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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가을, 유신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의 정권이 부당한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갖가지 미명으로 국민들을 현혹시키는 한편 없는 죄를 만들어 내거나 뻥튀겨서 억지로 덮어씌우는 짓거리 ―그것의 하나로 받아들여진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을 터뜨림으로 말미암아 온 사회가 극도로 살벌한 기운과 공포 분위기에 짓눌려 있는 가운데서도 또 한 해의 '신춘문예 시즌'이 시작되었다.
각 일간 신문들의 1면에 75년도 신춘문예 작품모집 '사고(社告)'가 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또 다시 이 계절병을 앓지 않을 수 없었다. 72년 봄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한 그해부터 다시 해마다 앓아온 계절병이 벌써 세 번째인 셈이었다. 나는 집에서 구독하고 있었던 동아일보와 이웃집의 중앙일보에서 사고(社告)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흥분과 긴장 속으로 몰입, 늘 가슴 속이 뻑뻑한 지경이었다.
그해 10월 어느 날 나는 우연히 기발한 착상 하나를 떠올렸다. 그해 가을에 있었던 '태안여자상업고등학교' 개교 기념식의 한 장면에서 목도했던 잊을 수 없는 일과 '민청학련' 사건에서 얻은 힌트가 기묘히 연결되어 저절로 머릿속에서 이야기의 틀로 불이 확 켜지는 듯한 ―영감의 작용도 농후한 착상이었다.
나는 그 소재를 꼬옥 보듬었다. '일일공부'라는 매일시험지 사업을 하는 제법 바쁜 일과 속에서도 그 소재에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나는 그 당시에 했던 매일시험지 사업을 읍내 각 가정들을 상대하는 것으로만 국한시키지 않았었다. 제법 수완을 발휘하여 여러 학교들에 매일시험지와 월말고사지 기말고사지를 납품하는 식으로 사업을 전개시키고 있었다. 그만큼 많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은 태안읍 평천리 소재 '화동국민학교'에 두 다리 걸음으로 출장을 갔었다. 일부러 걸음을 택한 것이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산길 풀밭에 앉아서 오래 사색을 하면서 그 소재를 구성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나는 다음날 성당에 가서 기도를 한 후 성당 의자에 앉아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참으로 간절히 성공을 염원하는 마음이 성당 안에서 글을 쓰게 만든 것이었다. 그때 나는 또 처음으로 노트에다가 글을 썼다. 건방시퉁터지게 막바로 원고지에다 쓰는 버릇을 지양하고 노트에 초고를 써야만 좀더 진지해지고 좋은 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참으로 명료했다.
3일 동안의 작업으로 초고를 마쳤다. 쓰고 나니 흡족한 마음이었다. 또 3일 동안 원고지에 옮기는 작업을 했다. 다 쓰고 보니 신기하게도 원고 용지 백매째의 맨 마지막 칸에서 소설이 끝나는 것이었다. 썩 기분이 좋았다. 흐뭇한 충만감이 가슴에 찼고 꼭 당선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 당시 내게 낯익은 신문들이었던 동아일보와 중앙일보 중에서 동아일보는 단편소설 매수 규정이 70매 안팎이라 피할 수밖에 없었고 중앙은 100매 이내로 되어 있어서 중앙일보를 택했다.
원고를 부치고 나서 나는 당선을 자신했다. 스스로 천기 누설을 해서는 안 된다는 그야말로 비장 엄숙한 마음으로 아무에게도 소설을 투고한 사실을 말하지 않았지만 너무 당선을 자신한 나머지 엉뚱한 짓을 저질렀다. 상금을 받아서 갚을 요량으로 외상 술을 퍼마시고 구두와 바지도 하나씩 외상으로 맞췄다.
12월로 접어들면서 거리에 크리스마스 캐럴송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매일 성당에서 살다시피 했다. 갖가지 성탄절 행사들을 준비하는 일로 몸과 마음이 다 바빴다.
반드시 당선될 수밖에 없는 작품을 투고했다는 생각, 곧 신춘문예 당선 소식이 날아올 거라는 자신감이 나의 생활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그러나 불안감도 없지는 않았다. 하루하루의 꺾어짐은 두려운 긴장감을 안겨주기도 하였고, 그래도 아직 기다릴 수 있는 날들이 있다는 사실이 묘한 위안을 주기도 하였다.
