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국에서 빛나는 침묵을 생각하다

방민호의 <문화칼럼>

등록 2002.01.16 09:39수정 2002.01.16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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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나는 타일랜드 방콕에 있는 에메랄드 사원 앞에 서 있었다.
18K 금도금을 했다는 황금빛 탑과 중국 청대의 울긋불긋 화려한 유리장식을 한 사원의 벽과 옥불을 모신 법당과 과히 넓지 않은 사원을 가득 메운 숱한 인종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다고 화려한, 또 빛나는. 그러나 그 사원은 약 200년 안쪽의 건물이라고 했던가. 그곳 라마 왕가는 1세부터 9세까지 약 200년 된, 연원이 길지 않은 혈통이라고 했던가. 그래도 이방인들은 이 오래된 관광국가의 드넓은 수도에 자리잡은 왕가의 사원에 찬탄을 금치 못하면서 사진을 찍는데 여념이 없었다. 사원에는 법당답지 않은 현란한 아름다움이 가득차 있었다.


나 역시 에메랄드 사원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있었는데…그런데 그러다 홀연히 떠오른 것이 두고온 한국 서울의 비원이었다.

오, 겨울의 비원! 무채색의 와당과 말 없는 수목과 부용정의 연꽃들! 소음의 도시 한 가운데 높은 담을 둘러치고 앉은 침묵의 소도!

그 빛나는 침묵은 에메랄드처럼 화려하지 안되 깊고 그윽하지 않았던가. 겨울의 비원, 그 영원의 영토에 들어 눈꽃으로 얼음꽃으로 맺힌 침묵을 영접하리라.

에메랄드 사원에는 서양인들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옥으로 만든 부처를 모신 사원을 에메랄드 사원이라 부르는 그들은 먼, 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정심에 놓인 침묵의 '사원'을 알지 못하리라. 내 마음 한가운데 그것이 있으니 나는 이 현란하고 풍족한 이방의 수도에 마음을 다 주지 않아도 되리라.

한국의 5월 하순을 닮은 따뜻한 남국의 겨울 속에서 희디 흰 눈 쌓인, 두고온, 빛나는 침묵의 공간이 그리워 나는 이방의 문화에 대한 찬탄을 오래 지속시킬 수 없었다. 그것, 그 침묵의 공간이 바로 마음의 국경, 방랑벽 센 나를 그래도 이 작은 반도의 나라에 영원히 잡아둘 마음의 국경이었다. 국경 앞에서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오늘은 시청 앞에서 일을 본 후 비원에 가야겠다. 그 무채색 침묵의 공간에 들어 흐트러진 겨울을 추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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