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들이 산성으로 갔던 까닭은

[문화유산답사17] 한양 동쪽 방어기지 '남한산성'

등록 2002.02.16 09:46수정 2002.02.18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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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14년인 1636년 12월 2일 후금 태종은 나라 이름을 청(淸)이라 바꾼 뒤 만주족과 한족 등으로 이루어진 10만의 병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넘게 된다. 바로 병자호란이다. 정묘호란이 있은 지 채 10년도 되지 않은 때에 생긴 변란이니 조선에서는 방비를 게을리 하지는 않았을, 아니 게을리 하지 말았어야 할 시기일 것이다. 그러나 국경에서부터 국가의 위기를 알렸어야 할 봉수는 오르지 않았고, 조정에서 청의 침공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열 사흘이 지나서였다. 비로소 조선 5백년의 비극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당시 조선의 수도 한양(서울)은 네 방향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었다. 서쪽의 강화도는 고려 때부터 몽고족이 침략할 때면 으레 왕가가 피신을 했던 곳이니 두말할 필요가 없을 테고, 강화도 이외에 북쪽의 개성과 남쪽의 화성이 있고, 이번에 답사할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은 서울의 동쪽을 방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던 곳이다.

수도를 방비하던 곳 답게 남한산성은 산성으로서의 구비조건을 잘 갖춘, 어쩌면 거의 완벽하리만큼 그 조건이 우수한 산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성안에 80여 개의 우물과 45개의 샘이 있어 사시사철 물이 마를 날이 없었고 논과 밭이 한때 124결이나 되었다는 점, 주변 지형에 있어서도 산성의 바깥쪽은 적이 기어오르기 힘들 정도로 가파르지만 안쪽은 완만해 생활이나 수성 측면에서 유리하다는 것 등은 산성의 기능 중에서 장기 농성을 가능케 하는 훌륭한 요건을 충족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히 규모 면에서도 고려 시대의 경우 예외가 있긴 하지만 성안에 주거하던 사람들도 많았는데 남한산성이 세워진 뒤 인조 17년인 1639년에 처음 시행된 군사 훈련에 참가한 인원만도 1만2700명이나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장정의 수만 헤아린 것이니 실제 인구는 훨씬 많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남한산성이 인구에 회자되는 시기가 조선 인조 때의 병자호란 전후로 한정되지만, 기실 남한산성의 역사를 알고자 한다면 그보다 훨씬 이전인 백제의 온조왕 시기로 올라가야 한다. 남한산성 주변 지역에서 백제 초기의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고려사'와 '세종실록'의 지리지 부분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때부터 '남한산성'이라 불린 것으로 보인다.

한편 신라의 '삼국사기'에도 남한산성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한산에 주장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 보'라는 것이 그것이다. 당시의 척도는 송척이었을 것이므로 이를 셈하면 그 둘레는 약 8100 미터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는 실측을 통해 알게 된 7500여 미터와 오차를 고려한 범위 내에서 근사한 수치로 풀이되며, 당시 한산은 지금의 광주 일대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주장성이 남한산성이었을 것이라고 학계에서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후 고려 시대 때에는 별다른 사항이 보이진 않지만, 조선의 인조 시기 이후 일제시기에 들어서도 남한산성은 우리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애초에 남한산성의 축성 및 보수 등을 위해 세워진 장경사나 국청사 등의 사찰을 중심으로 진행된 독립 운동가들의 무기 제조나 근거지 역할은 일제에 미친 영향이 미미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한국전쟁 시기에는 '제 2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사회주의자들에게 있어 해방공간의 역할을 톡톡히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사실에 기반할 때 남한산성이 비단 조선시대의 병자호란 뿐 만 아니라 한반도에 역사의 둥지를 튼 역대 왕조 및 민초들에게 있어 중요한 산성이었단 사실이 과장만은 아닐 것이다.

