대뼈, 치렁한 수염, 머리에 벙거지 모자까지.

하지만 조금 떨어져서 전체적인 모습을 보면 이 동네의 한 과묵한 아저씨의 모습이 들어 있다. 송곳니를 제 아무리 길게 늘어뜨리고 왕방울 눈을 부라린다고 해도 그 천성을 숨기질 못하는 운봉의 300살 먹은 아저씨가 거기 아직 살아 계신 것 같다.

숲 사이의 귀나간 비석을 보니 자료에서 보았던 박봉양이라는 이가 갑오농민전쟁때 민보군을 만들어 동학군의 김개남 부대가 이곳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아낸 것을 기념해 세웠다고 하는 비이다. 귀가 나간 내력을 보니 착잡한 기분이 든다.

'81년 전두환이 광주와 인접한 담양군 고서면의 성산 마을로 들어와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민박을 했다고 하여 마을 어귀에 검은 오석으로 전두환 대통령 각하 내외분 민박 기념이라는 표지석을 세웠다.

당시 그가 머물고 갔음을 자랑스러워했던 몇몇 사람들에 의해 바로 한 해 전의 광주학살과는 무관하게 마치 선정을 베풀고 간 것처럼 세운 것이다.

그 후 비석이 매 해마다 수난을 당하기 시작했다. 5월을 경험한 이들과 피 끓는 사람들과 대학생들에 의해 발로 채이고 커다란 망치로 깨져나가곤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몇 해전 아예 그 비석을 깨서 망월동의 구묘역 앞 사람들에게 짓이기고 가게 만들어 놓았다. 마을사람들은 바로 인접해 광주를 두고서도 그 피 비릿내가 진동했던 광주를 경험하지 않았던 탓에 학살의 배후가 밝혀지고서야 그 일의 부끄러움을 알았다.

사실 우리의 역사라는 것이 옳고 그름을 가려내고 정리하여 의를 세우기보다는 쉽게 타협하고 그것이 마치 중용의 도인 것처럼 우겨대는 역사였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사람을 강경파입네 좌파입네 하고 몰아 세우는 참으로 수치스런 역사라는 것을 이곳 선두숲에서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그나저나 이 땅의 돌들은 참 불쌍하다. 자기보다 더 명 짧고 더 단단하지 못한 인간들이 제 몸에 악행이건 선행이건 새겨내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을 받아 주어야만 하니 말이다.

북천리의 축귀대장군

하여튼 그런 서천리의 장승과 비석과 숲을 뒤로 하고 다시 함양쪽으로 길을 잡아 300여미터를 가니 좌측으로 반암이라는 이정표와 10번 국도가 나타나고 그 길로 들어가 100미터 정도 가니 북천 마을을 뒤로하고 두 기의 장승이 나타난다.

이름표가 가슴에 새겨져 있다. 동방축귀대장군, 서방축귀대장군이 그들이 간직한 이름이다. 오른편의 것이 서방축귀대장군인데 마을로 내려온 미륵과 같은 형상으로 귀가 늘어져 마치 머플러를 쓰고 있는 듯한 인상에 귀 모습이 숫자 8이 길게 씌어진 듯하다.

귀가 크다보니 자연스럽게 얼굴의 이모저모를 보지 않아도 벌써 후덕함이 배어나는 것을 느낀다. 맞은편의 동방축귀대장군은 턱이 좀 처진 복면의 자객 혹은 만화의 스파이더맨과 같은 인상인데 송곳니를 표현하느라 그런지 이매탈처럼 턱이 아래로 툭 내려와 있다.

몸통 전체의 모습은 삼각형태를 하고 있어 이름도 한쪽면에서는 보이지 않은 구조이다. 서쪽의 것에 비해 무서운 것 같지만 몸통에 구멍이 송송 뚫린 것이나 턱이 늘어진 얼굴 구조를 보면 그런 무서움은 금세 사라지고 오랫동안 마을을 지켜왔을 그의 공력에 감사의 마음이 든다. 양쪽 다 예전에는 몸통의 태반이 흙속에 잠겨 있었던 것을 최근 흙속에서 몸을 빼내고 고정시켜 놓은 흔적이 있다.

마을의 우회도로라는 것이 어찌보면 참 편리하고 좋다. 차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에게는 마을 안길의 번잡함과 느릿한 사람을 보면 왠지 모르게 불안했던 마음들이 우회도로에서는 전혀 들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남원부와 운봉현이라는 다른 체제를 유지했던 현의 중심지를 그들의 숨결 하나 보지 않고 그렇게 우회도로를 타고 다음 목적지로 간다는 것이 아쉬운 일이다. 차란 것에 길들여진 내 자신의 여행방식은 그렇게 사람과의 거리를 더 멀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황산벌과 동편제 지나 닭실의 장승

함양으로 향하는 길을 계속 따르니 푸른 소나무 길이 나타난다. 동편제의 비조 송홍록이 나고 자란 마을인 비전마을로 가는 길이다. 그 길에서 강쪽으로 나가면 생가가 단장되어 있고 그 곁에는 일제가 조각내고 글까지 긁어 버린 황산대첩비와 이성계가 승전을 기리며 이름을 세겨 놓았던 흔적이 있는 어휘각이 있었다.

스치듯이 그곳을 보고 다시 내 오늘 여행의 목적인 조선의 농투사니를 만나러 길을 잡았다.

함양 방향으로 한참을 가니 인월이 나오고 좌측으로 지리산 나들목으로 가는 길이 나타난다. 그 길에서 1084번 지방도로를 타고 오른편으로 4킬로미터쯤 가니 아영면의 소재지다. 그곳에서 우회전하여 2킬로 정도를 들어가니 마을에 당산이 기품이 있어 오래된 흔적을 느끼게 한다.

