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푸르고도 뜨거웠던 밤을 되새기며

지요하의 <참된 세상 꿈꾸기>

등록 2002.01.21 08:45수정 2002.01.21 10:36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는 2002년 1월 19일 밤을 평생 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수시로 즐겁게 기억하며 살 것이다. 내게는 참으로 의미롭고도 행복한 시간이었으므로….

나는 그날 밤 충청북도의 옥천 땅에 있었다. 옥천읍 브릴리앙스 호텔 대연회장에서 열린 언론개혁 운동가들의 모임인 '전국 물총 독립군 결의 다지기 대회'에 참석한 덕분에 옥천이라는 비옥한 땅의 맑은 공기를 장시간 호흡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난해 가을 대전성모병원에서 대장암 수술을 받으신 내 노모님의 '퇴원 후 1차 검진' 날짜와 '전국 물총 독립군 결의 다지기 대회'날짜가 18일과 19일로 연이어진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나는 하느님께 감사했다.

대전의 동생 집에서 머물며 18일 오후와 19일 오전에 어머니를 병원에 가서 몇 가지 검사 절차를 밟았다. 그리고 오후에는 삼형제 가족들을 모두 내 12인승 승합차에 태우고 엑스포 과학공원의 '꿈돌이동산'으로 가서 아이들을 실컷 놀게 해 주었다.

하루종일 아들 노릇, 아버지 노릇, 큰아버지 노릇을 충실히 잘하고 나서 가볍게 저녁 식사를 한 다음 아내와 함께 옥천으로 향했다. 술을 좀 마시게 될 것 같아서 차를 놓고 가기로 했고, 동부버스터미널까지 동생이 수고를 해 주었다. 7시에 출발한 버스는 45분 정도 달려서 옥천에 도착했다.

옥천 땅에 발을 내딛는 순간 나는 참으로 상쾌한 기분이었다. 난생 처음 밟아보는 옥천 땅이었다. 내가 진심으로 존경하며 동경해 마지않았던 땅이었다. '언론개혁운동'과 관련하는 일로 내가 처음 옥천 땅을 밟았다는 사실이, 평소 와보고 싶었던 곳에 드디어 잠시나마 몸을 놓게 되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흐벅진 기분을 갖게 했다.

버스 터미널의 풍경은 의외로 작고 초라하게 보였지만, 그것은 기차역이 있기 때문일 터였다. 읍단위 동네 한가운데에 걸출하게 서 있는 브릴리앙스 호텔의 모습은 이 고장이 알게 모르게 내실이 있는 고장임을 느끼게 해 주는 것 같았다.


일찌감치 대회장에 와 있는 분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나는 실내를 감싸고 있는 듯한, 수많은 천 조각에 쓰여진 언론개혁운동과 관련하는 갖가지 문구들―서예작품들을 감상했다. 옥천 물총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하고 있는 서예가 김성장 님의 작품들이라고 했다.

예정 시간인 9시가 조금 지난 시각에 대회가 시작되었다. 어느새 넓은 대회장은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전국 각지 각처에서 모여든 언론개혁운동의 일꾼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한가지 재미있게 느낀 것은, 남해 진주 부산 포항 대구 등 경상도 지역에서 오신 분들이 여타 지역에서 오신 분들보다 가장 많았다는 사실이다.


조만희 김성장 여인철 님의 사회로 1·2·3부로 나누어 진행된 대회를 올곧게 지켜보면서 나는 많은 감동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만큼 박수도 많이 쳤다. 그리고 영화배우 명계남 님의 인사말에서는 가슴 저미는 듯한 아픔도 느꼈다.

"대학교들을 포함하여 여러 곳을 다니면서 많은 청중들 앞에서 언론개혁의 당위성에 관한 내 나름의 지론과 철학들을 열심히 설파했지요. 수많은 사람들과 뜨거운 인사도 나누었지요. 그렇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는 무거운 고독을 체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저 바쁜 생활에 쫓기며 살아가는 사람들, 언론개혁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조차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 속에서 막막한 한계와 절망을 느낀 적도 많습니다. 그리고 이제 성년이 된 내 아이들이 아버지의 이런 활동을 보면서 현실적인 불리를 걱정하는 상황도 겪곤 합니다. 하지만 나는 내 아이들이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이 운동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명계남 님은 "우리가 이제는 '물총'보다 더 위력 있는 '무기'를 가져야 하고, 또 그럴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해서 많은 박수를 받기도 했다.

나는 김동민 전정표 정지환 명계남 화덕헌 장문화 성유보 오한흥 김지철 님을 비롯한 여러 지역 대표들의 인사말이나 '활동 발표'들을 들으면서 틈틈이 시 한 편을 지었다. '오늘 이 장엄한 자리에 참석한 내 나름의 가장 확실한 표를 한번 내보자'는 생각에서이기도 했지만, 참으로 시를 짓고 싶은 마음이었다.

