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스, 부르스, 부르스 연주자여

<교육 장편 소설> 그 집의 기억 17

등록 2002.04.29 08:05수정 2002.05.02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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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중간고사 셋째 날, 시험이 한 시간뿐이다. 아침부터 교감이 바쁘게 돌아치고, 말뚝이는 여기저기 전화하느라 난리다. 중간고사 시간표가 발표되기 직전의 직원회의 시간에 교감이 통보하듯 한마디했다.


"오월 십일에 전 교직원 야유회를 갖겠습니다. 스승의 날 기념 야유회입니다. 한 분도 빠지지 말고 전원 참석해주시기 바랍니다. 일부러 그날 시험도 일교시만 보도록 했습니다. 장소는 각 부 기획 선생님들을 통해 여러 선생님들의 의견을 들어 결정하겠습니다."

몇몇이 수근거렸지만, 놀러 간다는데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듯 별다른 말없이 넘어갔다.

그런데 선생들 의견을 듣겠다더니 그날 오후 각 부 기획에게 내려온 회람에는 장소가 세 군데로 적혀 나왔다. 남이섬, 광릉 수목원, 일영 숲속 가든. 특별히 일영 숲속 가든이라고 쓴 옆에는 괄호를 하고 '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잔디밭에서 출장 뷔페'라고 적혀 있다. 아마도 교장이나 교감이 원하는 곳이 거기라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는 것이리라.

까짓 것, 어디면 어떠리. 어차피 하루 먹고 마시고 놀다 오면 되지. 그런 생각에서인지 사람들이 별 말 없이 아무 데나 표시를 한다. 아마 세 군데를 제안한 쪽에서도 그런 점을 미리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결국 세 안이 모두 비슷비슷하여 기획과 주임들이 모여 회의를 열어 일영 숲속 가든으로 결정되고 만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이 흘러 드디어 그날, 아침 일교시 감독을 마친 교사들이 교무실로 들어서는데, 운동장에는 언제 왔는지 두 대의 버스가 부릉대고 있다. 승용차를 몰고 이미 교문을 빠져나가는 축들도 몇 된다. 버스에 오르다가 운동장 조회대 옆에서 서서히 출발하는 자가용을 보니 말뚝이가 모르는 여자들 세 명과 함께 차 안에서 무어라고 시시덕대고 있다.


"미리 당겨서 해먹는 스승의 날이군요."
막 자리에 앉으며 체육과 박 선생이 한마디한다.
"생일도 제 날짜보다 먼저 하는 건 괜찮다며요. 스승의 날이야 선생 생일이니 닷새 당겨 하나보지요, 뭐."
나도 피식 웃으며 맞장구를 친다. 스승의 날에는 또 이런저런 기념식이다 뭐다 해서 공식, 비공식 행사가 있을 것이다. 차라리 하루 쉬라고 하면 좋을 것을. 그런 내 생각을 눈치챈 것처럼 박 선생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낯 뜨겁게 회식이다 기념식이다 하지 말고 교사들 공휴일로 만들면 좀 좋아."
"노동자들 노동절에 쉬듯이 말이지요."
뒷자리의 문 선생이 우리 말을 다 듣고 있었는지 끼어든다. 돌아보니 문선생 옆자리에는 임 선생이 앉아 빙그레 웃고 있다.
"교사는 노동자가 아니라잖아요. 그러니 노동자들과 똑같이 쉴 수는 없지요."
박 선생이 이죽거린다.

"교사가 노동자가 아니라고요? 치, 하루 종일 교실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어봐. 퇴근 무렵이면 다리통은 퉁퉁 붓지, 목은 팍 잠기지, 이거야말로 중노동 아녜요?"
문선생 목소리가 높아진다.
"아하, 그래서 문 선생 다리가 굵어진 거구나."
박 선생의 놀림에 문 선생이 그의 등짝을 아프지 않게 때리다가 갑자기 버스가 출발하는 바람에 제 자리에 푹 주저앉는다.


버스는 미아 사거리 고가도로를 지나며 한참 밀린다. 창 밖으로 오월의 따사로운 햇살이 눈부시다. 사람들 옷차림도 울긋불긋한 게 햇살에 잘 어울린다. 계절이 바뀌면서 제일 먼저 달라지는 게 사람들 옷차림인 것 같다. 성급한 사람들은 벌써 겉옷을 벗어 팔에 척 걸치고 있다. 가벼운 티셔츠 차림인 그들의 몸에 감기는 햇살은 더 푸근해 보인다.

