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온 선물

교육장편소설 <그 집의 기억> 3

등록 2002.03.18 11:40수정 2002.03.19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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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 마침 일교시가 비어 있어 나는 아이들이 낸 환경조사서를 뒤적이며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있었다. 사환조차 볼 일을 보러 갔는지 텅 비어 있는 교무실에는 나 혼자다. 쉬는 시간이면 늘 시끄럽던 교무실이 어느 순간 갑자기 이렇게 적막 그 자체인 때가 있다. 그런 적막이 낯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친숙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텅 빈 광장에 아무도 없고 혼자 버려진 것 같은 느낌, 그 쓸쓸함과 아늑함이 공존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미 한 번 훑어본 환경조사서를 다시 차근차근 넘겨본다. 가족 상황을 적은 난을 꼼꼼하게 다시 살펴본다.
"하나, 둘, 셋....."
속으로 숫자까지 계산하며 내가 헤아리는 것은 소위 결손가정이라는, 편부나 편모인 아이들의 수다. 마흔 다섯 명 중에서 내 셈에 들어온 아이가 여덟이다. 세상에. 아버지나 엄마 중 하나가 없는 아이가 우리 반에 여덟 명이나 되다니.

"우리 반에 글쎄 편부, 편모가 여섯이나 된다니까요. 올 일년 어떻게 헤쳐나갈지 막막하네."
아까 일 교시 수업에 들어가며 옆자리의 문 선생이 암담한 표정을 지어보던 것이 떠올라 나도 환경조사서를 뒤져본 것인데, 오히려 우리 반에 그런 아이가 더 많은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여섯이지, 이혼하고서도 부모 다 있는 것처럼 적은 아이들까지 합하면 아마 서넛은 더 늘어날 걸."
문 선생의 말에 맞은 편의 심 선생이 냉큼 한 마디 덧붙이기까지 했는데, 그렇다면 우리 반도 여덟 명에 서넛을 더해 한 열한둘쯤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더 한숨이 나온다.

그때 갑자기 전화벨이 길게 울린다. 쥐 죽은 듯 조용하던 교무실이라 전화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이미 다른 사람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습관처럼 전화기 근처를 살피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스적스적 걸어가 수화기를 든다.
"여보세요. 학굡니다."
"아, 예, 저..."
떠듬떠듬 입을 여는 것을 보니 분명 학부모다. 그것도 무언가 문제가 있는 아이의 부모임에 틀림없다. 교직 십여 년에 늘어난 것이라곤 학교로 오는 학부모 전화의 감잡기 뿐이라는 자조감을 씹으며 나는 얼른 선수를 친다.

"예, 말씀하세요. 몇 반 담임 찾으시는지요."
"예. 일 학년 칠 반...."
이런, 칠 반이라면 우리 반 아닌가?
나는 어마 뜨거워라 하며 말꼬리를 낮춘다.
"예에. 제가 칠 반 담임인데요."
"아, 그러세요. 이거 죄송합니다. 찾아 뵙지도 못하고 이렇게 전화만 드려서...."
늘 그렇듯이 전화한 학부모들이 제일 먼저 하는 말은 '찾아 뵙지도 못하고'다. 왜 담임은 꼭 찾아뵈어야 할 대상인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입에 발린 말로 받는다.

"뭘요. 바쁘신데요, 뭐."
"저... 저는 우석이 엄만데요."
우석이? 나는 얼른 머리를 굴린다. 학기초라 아직 아이들 이름도 다 외우지 못했고, 이름을 알아도 얼른 얼굴과 연결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 우석이요."
그러면서도 아는 척 한 마디 할 줄 아는 것 역시 경험에서 나오는 임기응변이다. 교직 초기에는 순진하게도 "우석이요? 우석이가 몇 번이더라. 잠깐만요"하고 환경조사서를 바쁘게 뒤적였지만, 이제 그쯤은 그냥 가볍게 받아넘길 줄 안다.
"실례인 줄 알면서도 이렇게 전화를 드린 것은요..."


