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들 한 서린 '통곡의 미루나무'

[문화유산답사18] 35만명 거쳐간 서대문 형무소

등록 2002.03.14 19:59수정 2002.03.18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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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퀴즈가 인기인가 보다. TV를 보나 인터넷을 항해하거나 어디서든 크고 작은 퀴즈대회들이 인기인 것을 보니. 그럼 이번 답사도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퀴즈로 시작해 보자.

<문제> 다음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거쳐간 곳은?
1) 삼일운동 독립선언서의 첫 번째 서명자 손병희 선생
2) 아우내 장터의 만 15세 소녀 유관순 열사
3) 윤봉길 의사
4) 민중당 조봉암
5) 박정희와 그를 쓰러뜨린 김재규
6) 현 대통령 김대중
7)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
8) 드라마 '모래시계'의 태수

정답은 이번 답사의 목적지이기도 한 '서대문 형무소'이다. 대한제국 말기 전옥서(典獄署)로 시작된 이곳의 역사는 1904년 '경무청감옥서'로 바뀌고 이후 1908년 10월 21일 '경성감옥'으로 개칭되면서 현재의 무악재로 옮긴이래, '서대문 감옥'이나 '경성 형무소', '서울 형무소', '서대문 구치소', '서울 교도소', '서울 구치소' 등으로 이름을 달리하며 1987년 11월 15일까지 계속된다.

약 80년 동안 35만여 명의 사람들이 이곳을 거쳐가게 되는데, 일제 시대에는 주로 민족지도자들과 독립운동가들이 수감·처형되어왔고, 4·19혁명 이후에는 정치인이나 기업인들, 군인, 재야인사, 학생운동을 하던 학생들 및 흉악범이나 대형 범죄자들이 주로 거쳐가게 된다.

서대문 형무소는 근대적 의미에서의 한국 최초의 감옥으로 한때 3200 명이나 수용할 수 있던 대형 감옥으로 우리 역사와 슬픔을 함께 해온 곳인데, 조선 독립을 위한 항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짐에 따라 이들을 수용할 시설을 필요로 하던 일제는 전국 8개 감옥의 수용 가능 인원이 3백여 명이었던 수준을 감안할 때 놀랍도록 큰, 즉 일개 감옥의 수용 인원이 5백여 명이나 되는 감옥을 짓게 된다. 바로 경성감옥이다.

이후 수용 능력이 점차 한계에 달함에 따라 공덕동에 감옥을 하나 더 짓게 되고, 이곳 서대문 형무소에는 일제가 소위 정치범이나 사상범으로 부르던 독립 투사들이 주로 수용되게 된다. 그러던 것이 독립운동의 열기가 최고조에 이르던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수용인원 약 3천 명의 감옥으로까지 확장되게 된다.

이처럼 우리의 슬픈 역사를 함께 헤쳐온 서대문 형무소는 1992년 8월 15일 '서대문 독립공원'내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으로 바뀌어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일단 서대문 형무소에 가자면 지난번에 찾았던 독립문과 같은 지하철역인 지하철 3호선 독립문 역에서 내려 안내판을 따라 나가면 바로 갈 수 있다. 붉은 담장과 험악스런 분위기가 풍기는 감시탑, 남자와 여자 및 병자를 위한 감방들, 사형장, 강제 노역을 위한 공장, 교회당 등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서대문 형무소는 처음 만나게 되는 매표소에서부터 감옥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이전에는 감시탑 아래 경비원들이 있었을 만한 작은 방에서 표를 팔고 있는데 거기서 그리 비싸지 않은 표를 사서 철문으로 된 입구에 들어서면 이전에 보안과 청사로 쓰였던 건물이 나온다. 지금은 지상 2층, 지하 1층에 걸쳐 '추모의 장'과 '역사의 장', '체험의 장'이 만들어져 답사객들에게 일제 시대 때의 서대문 형무소 모습을 사진과 글, 터치스크린 등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안내를 하는 공익근무요원들의 자세가 다소 뻣뻣하고 전시 방법이 집중력을 분산시킨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자료들이기에 시간이 아무리 걸려도 천천히 돌아본다.

