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권에 대한 연민

등록 2002.03.30 11:58수정 2002.04.01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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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박정희기념관' 건립에 대한 국고 지원 방침을 밝혔을 때 나는 아연한 가운데서도 이상한 공포감 같은 것을 느꼈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역사의식을 결여하고 있는 오만과 독단 외에, 김대중 정권이 앞으로 어느 정도는 군사독재정권의 폭압성을 답습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기념관 건립에 국고를 지원하는 문제는 김대중 대통령이 독단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라는 내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박정희로부터 모진 수난을 당한 김대중 개인으로서는 얼마든지 그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그것이 큰 사람다운 도량이겠지만, 그런 일에 정부를 끌고 들어가는 독단은 시대정신을 왜곡시키고 진정한 가치관을 훼손하는 행위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거기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분별력을 의심하게 되면서 그 온전치 못한 분별력이 앞으로 어떤 양상으로 확대되고 노출될 지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우려 가운데서도 나는 스스로 '국민의 정부'라 일컫는 김대중 정권이 스스로 '문민정부'라 일컬었던 김영삼 정권의 온갖 부정적인 모습들을 닮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참으로 과거 정권들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모습이기를 바라는 것은, 김대중 씨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지역에서나마 온갖 고초를 불사하며 노력했던 사람으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일 터였다.

김대중 정권에 실망하며 김영삼 정권과 별로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속성과 병폐들 중에서도 내가 가장 안타깝게 보는 것은 국회에서의 '도둑질'이다.

나는 국회에서의 이른바 '날치기' 통과라는 것이 김영삼 문민정부 시절에도 꼭 없을 줄로만 알았다. '개혁'이라는 용어의 범람 속에서도 정작 무엇이 개혁되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나마, 개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거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악습이 되풀이되지 않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에서도 국회 날치기 통과가 자행되는 것을 보는 순간, 역시 별 수 없는 정권임을 확인하는 심정은 너무도 착잡하고 허탈했다. 1996년 12월 26일 새벽 안기부법과 노동관계법을 여당 단독으로 날치기 통과시키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묘하게도 1980년 미8군 사령관 위컴의 '들쥐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여당 의원들이 한결같이 위컴이 한국인들을 비하하여 말한 그 들쥐론의 실체 같게만 보이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기관지인 <빛두레>에 「위컴의 '들쥐론'에 대한 기억」이라는 칼럼을 쓰기도 했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시절로 들어서서, 처음의 기대와는 달리 너무도 빠르게 노정 되어 버리는 오류와 실정들을 접하면서도, 소수 정권의 한계를 동정하고 이해하면서 그래도 이 정권이 원칙만큼은 저버리지 않기를 진심으로 소망했다. 그것만이 이 정권의 살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2000년 5월 4일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를 자행하는 것을 보면서 이 정권도 별 수 없음을, 참으로 분별없는 정권임을 확인하는 심정은 너무도 허탈했다.

더욱이 날치기 통과까지 감행한 것이 고작 국회 교섭단체 정족수를 하향 조정하여 자민련을 구제해 주려는(그리하여 후에 민주당 국회의원 3명을 자민련에 꾸어주려는) 것이었으니 생각하면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내가 지금 왜 이미 과거사가 되어 버린 국회 날치기 통과를 기억하며 다시 문제 삼느냐 하면, 이 정권의 오만과 독단과 분별없음에 기인하는 거대한 날치기 기류가 국정 전반에 광범위하게 횡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날치기는 도둑질의 한가지 유형이다. 그리고 기만적인 수법이다. 그것에는 도덕도 양심도 원칙도 없다. 과정이나 방법도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조급하게 설정한 목적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러니 관철을 위해 온갖 무리수를 무릅쓰게 된다.


나는 김대중 정권이 무리하게 추진하고 있는 '차기 전투기(FX) 사업'과 '공기업 민영화 방침'에서 그것의 낌새를 감지한다. 미국과의 관계라든가, IMF와의 연관성 따위를 전혀 모르거나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에 '역학'이 존재한다는 것은 다른 '여지'가 창출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데, 이 정권이 그것에는 너무도 무지하다는 데에 문제의 근원이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정권이 이대로 끝난다면 숱한 실정 중에서도 가장 큰 실정이 새만금 간척 사업의 재개로 환경 수호의 교두보를 절단 내 버린 일과 모든 공기업들을 일괄적으로 무리하게 민영화를 시도한 일을 꼽을 것이다.

내가 공기업 민영화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민영화를 주장하는 일부 경제학자들의 논리와 일부 현업 종사자들의 견해도 주의 깊게 듣는다. 그러나 적어도 과거 어느 정권보다도 민주적인 요소를 많이 지닌 '국민의 정부'에서 하는 일이라면 최대한의 치밀성을 발휘하고 합리적인 절차를 존중하면서 민영화를 추진해야 할 것이 아닌가. 적어도 국민의 여론만이라도 제대로 수렴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국가의 핵심적인 공기업인 데다가 지난해 1조 7925억 원의 순이익을 낸 '한전'의 경우, 민영화를 시도하는 정부의 논리와 주장은 너무도 공허하고 군색하다. 엄청난 순이익을 내는 공기업을 미국이나 재벌에 매각하려고 휘몰아 가는 '민영화 밀어붙이기' 논법에는 억지와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이 덕지덕지 늘어붙어 있는 것이다.

한전 사장단과 산업자원부의 시대착오적인 초강경책 배후에 김대중 대통령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김 대통령은 그 독단적인 고집을 버려야 한다. 합당한 절차와 국민 여론 수렴 과정을 무시하고 공권력을 앞세워 무리하게 민영화를 추진하지 말아야 한다. 수많은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의 피눈물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최루탄 사용만 줄었을 뿐이지 방만하고 폭력적인 공권력 사용은 과거 정권들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상황을 볼 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군사독재정권의 핍박으로 목숨을 잃을 뻔도 하고 고생이야 많이 했지만 먹고살기 위해 생업 전선에서 피땀을 흘린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에 서민들의 고충을 잘 모르는 것이 아닐까? 시장 자본주의에 너무 경도 되어 국민의 살아가는 일을 그저 경제 논리로만 재단하려는 것은 아닐까?

나는 김대중 대통령이 시급히 꼭 해야 할 일, 가령 교육 개혁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학 개혁' 같은 난제는 계속 뒷짐을 진 자세로 일관하고, 언론 개혁도 겨우 변죽 울린 수준으로 그치고, 보안법 철폐 같은 것은 논의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별로 긴급하지도 않은 공기업 민영화 같은 일들을 무리하게 추진하여 오히려 국민 부담을 가중시키는 것을 볼 때 안타까운 마음 그지없다. 김대중이라는 이름 석자에 눈물까지 흘리며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분투 노력했던 사람으로서 오늘 이 같은 글을 쓰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국가의 핵심 기간 산업인 '발전 산업'만이라도 민영화 방침을 철회하고, 남은 임기 동안 악법들을 철폐하는 일, 환경 보존의 기틀을 마련하는 일, 남북간의 화해와 교류의 폭을 넓히는 일에 주력을 해야 한다. 올해 안에 치르게 될 지방선거와 대통령 선거를 공정하게 관리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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