종례를 마치고 나는 교실을 나오다 갑자기 잊어버렸다는 듯 가방을 챙기고, 책상을 뒤로 미는 아이들을 향해 소리친다.
"청소 깨끗이 하고 검사 맡아야 된다. 참, 양우석이. 우석아!"
아이들의 소란 때문에 내 소리를 뒤에까지 전달되지 않는다. 그러자 앞의 아이들이 일제히 뒤를 향해 손나팔을 분다.
"우석아, 우석아. 선생님이 찾아."
가느다란 뿔테 안경에 얼굴 이곳저곳에 버짐이 피어 있는, 키도 조그맣고 몸이 비리비리해 보이는 녀석이 제 키보다 커 보이는 대걸레를 들고 밀리듯 내 앞으로 다가온다.

"우석이, 너 청소하지 말고 교무실로 좀 와라."
녀석은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아이들이 그런 녀석의 뒷통수를 툭 치며 한 마디씩 한다.
"좋겠다, 청소 안 해서."
"너 무슨 잘못 했냐?"
다른 친구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녀석은 제 책상으로 가 가방을 주섬주섬 챙긴다. 나는 얼른 교실 문을 나서고 만다.


녀석은 마치 못올 데라도 온 듯 교무실 문을 삐죽 밀고 들어오더니 내 앞으로 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꾸벅 한다.
"앉아."
"예."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녀석은 그냥 선 채다. 나는 옆의 빈 의자를 녀석 앞에 당겨준다.
"앉으라니까."
녀석은 마지못한 듯 의자 끝에 조심조심 앉는다. 나는 일부러 책상 위에 녀석의 환경조사서를 펴놓고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척 한다. 이미 아까 녀석의 엄마 전화를 받고 들춰본 거지만, 그래도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다.

한동안 녀석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안절부절이다. 요즘 아이들은 선생 앞에 와서도 제 할 말 다 하고, 농담까지 턱턱 내뱉곤 하는데 이 녀석은 숫보기다.
"우석이네는 세 식구구나."
나는 환경조사서의 가족사항 난을 보며 묻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혼잣말도 아닌 투로 한 마디 한다.
"예...."
녀석은 얼굴까지 벌개지며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한다.
"엄마와 형, 그리고 너. 아버지는 안 계시니?"
나는 녀석의 눈을 바라보며 아버지 얘기를 꺼낸다. 그러자 벌써 녀석의 눈자위가 글썽해진다.

"아버지는... 제가 초등학교 삼 학년 때... 돌아가셨어요."
녀석은 억지로 말을 꺼내는 것처럼 더듬거리기까지 한다.
"생활은 어떻게 하니?"
나는 녀석의 손을 잡아주며 또 묻는다.
"엄마가 취로사업에 나가 버는 돈으로..."
결국 녀석은 말을 맺지 못하고 만다. 벌써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다.
"울지 말고. 자, 닦아."
나는 휴지 한 장을 뽑아 건네준다. 어렵게 살았으면서도 오히려 여리고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은 녀석이 기특해 보인다. 녀석이 떠듬떠듬 들려준 말을 들으며 나는 또 한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아버지는 녀석이 삼 학년 때, 신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떴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안은 순식간에 풍비박산이 나고, 원래 변변히 가진 것이 없던 처지라 살길이 더 막막해 졌단다. 보다 못한 동네 통장이 동회에 생활보호대상자 신청을 해주고, 그 덕에 달마다 지급되는 얼마 안 되는 돈과 밀가루 두어 포, 엄마가 취로사업에 나가 받는 돈으로 근근히 살아왔다고 한다.

이번 입학 등록금도 동네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 주었단다. 그런데 며칠 전 엄마가 취로사업에 나갔다가 허리를 다쳐 꼼짝도 할 수 없다며 녀석은 또 눈물을 글썽인다. 나는 그저 녀석의 어깨를 몇 번 다독거려 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내 마음까지 중중첩첩, 울울하기 그지없다. 교무실을 터벅터벅 걸어나가는 녀석의 뒷모습이 축 처져 보여 마음이 더 짠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 아이 올 한 해 등록금은 책임지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아이의 온라인 번호나 알려 주십시오."
이마 양편이 시원스레 파여 올라가 훤해 보이는 그가 말투도 외모처럼 시원시원하게 대답한다. 나는 그저 고맙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몇 번 수그린다. 그런 중간에도 계속 한약 냄새가 코를 통해 온 몸으로 퍼져드는 것 같다.