화살표 방향을 따라 돌아보다 보면 언제인가 싶게 보안과 청사를 나와 중앙사 앞에 서게 된다.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져 암울한 분위기가 더한 중앙사로 들어가 텅 빈 감방들을 보며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통로가 모두 만나는 곳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은 중앙사와 10옥사, 1옥사, 12옥사가 만나는 곳이다.

조금만 보아도 수감자들의 감시를 원활히 하기 위해 건물 자체를 'T자' 형으로 지었을 뿐만 아니라 1층과 2층 사이의 복도 윗부분을 터 감시의 눈길을 한층 강화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감시가 엄격하고 관리인들의 탄압이 악랄했던 것도 수감자들에게는 고통이었겠지만 시설 부분에 있어서도 수감자들에게는 고통의 연속일 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08년 전국에 걸쳐 8개의 감옥을 만들었을 때 시설을 갖추었다고 하던 서대문 형무소를 제외하고는 불완전한 온돌 감방이 두세 개 정도였고, 그나마 서대문 형무소도 일제의 독립운동자 및 민족 지도자들을 막무가내로 잡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수용한계에 다다라 평당 7.9명이 수용되어 잠잘 공간마저 부족해 1/2나 1/3씩 교대로 잠을 자게 했다고 한다. 물론 용변시설이나 급수시설 등은 기대할 처지도 못되어 거의 짐승 우리와 같았다고 하니 더 말해 무엇하랴.

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먹을 것이 없어 고생하던 시기에 감옥에서의 가장 큰 문제도 아무래도 식량 문제가 아니었을까. 실제로 쌀 약 10%에 보리나 조 50%, 콩 40%로 이루어진 급식을 했고, 특히 일제에 의해 악질로 분류되던 이들에게는 그 양을 반으로 줄여 배급했다고 한다. 더 나아가 일제 말기에는 태평양전쟁에서 겪는 어려움으로 인해 콩 대신 콩깻묵이 지급되었고 이후에는 이 마저도 배급이 되질 않아 상당수의 수감자들이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중앙사에서 12옥사를 거쳐 밖으로 나오면 앞쪽 울타리 넘어 주차장이 보인다. 원래 그곳엔 수감자들에게 노역을 시키기 위한 공장이 있었으나 현재는 보는 바와 같이 주차장으로 변모해 있다.

거기서 왼쪽으로 돌아 얼어붙은 연못을 지나면 병영이 있던 터를 오른쪽으로 기고 있는 13옥사, 즉 공작사를 만날 수 있다. 공작사 역시 수감자들에게 강제 노역을 시킨 장소로 군부대나 관공서 등에서 이용할 관용물품을 만들었으며, 특히 제 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군수품을 만드는 데 역량을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공작사를 지나 조금 걷다 보면 오른쪽 언덕 위로 건물이 하나 아담하게 서 있는 것이 보인다. '한센병사'라고 불리는 이 건물은 특히 수감자들 중 나환자들이나 전염병자 등을 따로 격리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세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그 한센병사 뒤로는 서대문 형무소 정문에서 본 것과 비슷한 감시탑이 아직도 남아 있어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더해준다.

이제 다시 아래로 내려와 오던 방향으로 계속 걷자. 그럼 나지막한 모양의 추모탑 한 기가 사람들을 맞아준다. 이는 일제 시대에 수감되었던 독립투사 들 중에서 형장의 이슬로 스러져 간 순국선열들을 추모하기 위한 비로, 현재는 자료에 의해 고증된 이들의 이름만이 적혀 있어 앞으로 사료 발굴에 따라 그 비에 쓰여질 이름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서대문 형무소 답사에서 가장 숙연해졌던 사형장을 둘러볼 차례다. 추모비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큰 미루나무 한 그루가 불긋한 담장 옆에 서 있는 것이 보이는데, 그 담장 안쪽으로 나무로 만들어진 사형장이 있다. 특히 그 미루나무를 유심히 살펴보자면, 일명 '통곡의 미루나무'라고 부르는 것으로 처형수들이 사형을 당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잠시 통곡을 했다는 나무이다.