일단은 이 정도 사실만 주지하고 답사를 시작하기로 하자. 솔직히 답사를 함에 있어 사전정보를 알고 가는 것이 유익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그것에 얽매여 오히려 답사를 방해할 때도 있으니 말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맑던 하늘에서 갑자기 싸리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함박눈이 되어 시야를 가릴 정도가 된다. 하지만 눈 내리는 산성이 그렇게 매력적이란 사실을 여태껏 알지 못했다. 기대하지 못한 소득이다.

한창 복원공사가 진행중인 행궁은 '남한행궁'이나 '광주행궁'이라 불리는데 이번 답사를 시작하는 곳이다. 남한산성이 수도에 가까운 곳에 있는 대규모 방어용 산성이었던 만큼 이곳엔 행궁도 마련되었는데 당시 상궐과 하궐 합쳐 5천 평 규모로 상궐이 73칸, 하궐이 150여 칸이었던 것이 세월의 흐름과 함께 사라졌다가 요즈음 들어 시작한 상궐 복원공사를 통해 그 모습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

특히 상궐 터에는 아무 때나 찾아가도 주춧돌 흔적을 살펴볼 수 있어 특기할 만하며, 종묘에 해당하는 좌전과 사직에 해당하는 우실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눈이 와서인 지 한적하기만 한 행궁을 둘러보고 있노라면 힘없는 나라의 왕으로서 이곳에 짐을 풀고 청에 대한 결사항전의 의지를 북돋던 인조의 애처로움이 느껴져 온다.

남한산성에서 가장 크고 잘 보존되어 있는 서장대에 오르기 위해서는 눈으로 미끄러운 길을 걸어야 했다. 행궁 복원공사 현장을 빠져 나와 왼쪽으로 나 있는 아스팔트길을 조심스레 올라 보자. 이내 아스팔트길을 끝이 나고 솔잎이 깔린 오솔길이 나타난다. 다소 가파른 오솔길을 한참 오르면 좌우로 길게 이어진 성벽을 만나게 되고 여기서 왼쪽으로 돌아 한참을 더 오르면 역시 왼쪽 위로 담장을 길게 드리운 건물들이 나타나는데 바로 청량대와 서장대이다.

청량대는 남한산성을 개축할 당시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 이회와 그의 부인 등을 위해 지은, 일종의 사당이다. 물론 산성이 그 혼자만의 힘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리만큼 안에는 다른 공로자들의 초상도 봉안되어 있었다고 하나 한국전쟁과 함께 사라졌다고, 안내판은 전하고 있다.

이회는 당시 성벽의 동남쪽 구역 축성의 책임자였는데 그의 공적을 시기한 무리의 모함에 의해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교수형을 당하면서 자신은 무고하다며 만약 자신에게 죄가 없다면 죽임을 당하는 순간 매 한 마리가 날아들 것이라고 예언했다 한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그가 교수형을 당하는 순간 매 한 마리가 날아왔다고 하는데, 그 매가 앉았다는 바위인 '매바위'가 서장대 마당의 한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다.

청량대에서 한 단을 오르면 바로 매바위가 있는 서장대 구역이다. 남한산성에서 장수가 지휘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진 서장대는 남한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인 청량산 정상에 자리한 채 답사자들을 맞고 있었다. 원래는 산성의 각 방위마다 장대가 있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서장대가 유일하다. 원래 단층 건물이었던 것을 정조 연간에 2층으로 고쳐 지으며 안쪽에는 무망루, 바깥쪽에는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걸었는데, '무망루' 편액은 서장대 마당 한편에서 누각에 의해 보호된 채 홀로 남아 있다.

무망루 편액 주변엔 이곳까지 직접 행차한 이승만 전 대통령이 기념으로 심었다는 나무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닮다 만 기념비 한 기가 어울리지 않게 서 있는데, 그때는 어디라도 최고 통치자의 입김이 미쳤는지 이곳 주변의 길 중 하나는 한때 이승만 전 대통령의 호를 따 '운남로'라 불렀다 한다. 하긴 한때긴 하지만 남한산성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던 때가 있었으니 그에 대한 보답으로라도 길 이름을 그렇게 고쳐 불렀을 법도 하다.