아까 진로상담주임에게 우석이 사정을 얘기하고, 어디 장학금 지원해 줄 데가 없느냐고 묻자, 주임이 이것저것 서류를 뒤적이더니 바로 이 한약방을 추천해 주었다. 나는 열 일 제쳐놓고 퇴근하는 길로 바로 추천 받은 한약방을 향했는데, 마음속으로는 '어디 남 도와줄 사람이 그렇게 흔한 것도 아닐테고, 정말 잘 될까'하는 의구심에 가슴을 졸였다.

그런데 한약방 주인은 의외로 선선히, 그것도 일년 치 등록금을 다 도와주겠단다.
"자, 차 드시죠."
한약방 주인은 한약방답게 인삼차를 진하게 한 잔 타주며 권한다.
"예. 고맙습니다."
나는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것 같아 마음이 환해진다.
"저도 어릴 때 온갖 고생 다해가며 공부했습니다. 지금이야 그럭저럭 먹고 살만 하지만."
"예. 그러시군요. 이렇게 도와주시는 덕분에 아이들이 마음 편히 학교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학교 근처에 한약상가가 있어 여러 가지 도움되는 일이 많다. 여러 한약방에서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내놓았고, 무료 금연침 시술을 해주기도 했다. 수업을 하다 보면 한약 달이는 냄새가 창을 타넘어 슬금슬금 교실로 침범하기도 했는데, 어느 선생은 코를 벌름거리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우리 학교는 교육환경은 엉망인데 딱 하나, 저 한약방들 덕분에 공짜 보약 냄새라도 맡을 수 있어 다행이야."
평생 한약을 입에도 대보지 않은 나조차 날마다 한약으로 몸 보신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럼 등록금 고지서가 나오면 연락 드리겠습니다."
나는 차를 한 잔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시 한 번 치사를 한다.
"뭘요. 이런 일을 통해 제 마음이 위안을 찾게 되는 것이겠지요. 참,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
엉거주춤한 자세로 나는 한약방 주인을 쳐다본다.
"아이에게는 제 얘기를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우리 가게도 알려주지 않았으면 좋겠구요. 별 것도 아닌 일에 괜히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아, 예."
나는 한약방 주인의 마음 씀씀이에 다시 한 번 감탄을 하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한약방을 나오자 벌써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한다. 어둑어둑한 거리가 내게는 다른 어떤 때보다 더 환해 보인다. 나는 뚜벅뚜벅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뒤에서 비키라고 경적을 울려대는 자동차조차 그날은 정겹다.

우석이를 불러 그간의 경과를 알려주고, 등록금 걱정 말고 공부하라고, 어느 고마운 한약방 아저씨가 네 일년 등록금을 책임져 주기로 했다고, 누군지는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고 설명을 하자 녀석은 또 눈물을 글썽인다.

다음날 출근을 하자, 내 책상에는 예쁜 카드가 두 장 놓여 있다. <선생님께>와 <이름도 모르는 아저씨께>라는 글이 겉에 쓰인 두 장의 카드. 나는 <선생님께>라는 카드를 열어본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우석."
삐뚤빼뚤한 글씨지만, 녀석의 순결한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흐뭇해진다.

<이름도 모르는 아저씨께>라는 카드도 열어본다.
"이름도 모르는 고마운 분께. 어려운 저를 도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도와주신 만큼 올바르게 살겠습니다. 힘든 날이 지나면 밝은 해가 뜨는 날이 오겠지요. 여러 아저씨들의 도움으로 이 힘든 날을 제가 잘 견뎌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 고맙습니다. 양우석 올림.>

나는 온 밤내 생각을 짜내 이 글을 썼을 우석이를 떠올리고, 그런 아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한약방 주인과 같은 마음이 따스한 사람이 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그래도 척박한 이 땅에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자 다시 마음 한 켠이 따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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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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