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나무순 때문에 더욱 아쉬운 계절

등록 2002.05.07 07:00수정 2002.05.08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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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이면 팔순이 되시는 어머니, 지난해 가을 대장암 수술을 받으신 후유증으로 아직도 설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노모께서 또 시장엘 가시겠다고 하신다. 우리 집에서 조석시장까지는 보통 걸음으로 15분 거리. 잠깐 차로 태워다 드리려고 했더니 운동 삼아 걸어가시겠다고 하신다.


그 정도 거리는 노인네에게도 무리한 운동은 아닐 듯싶어서, "그럼, 돌아오실 때는 짐두 있구 허니께 꼭 즌화허세유잉." 단단히 부탁을 드린다.

몸소 저자에 가셔서 반찬거리들을 사오시는 일은 어머니의 또 하나의 낙이다. 저자에 가면 반색을 하며 맞아주는 반가운 얼굴들이 있고, 싱싱한 갯내음도 있고 푸성귀 냄새도 있다. 조석시장 특유의 생동감 같은 것이 차고 넘친다. 어머니는 그것을 좋아하시는 지도 모른다.

나로서는 몸소 시장에 가시는 어머니가 그저 고마울 뿐이다. 자신의 두 다리로 운동 삼아서 걸음을 하시는 것도 고맙고, 가족들이 먹을 음식을 손수 챙겨 주시려는 그 마음도 고맙다. 가족을 사랑하시는 어머니의 그 한량없는 마음을 무엇에 비기며,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새삼스럽게 고마운 마음이 무놀지다 보니 어머니의 걸음을 도와 드리는 좋은 날씨도 고맙고 오월의 훈향도 한결 고마워진다.

과거 아버님께서 살아 계실 때는 저자를 보아오는 일은 거의가 아버님의 몫이었다. 아버님은 손수 바구니를 들고 오랜 좌골 신경통으로 조금씩 절룩거리는 걸음으로도 저자 거리를 고루 돌아다니며 보아오시는 것을 무척 즐겨하셨다. 뿐인가, 당신께서 보아오신 음식 재료들을 가지고 손수 음식 만드시길 즐겨하셨다. 아버님께서 만드시는 음식들은 하나같이 맛이 좋았다.

아버님이 평생 동안 지니고 사셨던 그 '가난'까지도―가능한 한 아버님의 많은 것들을 물려받고 본받고 유지시키며 살려고는 하지만, 손수 저자를 보아다가 음식 만드는 일은 조금도 본받지 못하고 있다.


이 나이에 이르도록 아직 한 번도 그래본 적이 없으니, 생각하면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럽다. 이 일에 쫓기고 저 일에 치이며 우왕좌왕 사는 탓만은 아닐 텐데….

어머니께서 저자로 가신 후 잠시 컴퓨터 앞에서 눈을 감고 16년 전에 작고하신 아버님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다시금 가슴 한 구석에 싸한 그리움 같은 것이 밀려온다. 슬픈 상념 속에서 짐짓 괜한 생각들도 해 본다.


옛날엔 저자바구니가 있었는데, 그래서 아버님은 매번 꼭꼭 저자바구니를 들고 가셨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나도 저자 보는 일을 하게 될까…. 그때는 나도 비닐 봉지 대신 저자바구니를 사용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다시금 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리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데, 이윽고 어머니께서 들어오신다. 양손에 제법 큼지막한 비닐 봉지들을 들고 있다.

"아니, 왜 또…. 왜 즌활 허지 않으셨대유?"
"무겁지가 않은 거여서…."
"무겁지가 않다니유."

서둘러 비닐 봉지들을 받았다. 하나에는 마늘쫑 다발이 들어 있고, 다른 하나에는 중나무순 다발이 들어 있다. 나는 절로 입이 헤벌어진다. 정말이지 반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두 중나무순이 남어 있던교잉?"
"혹시나 허구 가봤더니, 촌 할미 단 한 사람이 이걸 갖구 있는디, 너무 쇠서 이내 팔리지가 않은 모앵여. 한참 다듬어얄 겨. 뻣뻣헌 줄기가 워낙 많어서."
"그래두 그게 워디래유. 올해는 중나무순을 두 번 먹구 마나 혔더니, 시 번까지 먹게 됐네유잉."

나는 계속 싱글벙글하며 마음 속으로 어머니께 더욱 고마워했다. 그리고 나는 주방 싱크대 앞에 앉아서 어머니와 함께 중나무순을 다듬는 일을 했다. 큰 줄기들은 너무 쇠어서 모두 떼어내야 했다. 잔 줄기와 잎사귀만 담았는데도 플라스틱 바구니에 수북했다.

중나무순 볶음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다. 언젠가 어느 잡지에서 잡문 청탁과 함께 가장 좋아하는 음식 세 가지를 적어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나는 주저 없이 1번으로 중나무순을 적었다. 2번으로는 달래 무침을 적고, 3번으로는 우무 냉국을 적고….

중나무순은 양념을 약간만 한 다음 기름을 충분히 쳐서 살짝 볶아야 제 맛이 난다. 음식 맛 좋기로 유명한 전라도 전주 출신이신 어머니는 중나무순을 '까중가리'라고 부르는데, 중나무순 볶음이 전라도 지방에서부터 발달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내 어렸을 적에는 중나무에서 갓 딴 순들을 막걸리 안주 삼아 그냥 날로 고추장 찍어 드시는 어른들도 보았는데, 나는 아직 한 번도 그래본 적이 없다. 언젠가 한번 옻나무순을 날로 먹었다가 된통 혼이 난 뒤부터는 전혀 독이 없는 중나무순도 날로 먹는 것을 더욱 삼가고 있다.