열두 시 반이 다되어 버스는 숲속 가든에 도착한다. 잘 꾸며진 정원에 벽돌과 나무를 적당히 섞어 지은 음식점이다. 미리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안내 담당 상조회 정 선생이 버스에서 내리는 우리에게 손짓을 한다.
"건물 뒤로 돌아 저 언덕을 넘으면 넓은 잔디밭이 있어요. 거깁니다."

사람들이 줄을 지어 언덕을 넘는다. 넘어가는 길이 깔끔하다. 곳곳에 통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고, 황토를 깔았는지 아니면 원래 황토 흙이었는지 숲을 따라 이어진 오솔길이 마치 어린 시절 뒷동산 선산으로 오르는 길 같다. 오랜만에 밟아보는 흙길이라 더 정겹다. 다들 그런 생각인지 일부러 흙길에서 겅중겅중 뛰어보는 사람도 있다. 길 옆으로 진달래는 이미 다 지고 철쭉이 한창이다. 철쭉 밑으로는 온갖 풀들이 몸을 틀고 있다.

"좋긴 좋군요."
문 선생이 심호흡을 한다.
"학교가 이런 데 있어야 하는데."
임 선생도 맞장구다. 임 선생의 말을 듣다 나는 가만히 한숨을 내쉰다. 한 사람에게 한 평도 차례지지 않는 운동장, 좁아터진 교실, 먼지만 날리는 교정, 숲이랄 것도 없이 그저 아이들 키보다 조금 큰 나무만 군데군데 꽂아놓은 화단, 몽둥이와 고함이 가득한 학교가 떠올라서다.

언덕을 넘으니 웬만한 시골집 마당보다 큰 잔디밭이 펼쳐진다. 푸른 색깔이 햇살과 어울려 싱그럽다. 잔디밭 주변으로는 아름드리 참나무와 소나무들이 쭉쭉 뻗어 있다.
"돈 꽤나 들인 데로군."
누군가 한마디한다.

출장 뷔페라던 말대로 잔디밭 옆으로 길게 음식이 탁자에 놓여 있고, 술과 음료수도 한자리 차지하고 있다. 요리사인지, 갈비를 굽느라 연기와 냄새를 피워 올리는데 곳곳에 놓인 야외용 식탁에 사람들이 엉거주춤 앉는다. 마치 낯선 집에 초대받은 손님들 같다.

휴대용 엠프에서 직직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말뚝이의 말이 튀어나온다.
"그럼 지금부터 스승의 날 기념 교직원 야유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교장선생님께서 인사를 하시겠습니다."
교장이 마이크 앞으로 나와 많이 드시고 어쩌고 하는 얘기를 하더니, 오늘 회식은 어머니회와 육성회에서 준비했다고, 고맙다며 자기 왼쪽을 향해 인사를 꾸벅 한다. 거기에 아까 말뚝이와 함께 차를 타고 온 여자들이 있다. 그밖에도 몇몇 학부모들이 더 있다.

여태까지 한 마디도 없더니, 난데없이 육성회와 어머니회에서 내는 것이라는 소리에 여기저기서 수근대는 말이 들린다. 누가 내든 먹기만 하면 된다는 표정도 많다.

나는 찝찝한 마음이 들어 옆의 임 선생을 쳐다본다. 임 선생도 뭐 씹은 표정이다. 그 동안 육성회와 어머니회에서 두어 차례 교직원 회식 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었다. 교장 교감 부장과 담임들만 부른 적도 있었고, 각 학년 담당 교사들과 회식자리를 마련한 적도 있었다. 이렇게 저렇게 연결되어 나나 박 선생도 참석을 하라고 권유를 받았지만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만나서 밥 먹고, 입에 발린 말 몇 마디 듣는 그런 자리라는 게 마음에 편치 않다는 것을 그 동안의 경험으로 족히 알기 때문이었다.

특히 어머니 회장이라는 사람의 그 고압적인 자세와 일견 뻔뻔하기까지 한 행동은 영 못마땅한 터였다. 교무실에 들어와 교감 자리에 턱 앉아 있기도 하고, 말뚝이와는 반말 비슷하게 주고받으며 마치 학교의 실권이 모두 자기에게 있다는 듯이 행동하는 것도 눈꼴이 시었고, 그 말에 연신 맞장구를 치는 말뚝이 또한 마뜩치 않았다.
'초등학교 학부모 때 치맛바람 깨나 일으켰을 걸.'
선생들은 뒷자리에서 수근수근 그런 말을 하곤 했다.

육성회장의 인사와 어머니회장의 인사가 이어지고, 음식 냄새는 허기진 사람들의 콧속으로 파고들어 마구 위장을 자극해 대고, 그렇게 한시 이십 분이 넘어서야 식사가 시작된다. 어느 정도 배가 차자 술판이 벌어진다. 권커니 자커니 술잔이 오가고, 맥주병과 소주병이 쌓이고, 목소리가 높아지고, 그러더니 마이크가 삑삑대다가 다시 말뚝이가 나선다.

