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쯤 일입니다. 제 담임 반에 J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1학년 때부터 5교시가 끝나면 말도 없이 학교를 나가버리는 고약한 습관을 가진 아이였습니다. 심리적인 장애가 있어 보이기도 하는 그 아이의 나쁜 습관을 고쳐보려고 애를 써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운동장을 돌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중노동을 시켜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일들을 함께 해보기도 했습니다. 장문의 편지를 써서 주기도 하고, 방과후에 남게 하여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어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변화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생각이 없는 아이 같아 보였습니다. 돌을 던져도 돌에 얻어맞을 몸도 마음도 없는 그런 아이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문득, 그가 5교시를 마치고 무단으로 학교를 이탈한다는 사실보다는 그때까지 학교에 남아 있다는 사실에 더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통제 능력이 전혀 없는 아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다음날 저는 반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 아이에게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오늘부터는 학교를 무단 이탈해도 널 혼내지 않겠다. 더 이상 운동장도 돌지 마라. 대신 너에게 열흘 동안 시간을 주마. 네 자신을 조금이라도 사랑한다면 열흘 동안 너의 잘못된 습관을 고치도록 해라. 아무도 너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너 자신 말고는."
그날 저는 이런 말을 해주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습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런데 그런 말의 뜻을 그 아이가 알 리도 없겠지만, 그 말을 하다가 제가 그만 웃음을 터뜨려 버릴까 은근히 염려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저는 혼자서 해야한다는 것을 강조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이들은 이런 제안을 한 저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차라리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편이 더 낫겠다는 투였습니다. 사실은 제 생각도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담임의 허락도 얻은 터에 무엇이 아쉬워 종례 시간까지 학교에 남아 있겠나 싶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그런 제안을 하게 된 것은 다분히 전략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열흘 동안 무단 이탈을 허락해주었지만 허락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는 학교를 무단 이탈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그 열흘 동안의 무단 이탈이 종전에는 담임인 저의 실패로 인식되었지만 이제는 그 아이의 실패로 인식된다는 점입니다. 결국 공은 그 아이에게 넘어간 셈이 됩니다. 좀더 그럴 듯한 표현을 쓴다면 그는 드디어 문제 해결의 주체가 된 것입니다.
그런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음에도 그가 열흘 안에 어떤 변화를 보이리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는 공이 자기에게 넘어온 것을 인식할 수 있는 아이가 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가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된다는 식의 표현은 그 아이와는 너무도 걸맞지 않는 터무니없는 화려한 수식어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열흘이 하루 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 종례 시간, 제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그가 눈에 띄었습니다. 저는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정말 자기 눈을 의심한다는 그 말이 실감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 아이에게 천천히 걸어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드디어 해냈구나. 너의 승리를 축하한다."
그 후 그는 놀랍게도 단 한 번도 학교를 무단 이탈하는 일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가끔씩 그런 행동을 해도 그는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는 대학에 진학을 한 뒤에도 단 한 시간도 결강을 해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해준 것은 대학 진학 후 1년만에 저를 찾아온 그의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군 입대를 앞두고 저를 찾아왔는데 그들 중 한 아이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대학에 가니까 수업을 빼먹어도 혼내는 사람도 없고 정말 좋더라고요. 나중에 학사 경고를 먹고서야 선생님이 왜 그렇게 저희들에게 자율을 강조하셨는지 깨달아지더라고요."
그날 저는 제자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1년 사이에 부쩍 어른이 되어 돌아온 제자들이 대견스럽기도 했지만 제 마음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습니다. 학사경고를 당하고 난 뒤에 대학을 휴학하고 군 입대를 눈앞에 둔 상태에서 저를 찾아온 제자에게 저는 죄를 지은 기분이었습니다. 아직도 자율을 빙자한 타율과 강제가 아무런 반성도 없이 자행되고 있는 우리 현실이 새삼 암담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을 보내고 난 뒤에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J는 어쩌면 그 무렵 자유의 연습을 위한 혹독한 지옥훈련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J를 생각하면서 저는 교사로서의 죄책감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조급한 눈으로 보면 답답증이 날 정도로 늦고 더딘 아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꾸준한 인내심을 가지고 진심 어린 마음으로 아이들을 대하다 보면 변화의 싹이 보여지기 마련입니다. 그들의 천천한 변화는 한 계절이 다음 계절로 옮겨갈 때의 모습과 매우 흡사합니다. 그날이 그날 같고 때로는 가다 말고 뒷걸음질을 치는 날도 없지 않지만 결국은 계절이 뒤바뀌고 말 듯이 아이들도 변하고 맙니다.
문제는 그런 아이들의 천천한 변화를 기다려 주지 않는 우리 교육의 조급함입니다. 나쁜 것은 쉽게 배운다는 말도 있듯이, 그 조급함의 빠른 감염 속도가 또한 문제입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 조급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다그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아차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마음에 요청하여 인간에 대한 믿음을 제 가슴 깊이 심어준 J를 떠올리곤 합니다.
다음은 올해 담임 반 아이인 새미의 생일에 준 시입니다. 새미는 참된 지식에 대한 호기심으로 빛나는 맑고 까만 눈을 가진 귀여운 아이입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 아이도 주의가 산만하고 행동이 굼뜬 아이였습니다. 그의 천천한 변화는 기다림 뒤에 온 것입니다. 사랑의 다른 이름은 기다림이지 싶습니다.
너의 천천한 아름다움
넌 모를 거야
네 안의 아름다움을
너무도 천천히 다가오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없듯이
넌 보지 못할 지도 모르지
네 안의 조용한 흔들림을
너의 천천한 변화를
어느 날 수업시간
내가 네게 말했지
요즘 잘 하던데 오늘은 좀 떠드네
넌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했지
별로 잘한 적 없는데…
난 그때 알았지
너는 겸손한 아이라는 것을
넌 욕심이 없는 아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때 나는 소망했지
맑은 햇살에 꽃샘이 열리듯
진리를 향해 네가 열려지기를
너의 참된 끼가 발동하기를
넌 지금 길을 찾고 있을까
그래서 네 생일축하 싸인장에
누군가 이렇게 적어놓은 것일까
이제 너의 길을 찾길 바래~ 라고
그 길 찾거들랑 내게 전해주렴
찾다가 실패하면 함께 떠날까?
세상 아름다운 길 찾아서
조금 늦어도 서둘지 말고
천천한 걸음으로 바른 길 찾아서
우리 여럿이서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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