닭실이라고 불리는 유곡리다. 마을 어귀에 양편으로 장승이 서 있다. 딱히 남녀가 구별되지 않는 형태인데 좌측의 것은 길을 넓히면서 새로 옮긴 것인지 논에 단을 만들고 감나무가 서늘하게 그늘을 만들어 주는 가운데 서 있다.

몸에 천하대장군이라는 명문이 있고 수염이 허리까지 내려와 있어 과장된 표현을 볼 수 있다. 오른편의 장승도 똑같이 천하대장군이라고 명문이 들어있는데 어찌된 것인지 목이 부러져 접합 수술을 한 자국이 남아 있다.

마모가 심한 좌측 대장군에 비해 눈망울이나 이빨의 표현이 도드라져 있고 그 오른편에 돌이 하나 흙을 비집고 볼록하게 나와 있는데 필시 베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인다. 마을을 지키느라 힘든 장승에게 누울 자리를 상상해 본 것이다.

마침 장승을 보고 있는데 술을 몹시 드신 어르신이 좌측의 것이 각시장승이고 오른편의 것이 할아버지라고 하신다.

의지리의 돌에서 찾은 그들의 얼굴

무엇가 여쭤보고 싶었지만 드신 술이 많은 것 같아 포기하고 오늘의 마지막 장승을 찾아 나섰다.

아영소재지에서 병곡방향 1084번 지방도를 타고 2킬로 조금 넘어 가니 고속도로가 정면으로 보이는 우측에 모정이 나타나고 바로 위에 마을이 있다.

의지리라고 불리는 마을인데 민가 바로 앞에 두기의 장승이 마주보고 서 있다. 다른 장승에서 보았던 굵직한 표현들이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고 슬쩍 건드린 듯한... 아니 잠시 돌속에 묻혀 있던 얼굴을 먼지를 털어 찾듯 살며시 보여주는 그런 인상을 하고 있다.

소박함속에 드러나는 간결함이 돋보이는 장승이다. 이렇게 나와 내 벗들은 12명의 조선사람을 만나고 돌아왔다.

고원의 드넓은 뜨락을 적으로부터, 질병으로부터, 사악한 기운으로부터 막아내며 그 고장 사람들과 운명을 함께 해온 장승의 모습에서 우리는 변하지 않는 그들의 얼굴을 보고 돌아온 것이다.

시간만 바뀌면 얼굴이 시시각각 변하는 그 땅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이 결코 편하지 않았지만 또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면서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우리나라 대부분의 장승은 마을(성을 포함) 장승과 사찰장승의 형태로 남아 있다. 그들을 만든 소재는 나무와 돌이었는데 돌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 숙종 무렵이라고 전한다. 장승의 몸 뒤에 그 당시를 표기해 두었던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하는 역할은 마을 앞에서는 수구막이 구실로 나쁜 기운을 막아주고, 마을을 지켜내며, 경계를 이루고, 마을 사람들의 발복을 받아주며 이정표의 역할을 했다. 때문에 옛사람들에게 있어 장승은 무척 다정 다감하고 소중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사찰의 장승은 우리네 토착 신앙이 불교와 융합되면서 이뤄진 것이라 말한다. 민간이 중요하게 여긴 장승을 절 집 입구에 모셔 놓으면서, 사찰의 경계를 표시하고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기며 토착신앙을 절로 가져온 것이다.

이런 장승들의 모습은 어디에서 모델을 찾을 수 있는가가 참 흥미 있는 일이다. 마을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을 담기도 하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굵은 주름에 정겨운 모습, 나무를 뿌리째 거꾸로 세워 봉두난발을 한 괴이한 모습, 세파에 찌들어도 순박함을 잊지 않고 사는 아저씨 아줌마의 모습, 모든 염원을 들어줄 듯한 미륵님의 모습, 절 집앞을 지키는 사천왕의 모습, 사모관대와 쪽도리를 덤벙하게 먹으로 축약하여 표현한 신랑 신부 등이 가장 대표적인 모델들이라고 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우리나라 대부분의 장승은 마을(성을 포함) 장승과 사찰장승의 형태로 남아 있다. 그들을 만든 소재는 나무와 돌이었는데 돌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 숙종 무렵이라고 전한다. 장승의 몸 뒤에 그 당시를 표기해 두었던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하는 역할은 마을 앞에서는 수구막이 구실로 나쁜 기운을 막아주고, 마을을 지켜내며, 경계를 이루고, 마을 사람들의 발복을 받아주며 이정표의 역할을 했다. 때문에 옛사람들에게 있어 장승은 무척 다정 다감하고 소중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사찰의 장승은 우리네 토착 신앙이 불교와 융합되면서 이뤄진 것이라 말한다. 민간이 중요하게 여긴 장승을 절 집 입구에 모셔 놓으면서, 사찰의 경계를 표시하고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기며 토착신앙을 절로 가져온 것이다.

이런 장승들의 모습은 어디에서 모델을 찾을 수 있는가가 참 흥미 있는 일이다. 마을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을 담기도 하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굵은 주름에 정겨운 모습, 나무를 뿌리째 거꾸로 세워 봉두난발을 한 괴이한 모습, 세파에 찌들어도 순박함을 잊지 않고 사는 아저씨 아줌마의 모습, 모든 염원을 들어줄 듯한 미륵님의 모습, 절 집앞을 지키는 사천왕의 모습, 사모관대와 쪽도리를 덤벙하게 먹으로 축약하여 표현한 신랑 신부 등이 가장 대표적인 모델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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