이윽고 어머니는 프라이팬에 양념과 기름을 붓고 중나무순을 볶기 시작했다. 중나무순 특유의 구수하면서도 달콤한 내음이 금세 온 거실 안에 가득 차는 듯했다. 어머니는 내게 맛을 보라고 했다. 중나무순이 어느 정도 쇤 상태라서 좀 쌉쌀하긴 했지만, 역시 내 입에는 최고의 맛이었다.

"술 한잔 허지 않을 수가 읎네유."

나는 냉장고에서 소주병을 꺼냈다. 통풍 환자에다가 당뇨 환자인 고로 술은 거의 마시지 않지만, 냉장고에는 늘 술이 있다. 좋은 안주가 있을 때는 딱 한 잔만이라도 마셔야 하므로….

소주 한 잔을 따라놓고 병아리 눈물만큼씩 혀끝을 적시며 마시자니 괜히 목울대가 아려온다. 그리고 금방 볶은 중나무순의 미각이 또 한번 옛 추억을 반추케 한다.

내가 중나무순을 처음 맛본 때는 중학생 시절이었다. 우리 집과 옆집 사이에 높이 솟아 있는 중나무에서 새순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장대를 준비해 놓고 있던 아버지는 그날 드디어 장대를 사용하게 되었다.

대나무의 한쪽 끝을 네 갈래로 가른 다음 그 사이에 돌멩이 하나를 끼워서 갈래들이 조금 벌어지게 했다. 그리고 대나무의 그 갈라진 쪽을 중나무의 새순 밑둥에다가 바짝 들이대었다. 대나무 갈라진 틈새에다가 중나무 새순 밑둥을 살짝 끼운 듯이 하고 대나무를 조금 돌리면 되었다. 곧 중나무의 탐스런 순이 대나무 끝에 달려 내려오곤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엌 부뚜막 맨 가장자리에 있는 작은 옹솥을 떼어내고 그 자리에다가 프라이팬을 놓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중나무순을 볶았다. 재래식 아궁이를 사용하는 일이니 두 사람의 협력은 참으로 효과적이었다.

곧 다 볶아진 중나무순을 마루의 상 위에다 놓고 아버지는 막걸리 잔을 기울였다. 나는 중나무순의 역한 냄새가 싫었지만 호기심이 동했다. 상 앞으로 다가가니 아버지가 한번 먹어보라고 했다. 그날 나는 온 뱃속이 다 뒤집히는 줄 알았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중나무순의 역한 맛에 진저리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토록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역하기만 해서 다시는 못 먹을 줄 알았던 중나무순 볶음이 어느 사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되었으니 생각하면 참 묘한 일이기도 하다. 냄새만으로도 역한 기분을 갖고 중나무순 볶음을 아예 맛볼 생각도 하지 않는 아내와 아이들 덕택에 중나무순 볶음을 독식하는 것이 슬몃 다행스럽기도 하고….

비슷한 경우로 날계란과 맥주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날계란도 처음엔 그저 비린 맛뿐이다. 너무도 비려서 다시는 못 먹을 것 같았는데, 운동을 하면서 한 번 두 번 먹다보니 어느새 비린 맛은 싹 가시고 고소한 맛만 느껴지게 되었다. 맥주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이토록 쓴 물건을 어떻게 마시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니 어느새 쓴맛은 사라지고 고소하고 상큼한 맛만….

중나무순은 어쩌면 유일한 무공해 식품일지도 모른다. 농약과 가장 멀리 떨어진 위치에서 '독야청정' 사는 식물이 아닐까 싶다.

완벽한 무공해 식품인 중나무순 볶음을 놓고 소주 한 잔을 홀짝홀짝 마시자니 다시금 공해라는 단어조차 없던 그 순결했던 시절의 풍경들이 아슴히 떠오른다. 높고 푸른 하늘을 배경 삼아 높이 솟은 중나무의 탐스런 새순들을 향해 아버지가 대나무를 힘차게 들어올리시던 그 풍경이….

언젠가부터 아버지도 이 세상에 계시지 않게 되었고, 해마다 늦은 봄이면 아버지가 대나무로 순을 따시던 그 중나무도 사라졌고, 중나무를 끼고 있던 그 동네 그 옴팡집도 사라졌다. 그리고 내 머리에는 어느새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올해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까중가리―중나무순을 세 번 먹었다. 어느 핸가는 중나무순이 한창 날 때 많이 사서 냉장고에 보관을 해보았는데, 시나브로 잎이 녹는 것을 보고는 오래 두고 먹을 욕심을 버렸다.

또 한해 중나무순을 먹으며 반가운 중나무순 계절을 느끼는가 했더니 그것도 찰라, 어느새 중나무순 계절도 다 지나고 있다. 지금 먹고 있는 중나무순 볶음이 마저 떨어지고 나면 나는 텅 빈 것 같은 밥상 앞에서 다시 세월 빠름을 절감하며 지난 시절의 그리운 풍경들을 반추하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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