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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소개한 글 중에서 나의 그 '이상한 꿈'과 능히 연결될 수 있는 이야기 그 각별한 사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 글의 끝에 가서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또 한번의 신춘문예 실패로 나는 의기소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상금을 타서 갚을 요량으로 퍼마셨던 외상술값이며 구두값과 옷값을 갚는 일도 보통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너무 당선을 자신했던 그 만용이 우습고 후회스럽기 한량 없었지요.
해가 바뀐 가운데서도 정부의 동아일보 광고탄압과 독자들의 격려광고는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정부의 그 야만적인 의지는 목표가 너무도 분명했고, 그것을 잘 아는 독자들은 어떻게든지 동아일보의 언론자유 수호 의지가 꺾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더욱 열화와 같이 격려 광고 행진에 동참을 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그것은 요원의 불길과도 같았습니다.
매일같이 그것을 보는 나는 신춘문예에 낙방을 한 것이 더욱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만약 당선을 해서 상금을 탔더라면'하는 생각이 하루에 골백번도 더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춘문예에 떨어졌다고 해서, 그리고 아무리 목구멍에 풀칠을 하는 일이 급선무라 해도 동아일보의 격려광고에 동참하는 일을 무한정 미룰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도저히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지요.
그리하여 나는 중앙일보 신춘문예 소설 심사위원이었던 문학평론가 염무웅 선생을 만나러 서울에 간 길에 그분께 동아일보 격려광고 동참 의사를 밝히고, 요즘 동아일보 1면의 중간 한쪽에 매일같이 나오고 있는 문인들의 '시리즈 광고'에 '작가 지망생' 자격으로도 참여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염무웅 선생은 반색을 하며 참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아직 작가 지망생 처지인데도 문인들의 그 시리즈 광고에 눈독을 들였던 것은 그 광고에 나오는 짧은 글귀들이 너무도 멋있고 심금을 울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거기에 나온 글귀들을 꽤 많이 외우기까지 했었는데, 다 잊어먹고 지금은 단 하나만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 ―
박태순, 이문구, 염무웅 씨 등의 이름이 올랐을 때 선을 보였던 글귀지요.
나는 염 선생께 문인들의 그 시리즈 광고에 참여하려면 일인당 대략 얼마 정도의 금액이 필요한가를 물었습니다. 염 선생은 5천 원 이상이면 된다고 했습니다. 나는 염 선생께 1만 원을 드리면서 5천 원은 문인들의 시리즈 광고에 넣어주고 5천 원은 내 개인 광고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다시 한번 크게 반색하는 염무웅 선생은 내게 고마워하는 표정이 정말로 온 얼굴에 그득하였습니다. 누가 보면 동아일보의 기자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나는 염 선생께 내 개인 광고 문안을 간단하게 써 드리고, 태안으로 내려가면 동아일보의 구독자를 늘리는 일 쪽으로도 열심히 활동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나는 다음날부터 더욱 열심히 동아일보의 광고면을 살폈습니다. 동아일보의 모든 광고면은 여전히 독자들의 수많은 격려 광고들이 연일 장대한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 이름자가 들어 있는 광고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일주일 후에도, 열흘 후에도….
나는 염무웅 선생이 일이 바빠서 쉽사리 동아일보사엘 가지 못했는가보다는 생각이 드는 가운데서도, 어쩌면 혹 동아일보에 독자들의 격려 광고 의뢰가 너무 많이 밀려 있는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정말 그런 상황이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고, 그런 상황 때문이라면 내 광고는 얼마든지 뒤로 밀려나도 좋다는 생각도 하곤 했지요.
그러다가 나는 마침내 동아일보 지면에서 내 광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1975년 2월 24일자 신문에 내 개인 격려 광고가 먼저 난 것이었습니다.
† 良心宣言
충남태안천주교회
청년회장 지요하
나는 작은 지면에 긴 말 쓸 필요 없이, 십자가 표시와 함께 '양심 선언'이라는 말만 간단히 적었던 거지요. 내가 양심 선언이라는 네 글자를 택했던 것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관련된 젊은이들에게 금품을 주었다는 이유로 투옥된 천주교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님이 옥중에서 발표한 '양심 선언'을 지지한다는 뜻의 내 나름의 적극적인 표현이었지요.
그런데 양심 선언이라는 그 말보다도 내가 확실한 신분과 실명을 밝힌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그 당시 동아일보 독자들의 격려광고는 거의가 익명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시대가 그만큼 암울하고 폭압적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일 수밖에 없겠지요. 실명을 밝히기에는 너무도 위험이 많은 시대였던 거지요.
한번은 '육군 모부대 중위'라는 익명으로 된 격려광고가 나왔는데, 그 현역 중위를 찾아내기 위해서 군 수사기관이 동아일보사에 들어가서 조사를 벌이려고 한 바람에 동아일보 기자들과 충돌을 빚고, 그것이 사건화되어 한동안 지면에 오르기도 했었지요.
나는 동아일보 지면에 오른 내 이름자를 보는 순간엔 무척 반갑고 신기한 느낌도 들었지만 곧 은근히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태안성당으로 정체 모를 전화들이 오더니 마침내 서산보안대에서 '호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서산보안대를 한번 방문해 달라는 부드러운 말이긴 했지만, 그 온화한 음성 속에는 이미 뭔가가 숨어 있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였습니다.
나는 은근히 겁을 먹은 상태로 어찌해야 할지 난감 수렁에 빠져드는 기분인데, 유호식 신부님이 절대로 가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까짓 일로 군 보안대에서 민간인을 오라 가라 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그들이 오라는 말 한마디에 자석처럼 움직여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 유호식 신부님의 말이었습니다. 나는 유호식 신부님의 격려에 의지하는 기분으로 거의 매일같이 성당에서 살다시피 하였지요.
그때 나는 내가 겁쟁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였습니다. 겁이 많아서 진짜 큰일을 저지를 수 있는 위인은 못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기분이었지요. 그러면서 나는 새삼스럽게도 반유신 민주회복 투쟁에 나서는 청년들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참으로 그들은 내게 있어 경이로우면서 경탄스러운 존재들이었지요.
나는 겁이 많고 삶의 지대며 조건이 달라서 그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나아가지는 못하더라도, 뒤에서나마 그들을 힘껏 돕고 추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도 새로이 할 수 있었고….
그로부터 며칠 후에는 문인들의 시리즈 광고에도 내 이름이 올랐습니다. 모두 여섯 명의 이름이 올라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3만원짜리 광고인 셈이었습니다.
시리즈 광고 제6주째
文人·自由守護激勵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萬海의 詩
金鍾元(詩人) 鄭義泓(詩人) 朴建漢(詩人) 송 영(小說家) 지요하(小說家) 賢 珍(小說家)
나는 내가 익히 이름을 알고 있는 시인, 소설가들 옆에 내 이름이 올라 있는 것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 송구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내 이름자 옆에 붙어 있는 '소설가'라는 것이 자꾸만 이상한 느낌을 갖게 하더군요. 군대 시절 (논산훈련소 조교 시절) 이등병 주제에 일등병 계급장을 미리 달던 때의 그 '마이가리' 일병 기분이 절로 상기되는 것도 같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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