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주의'를 헐고 '자주독립'을 짓다

[문화유산답사16] 독립공원 차례로 둘러보기

등록 2002.02.07 19:40수정 2002.02.14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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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3호선에 속한 역들 중에 경복궁역 지나 독립문 역이 있다. 말 그대로 출구를 빠져나가자마자 조금만 수고하면 금화터널 쪽으로 우뚝 서 있는 독립문을 찾을 수 있는데, 특히 이곳은 독립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어 답사의 목적인 독립문뿐만 아니라 영은문의 주춧돌과 독립관 등도 발품을 그리 들이지 않고 둘러볼 수 있다.

독립문은 익히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그 이름에서도 쉽게 유추할 수 있겠지만 일제에 의해 강압적인 통치를 받고 있던 19세기 말엽에 지어진 것으로, 조선 독립 운동의 한 축을 이루던 독립협회에 의해 세워졌다. 독립협회는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 박사에 의해 만들어진 단체로, 1896년 7월경부터 전국적인 모금운동을 통해 마련한 성금을 바탕으로 1896년 11월 21일부터 독립문 건설 공사를 시작해 약 1년 뒤인 1897년 11월 20일에 완공을 보게 된다.

독립문을 만든 독립협회라는 단체가 일단은 독립운동을 하는 단체이니 독립문을 만든 이유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독립문을 만들게 된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진 않지만) 그 동안 조선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쳐오던 일본이나 중국, 러시아 등의 열강으로부터 벗어나 자주 독립을 이루고자 한다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독립문이 세워진 장소 역시 사대주의의 유물로 받아들여지던 영은문 자리였다는 점에서 특징 지워진다.

그런데 독립문, 어딘지 낯이 익지 않은가? 굳이 파리까지 다녀올 필요는 없다. 독립문은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프랑스 샹젤리제의 개선문을 모델로 했다는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문은 문이되 그 연원은 열강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세상사에 이유 없는 결과는 없다고 했을까. 독립문은 그냥 아무런 이유 없이 그곳에 세워진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즉 독립문이 세워지기 전까지 그곳엔 독립문과는 상반된 성격을 갖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어떤 이는 길가는 이들을 위해 횃불을 위한 괘임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 지금은 그저 독립문 앞의 쓸쓸한 주춧돌로만 그 흔적을 알 수 있는 '영은문'이 그것이다.

영은문의 유래를 살펴보자면 조선 태종 7년인 140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명나라와의 유대를 중히 여기던 왕실에 따라 명나라 사신들을 영접하기 위한 시설물을 별도로 세우게 되는데 그때 만든 것이 이름부터 의심스런 '모화루(慕華樓)'였으며, 세종 12년인 1430년에 들어 '모화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그 앞에 홍살문을 하나 만들게 된다.

바로 그 홍살문에서 시작해 1536년에 김안로의 건의로 청기와를 얹어 '연조문'이라 부르다가, 1539년에 들어 명나라 사신인 설정총에 의해 '영은문(迎恩門)'으로 그 이름이 바뀌게 된다. 이 역시 그 이름에서부터 사대의 냄새가 풀풀 풍기던 영은문은 장장 360여 년이나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고종 32년인 1895년 2월에 들어서야 주춧돌 2기만 남기고 철거를 당하게 된다.

헌데 애초에 독립문과 영은문은 지금의 그 자리에 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1979년 성산대로와 금화터널 등을 만들면서 원래의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70여m 떨어진 현 위치로 밀려난 것이다. 사람과 차들이 조화롭게 만나는 파리의 개선문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교통섬으로 변해버린 숭례문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 대접을 받은 것일까. 대로 한 켠으로 쫓겨난 데다 보호라는 명목으로 철책에 둘러싸여 그 옹색함은 더해만 간다.

한편 독립문에서 한성과학고등학교 쪽으로 가자면 바로 독립관이라는 현판을 단 건물을 볼 수 있다. 이 건물은 원래 앞서 본 대로 명나라 사신들을 위한 일종의 영접시설이었던 모화관이다.

이후 1897년 들어 독립협회가 수리를 하면서 사무실로 이용하게 되었고 순종은 '독립관'이라고 손수 쓴 현판까지 하사하게 된다. 특히 독립협회가 들어와 이용하던 건물이기에 1898년까지 매주 토요일마다 토론회가 열렸으며, 각종 집회가 열리기도 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아무래도 독립문 이야기는 다시 한번 하고 마쳐야 할 것 같다. 그만큼 아쉬움이 많기 때문일까. 독립문이 말 그대로 '독립'을 의미하는 지는 의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은문 수준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독립문 역시 당시 조선이 가지고 있던 독립 역량과는 무관한 데다 은근슬쩍 일본에 대한 종속을 내포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즉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에 승리를 함으로써 중국에 대한 승리를 굳혔으나 조선을 속국화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정치적인 수순'이 남아있던 것이다.

물론 독립협회 등의 개화파가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신문 등을 발간하는 등 독립을 위해 펼쳐온 활동들이 일본의 편을 들기 위한 것들은 아니겠지만, 일본이 그것을 보아도 못 본 척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이후 중국과 러시아가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잃게 되자 일본은 '독립'이라는 단어 자체도 이용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독립문은 이름은 독립문이되 그 형식이나 과정에서 있어서는 그저 아쉬움으로만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www.SNUnow.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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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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