"자, 자. 이거 뭐 각개 약진하지 말고 함께 놉시다. 어이, 반주. 준비 다 됐지?"
말뚝이가 전자올갠을 만지작대는 악사에게 반말 짓거리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말을 슬쩍 놓는 게 다반사인 그라 이미 취했으니 욕이 튀어나오지 않는 게 다행이다.

"그럼 먼저 사회과 구 선생."
말뚝이가 앞쪽에서 술잔을 홀짝이던 구 선생을 부른다. 나이도 엇비슷하고 전에 같은 학교에 근무한 적도 있고 해서 그가 제일 만만했나 보다.
"어, 나는 못해."
구 선생 역시 혀가 꼬부라지고 있다. 손을 내젓는 그를 '빼지마. 다 아는데.' 어쩌구 하며 말뚝이가 끌어내고, 구 선생 마지못한 듯 그러나 마이크를 잡자 구성지게 박달재를 넘어간다. 천둥산 초입에 들어서던 구 선생, 물항라 저고리 입은 금봉이까지 불러 세우는데, 박달재의 금봉이는 한사코 울어대고 노래가 끝난다. 빼던 것과는 달리 <울고 넘는 박달재> 이 절까지 다 채운 것이다.

육성회 사람도 한 둘, 어머니회장도 한 곡 그렇게 몇 사람이 더 노래를 하더니, 이제 술자리는 점입가경이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에서 이별의 눈물을 흘리더니 '내게 그런 핑계 대지 마'라고 단호하게 말하기도 한다. 뽕짝에서부터 최신 유행가까지 이어지고, 말뚝이가 한사코 버티는 여선생 팔을 끌어다 마이크 앞에 세우고, 그런 꼴이 마뜩찮아 절반쯤 되는 선생들이 자리를 빠져나가 버린다.

"자, 자. 노래는 그만 집어치워 버리고. 신나게 한 판 노는 거야. 젠장."
말뚝이가 사회를 보면서, 다른 선생들이 노래하는 틈에 여기저기서 꽤 많은 술을 얻어먹었는지, 완전히 꼬부라진 소리를 내뱉는데, 그때도 마이크를 쥐고 있어서 목소리가 그대로 튀어나온다. '자, 자'하는 술 취한 말버릇이야 늘 그렇다고쳐도, 왜 잘 먹고 놀다 젠장인지는 모르겠지만, 되어 가는 모양새가 뻔할 것 같아서 박 선생과 임 선생 그리고 나는 그쯤에서 슬금슬금 자리를 벗어난다.

막 잔디밭을 벗어나다 돌아보니 음악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찍고 돌리는데, 남녀 여나믄이 쌍쌍으로 얽혀 돌아간다. 그 중 가장 신이 나게 돌아가는 쌍이 말뚝이와 어머니회장이다. 하이힐은 휙휙 날아 잔디밭 구석으로 처박히고, 전자올갠은 철쭉꽃 잎새를 못 견디게 흔들어대고, 봄날이야 가던 말던, 하늘이야 푸르던 말던 쌍쌍이 뒤엉켜 신나는 가든파티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허 참. 그야말로 숲 속의 댄스 파티군."
언덕을 돌아 내려오며 나는 어이없어 그렇게 중얼거리고 만다.
"스승의날 기념 회식이 아니라 말뚝이 잔치군요."
임 선생도 어이가 없다는 말투다.
일찍 내려와 버린 사람들은 벌써 떠났는지 자가용은 두어 대밖에 없고, 큰길가에 나가 시외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도 몇 있다. 대절한 버스만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다. 아마 탈 사람이라곤 막판까지 흥에 겨운 쌍쌍들뿐이리라.

"우리 어디 가서 차나 한 잔 합시다."
모처럼 먹은 뷔페 음식이 명치 끝에 얹힌 듯 속이 거북해 나는 임 선생과 박 선생을 불러 세운다.
"그러죠. 구파발 쪽으로 나가볼까요?"
박 선생이 반색이다. 그도 속이 거북했나 보다.

우리는 느릿느릿 둑길을 걸어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발 아래 밟히는 잡초들의 부드러운 감촉이 신발 위로도 느껴지는 듯하다. 오월 넉넉하던 햇살도 여리게 여리게 가라앉는데, 우리 등 뒤로 아직까지 멀었다는 듯 전자올갠은 '부르스 부르스 부르스 연주자여 그 음악을 멈추지 말아요'하는 노래를 연주하고 있다. 문득 눈 앞으로 휙휙 벗어 던진 하이힐이 솟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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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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