드디어 나는 마이크가 있는 곳으로 나가서 우선 간단한 인사말부터 했다.
"어르신 님들도 계신 자리에 모자를 쓴 채로 인사를 해서 죄송스럽습니다. 저는 모자를 벗으면 전두환 씨와 거의 비슷한 상태가 됩니다. 저는 군에서 제대를 한 해부터 삼십 년 가까이 모자를 써오고 있습니다만, 그리고 과거에는 모자를 벗고 있는 때도 많았습니다만, 1980년 전두환 씨가 출현한 때부터는 여간해서는 모자를 벗지 않습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는 이 자리의 분위기가 좀더 비장하고 아름답게 이어질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리고 싶은 뜻을 말한 다음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소설을 흉내내는 사람일뿐 시인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모국어로 빚어진 의미롭고도 아름다운 시들을 한때는 백수가 넘게 암송했을 정도로 시를 사랑합니다. 세월과 함께 거의 잊고 지금은 겨우 삼십 편 정도가 내 머리 속에 남아 있습니다만, 이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이면서 비장감으로 볼 때 오늘의 이 자리와 가장 잘 어울릴 법한 이육사 님의 시 <광야>를 낭송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지은 '즉흥시' 한 편을 발표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우선 이육사 님의 시 <광야>를 낭송했다. 내가 저 청년 시절부터(월남의 정글에서부터)수십 년 동안 가장 즐겨 애송해 온 시였다. 장내의 모든 분들이 내 시낭송을 잘 감상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어서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지은 일종의 즉흥시를 낭독했다. (그 시를 여기에 소개해 보기로 한다.)


양심꽃들의 만남, 빛나는 결의와 단합을 보며
―전국 물총 독립군 결의 다지기 대회 자리에서


누가 나로 하여금
올바름을 소망케 하였나
누가 나로 하여금
옳음의 세계를 꿈꾸게 하였나
누가 내 눈을 크게 뜨게 하고
귀를 활짝 열게 하고
생각을 올곧게
옹골차게 하도록 이끌어 주었나
때로는 내 삶이 외롭고 고통스럽기도 해서
또 때로는 나 자신이 불쌍하고 이상스럽기도 해서
눈감고 생각해 보았네
눈감으면 내 눈망울의 어둠 속에서
영롱한 별빛처럼 보이는 것
그것은 언제나 내 앞길을 비추어 주는
가슴속의 양심이었네
애오라지 나는
내 양심을 덤불 속에 묻어두지 않으려 했고
내 양심에 부끄럽지 않으려 했고
나 자신에게 비겁하지 않으려 했고
나 자신에게 우둔하지 않으려 했고
나 자신을 속이려 하지 않았네
아, 내가 사랑해야 할 나의 양심이여
스스로 눈물겹도록 가꾸고 보살펴야 할 양심이여
혹여 너무 순진한 양심이지는 않을까
오도되고 편협한 양심은 아닐까
외곬 독선의 양심은 아닐까
끊임없이 반문하고 되새기며
애써 갈고 다듬어 온 내 양심
늘 내 신앙의 거울이기도 한 양심이여
나로 하여금 더욱 뜨겁게 하느님을 바라게 하고
옳음과 분별에 대한 내 신념을 더욱 굳세게 해 주는
가엾고도 소중한 나의 양심이여
내가 내 양심을 사랑했으므로
21세기 초엽의 그 어느 날
나와 똑같은 양심들을 보았네
아, 그리하여 나는
새로운 소망의 세계를 보았네
내가 진정으로 내 꿈을 사랑했으므로
꿈에 날개를 달고
언론개혁운동의 성지인
옥천(沃川)으로 날아왔네
축복의 땅 옥천이여
영원토록 땅의 기름짐이 흘러 넘칠
이 고장에 모이신 진옥(眞玉)의 양심들이여
오늘 우리의 소망과 양심을 확인하고 되새기며
이 자리의 튼실하고도 탐실한
결의와 단합의 날개를
한반도 삼천리를 향해 힘껏 펴시라!
흐벅지고도 가멸진 마음으로!

(옥천읍 브릴리앙스 호텔 대 연회장에서, 2002년 1월 19일 밤 자정 무렵에 낭송)



많은 분들이 내게로 와서 감사를 표했다.
나 다음에 세 분의 지역 대표들이 인사말과 활동 발표를 했고, 이어서 본격적인 뒤풀이 순서가 진행되었다. 생각 같아서는 밤새도록 여러분들과 정담을 나누며 대작을 하고 싶었지만, 대전 동생네 집에 계시는 어머니를 모시고 (온 가족을 태우고) 먼길 운전을 하려면 좀 일찍 몸을 빼고 눈을 좀 붙여야 했다.

우리 부부는 새벽 2시경 대전으로 돌아가시는 두 분을 따라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 아쉬움과 미안한 마음이 컸지만, 참으로 좋은 느낌들이 내 가슴에 가득함을 느낄 수 있었다. 푸르고도 뜨거웠던 시간이었고, 아름답고도 장엄한 밤이었음을 나는 스스로 즐겁게 되새기며 옥천을 떠날 수 있었다.

벌써부터 그 모든 분들이 그리워지는 것을 느끼며 이 글을 썼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추석 앞두고 날아드는 문자, 서글픕니다 추석 앞두고 날아드는 문자, 서글픕니다
  2. 2 "5번이나 울었다... 학생들의 생명을 구하는 영화" "5번이나 울었다... 학생들의 생명을 구하는 영화"
  3. 3 개 안고 나온 윤 대통령 부부에 누리꾼들 '버럭', 왜? 개 안고 나온 윤 대통령 부부에 누리꾼들 '버럭', 왜?
  4. 4 추석 민심 물으니... "김여사가 문제" "경상도 부모님도 돌아서" 추석 민심 물으니... "김여사가 문제" "경상도 부모님도 돌아서"
  5. 5 계급장 떼고 도피한 지휘관, 국군이 저지른 참담한 패전 계급장 떼고 도피한 지휘관, 국군이 저지른 참담한 패전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