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장수의 누추가 빛나던 겨울밤

방민호의 <문화칼럼>

등록 2002.01.23 15:02수정 2002.01.23 22:48
0
원고료로 응원
작년에 두 번이나 거처를 옮긴 끝에 겨우 정착한 곳이 서교동의 한 예식장 건물 뒤편이다. 신촌에서 양화대교로 통하는 중간 지점이 바로 서교동 대로변(大路邊), 그곳에 내 새 주소가 있다.

10차선쯤 되는 큰 길가에 예식장이 있고, 그 옆 골목으로 들어가 10미터쯤 가면 불밝힌 편의점이 있고, 그곳을 스쳐지나자마자 왼쪽으로 꺽어들면 새로 얻은 거처가 보인다. 밤 늦게 귀가해도 골목을 이리저리 틀어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 도심에 사는 한 가지 이점이라면 이점이라고나 할까?


며칠 전에도 나는 한밤 도시의, 한적하면서도 겨울답게 싸늘한 기운을 느끼며 귀가하고 있었다. 겨울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 몸에 열이 많은 탓인지 남들 다 춥다는 웬만한 날씨쯤은 끄떡도 하지 않는 나였다. 다만 머리에 맑은 기운이 퍼져 상쾌할 뿐이니 차가운 겨울 밤이 생각으로 병 깊은 내게는 차라리 명약이었다.

달밤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렇게 겨울밤을 희롱하며 귀가하고 있었다.
예식장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과일 파는 트럭이 보였다. 트럭 꽁무니에 등을 밝혀 놓아서 1톤 트럭 짐칸에 수북히 쌓인 노란 밀감들이 정겹게 느껴졌다.

한겨울 밤 늦게 귀가하시던 아버지가 큼지막한 노란 밀감을 사다주시던 옛날 생각이 났다. 이제 열 살이 되는 사내아이를 키우는 나는 그러면 옛날의 그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뜻일까?

'내가 그런 자애스러운 아버지가 될 수 있을 리 없지. 다만 오늘밤은 그 아버지의 시늉이라도 해야겠다.'

그런데 응당 과일 짐칸 옆에 서 있어야 할 과일장수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 어디 갔나 했는데 운적석에 흐릿한 불이 켜져 있었다. 유리창 안으로 중년의 마른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노크소리에 고개를 든 남자가 차문을 열었고 나는 그 남자가 열중해 있던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노트에는 그가 쓰고 있던 한자들이 빼곡했다.


나는 비닐 봉투에 과일을 담아주는 그의 행색을 살펴보았다. 영낙없는 중년의 과일장수임은 틀림없는데, 그러나 그는 또한 분명히 한문공부를 하고 있었다.

한밤의 과일장수가 손님을 애써 찾지 않고 운전석에 불을 밝히고 앉아 있는 상황을 납득하는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게 무슨 이상스러운 일은 아니지 않는가.


지식을 축적하는 일이 경시당하고 지식인이 비난과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중에도 이렇게 공부를 하는 이들은 있는 법이었다. 그리하여 이렇게 한껏 책을 멀리하고 한밤의 취기 속에서 달빛이나 즐기고 있는 나를 은근히 꾸짖음이었다.

'며칠 전 불교 서점에 들러 사놓은 책은 오늘도 방구석에 처박혀 먼지나 덮어썼군.'

집으로 꺽어드는 골목은 어두웠다. 비닐 봉지에 든 밀감은 무거웠다. 생활의 습성에 밀리는 삶이 두려웠다. 지식이 녹슨 지식인이란 한갓 누추에 불과했다.

고개를 숙이고 계단을 올라가던 내 눈에 비친 나의 헌 구두는 그 과일장수가 아무렇게나 신고 있던 슬리퍼보다도 초라했다. 과일장수의 누추가 빛나던 밤이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새벽 3시 편의점, 두 남자가 멱살을 잡고 들이닥쳤다 새벽 3시 편의점, 두 남자가 멱살을 잡고 들이닥쳤다
  2. 2 "독도 조형물 철거한 윤석열 정부, 이유는 '이것' 때문" "독도 조형물 철거한 윤석열 정부, 이유는 '이것' 때문"
  3. 3 방치된 폐가였는데 이젠 50만명이 넘게 찾는다 방치된 폐가였는데 이젠 50만명이 넘게 찾는다
  4. 4 일본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어떤 관계일까 일본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어떤 관계일까
  5. 5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