특히 담장을 사이로 두고 안쪽에도 역시 미루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어찌 된 영문인 지 이 안쪽의 미루나무는 바깥쪽의 그것에 비해 볼품없이 말라 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사형수들의 한이 서려 있어 그렇다고 하는데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사형장은 당시 전국 각지에서 사형 선고를 받으면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어 사형을 당한 곳으로, 사형수가 앉는 의자와 동아줄, 배석자들을 위한 긴 의자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사형장의 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오던 방향 그대로 담장을 나가면 한 구석에 작은 철문이 있는 것이 보인다. 굴같이 보이는 것이 분명 제대로 된 출입문은 아닌 듯 싶다. 일제는 사형집행을 한 다음 시체를 밖에 내다 버릴 필요가 있었는데, 그러한 목적으로 뚫은 것이 바로 이 굴이다. '시구문'이라도 불리는 이 통로는 일제 말기 일본인들에 의해 폐쇄되었으나 1992년 길이 40m로 복원되었다.

서대문 형무소를 돌아봄에 있어 마지막으로 갈 곳이 여성 수감자들을 위한 옥사이다. 지금은 대부분의 건물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근래에 만들어진 지상 구조물로 보호받고 있는 지하 감방만이 남아 있다. 일제는 이처럼 지하에 중요한 수감자들을 따로 수용하고 온갖 고문을 했는데 1934년 옥사 증축과 함께 매립되었던 것을 근래에 들어 복원한 것이다.

특히 이 곳 지하감방은 당시 이화 학당에 다니다 휴교령이 내리자 고향인 천안 병천으로 내려가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유관순 열사가 순국한 곳이라 '유관순 굴'이라고도 부른다.

일단 서대문 형무소를 둘러보는 일에 있어서의 역사적 배경은 일제 시대가 될 것이다. 일제 시대에 시대의 흐름은 점차 일제와의 타협으로 향하고 있을지언정 이에 휩쓸리지 않던 투사들은 있었고 이들의 한이 서린 곳이 서대문 형무소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 볼 문제가 하나 있다. 서대문 형무소를 역사관이라는 이름 아래 복원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것은 이처럼 일제 시대의 굽힐 줄 모르는 애족의 역사라 하지만, 서대문 형무소는 광복 이후 우리의 현대사와 함께 해온 구절이 많다.

아니 1987년까지 서울형무소와 서울교도소, 서울구치소라는 명칭으로 유지되어 온 서대문 형무소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에 사회주의 활동을 한 박정희가 수감되었던 곳일 뿐만 아니라 현 대통령인 김대중씨 역시 이곳에 투옥되었던 전례가 있으며, 이름 모를 수많은 민주 열사들이 거쳐간 곳이다.

즉 일제 시대 우리 민족과 함께 해온 서대문 형무소는 싫든 좋든 현대의 역사와도 뗄래야 뗄 수 없는 관련을 맺은 채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그런데 직접 서대문 형무소 답사를 해보면 알겠지만 그 어디에도 광복 이후의 서대문 형무소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 있는 것은 없다. 그 흔한 팸플릿마저도 그저 광복 이후의 서대문 형무소에 대해서는 명칭의 변경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광복 이후의 사건들에 대해서는 아직 역사적인 평가가 내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판단은 답사자들이나 시민들이 할 일이지 역사관에서 아예 처음부터 '친절하게' 그것을 위해 애써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아무래도 현대사 부분에 대해서는 누가 나설 용기가 없어서 그랬다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별의 노래 (김광섭作)

나는야 간다
나의 사랑하는
나라를 잃어버리고
깊은 산 묏골 속에
숨어서 우는
작은 새와도 같이

나는야 간다
푸른 하늘을
눈물로 적시며
알지 못하는
어둠 속으로
나는야 간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www.SNUnow.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www.SNUnow.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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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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