드디어 12월 20일이 넘어선, 신춘문예 당선 통보가 날아올 즈음의 어느 날이었다. 확실한 날짜는 기억할 수 없지만 성탄절 전의 어느 날 밤에 나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참으로 선명한 꿈이었다.
큰 호수 맑은 물가에 삿갓을 쓴 한 선비가 앉아서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선비의 등뒤 둑 위에 앉아서 그의 낚시질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 선비는 고기 한 마리를 낚아 올렸다. 큼지막하고 튼실하게 생긴 물고기였다.
"어이, 그놈 좋다!"
선비는 좋아하며 그 보기 좋은 고기를 낚시에서 떼어낸 다음 옆에 있는 다래끼에 던졌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물고기는 다래끼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만 도로 물 속으로 풍덩 떨어졌다.
그 순간 나는 잠이 깨었다. 꿈이 깬 순간 잠도 깨어버린 것이었다. 뿐인가, 잠이 깬 바로 그 순간, 떨어졌구나! 라는 외줄기 생각이 내 머리를 때렸다. 골수 깊숙이 꽂히는 참으로 명료한 의식이었다. 나는 한동안 정신이 멍멍하고 온몸도 얼얼했다. 충격과 절망이 어둠 속에서 나에게 마구 손찌검을 해대는 것만 같았다.
12월 24일, 성탄 전야는 성당을 장식한 불빛으로 찬란하였고 분위기는 한껏 흥겨웠다. 갖가지 행사들을 진행시키고 사회를 보면서도 나는 나도 모르게 건듯건듯 수심에 젖곤 한 모양이었다. 내가 사회를 본 한가지 행사를 마쳤을 때 누이동생이 다가와 물었다.
"오빠, 신춘문예 또 떨어졌지?"
"왜?"
"표정에 나타나던데 뭘…."
"그래, 또 실패했다."
그리고 나는 동생에게 그 꿈 얘기를 들려주었다.
성탄절도 지나가고, 나의 마음은 더없이 쓸쓸했다. 성탄절 행사 준비를 하느라고 바빴고 또 행사를 치르느라 노고했던 나로서는 더욱 성탄절 이후의 그 갑작스러운 적막과 쓸쓸함이 가슴을 한없이 황량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참으로 허망하고 무의미하게 또 한 해 74년이 스러지는 세모의 어느 날 아침 밥상머리에서 가족들에게 며칠 전에 꾸었던 그 꿈 얘기를 했다. 그리고 틀림없이 최종심에서 떨어졌을 거라고 얘기했다.
1975년 1월, 1일. 나는 성당 사제관에서 중앙일보 1월 1일자 신년호를 보았다. 신춘문예 발표가 나와 있었다. 단편소설 당선 작품과 당선 작가의 당선 소감, 그리고 심사평도 나와 있었다.
단편소설은 총 580편이 응모된 가운데서 30편이 본심에 올려졌고, 그 중에서 7편이 최종심에 올랐는데, 최종심에서도 당선작으로 논의된 작품은 4편이었다. 당선권에 든 4편의 작품 가운데는 마심오(馬深梧)의 '저항아(低抗兒)'도 있었고, 그 작품이 심사 후기에 맨 먼저 언급되어 있었다.
나는 내 본 이름으로 응모하기가 왠지 부끄럽다는 생각으로 '마심오'라는 가명으로 응모를 했었던 것이다.
심사위원은 황순원(黃順元)·유주현(柳周鉉)·염무웅(廉武雄) 씨.
그런데 심사평을 자세히 보니 내 작품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힘은 대단히 좋으나 문장과 표현이 거칠다는 약점이 있었으며" 라고 외형적인 면에 관한 얘기만 있을 뿐 내용에 관한 언급은 없었다. 왠지 그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1월 말경 어느 날 나는 일 삼아 서울로 올라가서 심사위원 중에서 가장 젊고 말이 통할 것 같은 염무웅 선생을 수송동의 한 다방에서 만났다. 염 선생은 적이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고 아까운 작품이니 후일을 위해서 신문사에 가서 원고를 찾으라는 말을 했다.
나는 그 길로 중앙일보사로 가서 문화부 정규웅(鄭圭雄) 기자를 만나고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원고 더미 속에서 내 소설 원고를 찾아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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