남한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것이 서장대인데 그것을 살펴보았으니 이제는 천천히 내려갈 차례이다. 올라온 성벽을 따라 계속 내려가면 서문에 이르게 된다. 서문에 이르는 길은 박석 받침에 완만하나 경사가 있으니 눈에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발걸음을 여느 때보다 더욱 조심한다. 마침 눈도 오고 하니 설경도 즐길 겸, 걷는 둥 마는 등 한참을 걷다 보면 단층 지붕을 하고 있고 홍예가 무척이나 아담하게 다가오는 서문에 다다르게 된다.

남한산성의 성문은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드물고, 암문만 해도 14개 정도가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는 것이 몇 되지 않는다. 서문에서 길을 90도 꺾어 이번엔 성 안쪽으로 내려가자. 조금 가다보면 기왓장을 가지고 담벽을 만든 절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국청사다.

국청사는 장경사와 동림사, 개원사 등과 함께 남한산성의 유지 및 보수, 승병들의 생활을 위해 지어진 7개 사찰의 하나로 일제 시대 때는 천장 안에서 화약을 만들기도 했는데, 원래의 위치에서 북쪽으로 140m 정도 떨어진 곳에 다시 지은 절이다.

당시 남한산성을 쌓기 위해 이미 있었던 망월사나 옥정사를 포함한 9개의 사찰이 동원되었는데 승려들은 이들 사찰에서 집단 생활을 하며 산성 축조 및 유지, 보수에 동원되었고 전투원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했다. 그 중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장경사 하나 뿐인데, 대부분이 현재 남아 있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일제 시대 때 일본인들이 폭파시키는 소리를 들었다는 증언도 나오고 있다.

한편 남한산성에 갔으니 시간이 넉넉한 답사자라면 9개 사찰 중 유일하게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장경사도 직접 둘러보고 군사들이 무예를 갈고 닦는 연무관,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끌려간 삼학사 오달재, 윤집, 홍익한을 기리기 위한 현절사 등을 둘러보는 것도 권할 만하다.

답사를 돌이켜 볼 때 남한산성과 관련해 병자호란이라는 사건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도 당시 승병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듯 하다. 일단 남한산성 자체가 국가의 계획에 따라 승병들이 주력이 되어 만들어졌음은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종교적 수행에 정진했어야 할 그들이 축성이나 산성 보수뿐만 아니라 직접 창칼을 들고 싸우는 전투원으로서 활약했다는 사실을 보며 종교가 정치에 의해 휘둘렸던 혹은 함께 물고 물리던 중세의 십자군이 떠오르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 물론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나 그의 제자 사명대사, 처영대사 등 스스로 분연히 떨쳐 있어났다고 '전해지는' 승려들도 있지만 왜 그들이 피 튀기고 살점이 묻어나는 전쟁터까지 갔어야만 했을까.

당시의 종교가 호국의 내용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전공자가 아니니 알 바가 없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그들이 그곳으로 나가야만 했던 상황을 직·간접적으로 조성한 위정자들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조선시대의 경우 억불숭유정책에 따라 승려들은 갖가지 억압을 받게 되는데, 이것에서 더 나아가 힘이 많이 드는 노역 등의 일이 있으면 으레 그렇다는 듯이 우선 승군의 노동력을 이용했다. 이 같은 착취가 또 있을까. 조선의 역사를 보면 직접 나서 싸워야 할 관군의 활약상은 별로 보이지 않고 그저 승병이나 의병들의 승전보뿐이다. 특히 각종 미디어들에서는 승군에 대해 신라의 화랑정신이 발현한 한 모습이며 자랑스런 호국의 역사라 자찬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이는 부끄러운 역사의 한 단면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마도 나라의 장래와 민초들의 생활에 대한 고민으로 하루가 바빴어야 할 위정자들이 '업무태만'으로 인해 화를 불러 왔을 때 이에 대한 고통을 아랫사람들에게 떠넘기고 이용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는 듯 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www.SNUnow.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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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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