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후회

영화 속의 노년(31) - <영혼의 집>

등록 2002.05.28 14:13수정 2002.05.28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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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남자가 있다. 어머니는 병석에 누워 있고, 어머니 간병하느라 결혼은 생각조차 못한 채 나이 먹어가는 누나가 있다.

그는 유력한 정치가의 딸과 약혼을 하고 광산에서 열심히 일해 돈을 모으지만, 약혼녀는 어느 날 독이 든 술을 먹고 그만 세상을 떠난다. 약혼녀의 어린 여동생은 이 일에 충격을 받아 말을 하지 않고 침묵의 세계로 들어가 버린다.


광산에서 모은 돈으로 농장을 사서 미친 듯이 일하는 남자. 농장은 날로 번창하고, 이제는 어엿한 숙녀가 된 약혼녀의 여동생을 저택의 안주인으로 맞아들인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그녀는 침묵의 세계를 벗어나 세상으로 나오고, 두 사람 사이에 딸이 태어나고 겉으로는 평온한 시간들이 흘러간다.

그런데 그 남자는 다 자기 마음대로이다. 아내가 직접 농장 일꾼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의 문을 닫는 것도, 같이 살던 누나를 한밤중에 내쫓는 것도, 자신들의 권리를 알게 된 농장 주민들의 마음을 나몰라라 하는 것도 모두 다 자기 마음대로이다.

결국 아내는 이 남자를 향해 다시 입을 다물어 버린다. 다른 사람들과는 이야기를 나눠도 남편에게는 결코 입을 열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에 딸은 농장 일꾼의 아들과 사랑하게 되고 그의 아이를 낳는다.

보수당으로 정치에 입문한 이 남자와 인민전선의 혁명가인 딸의 남자는 대척점에 서게 된다. 인민전선의 승리도 잠깐, 군사 쿠데타의 소용돌이에 모두 휘말리게 된다. 딸은 군인들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남자는 딸의 남자가 해외로 떠나도록 돕는다.

이제 딸과 손녀와 함께 먼 옛날 자신의 손으로 일군 농장으로 돌아온 남자, 먼저 세상 떠난 아내를 기억하며 숨을 거둔다.


칠레의 복잡한 정치 상황을 배경으로 하면서, 사람 사이의 사랑과 소통을 긴 호흡으로 이야기하는 영화 <영혼의 집>. 한 남자 에스테반을 중심으로 구성해 본 줄거리이다.

에스테반이 '나는 부와 명예를 위해,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하고 가족들을 사랑하는데 내 가슴은 채워지지 않아'라고 절규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내에게 사랑해 달라고 애원하고, 돈으로 몸을 파는 여자에게 다정하게 대해 달라고, 좋아하는 척해 달라고 부탁하는 에스테반. 그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내 클라라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남편에게 입을 열지 않는다. 그러나 딸에게 '그를 사랑하며, 그는 나의 인생이었다'고 고백한다. 남편이 선거의 패배로 힘없이 돌아왔을 때 아무 말없이 안아주고 지난 시절의 사진을 같이 들여다보며 주름진 손을 마주잡는 아내.

부와 명예만 생각하고 폭력적이고 잔인한 에스테반 곁을 떠나지만, 나이 들어 외롭고 지친 에스테반을 다시 받아들여준 아내. 나에게 말을 하지 않아도 좋으니 같이 있게만 해달라는 그의 소원을 들어준 아내.

직장에서 수시로 애인과 전화 통화를 하며 사랑을 표시하는 젊은 동료들에게 물었다. 꼭 그렇게 표현해야 하느냐고. 대답은 다 똑같았다. 사랑은 표현하는 것 아닌가요?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정말 사랑이 아닐까? 남편에게 입을 닫아버린 클라라, 그러나 에스테반을 향한 사랑을 나는 믿는다.

에스테반의 누나가 집에서 내쫓기면서 '넌 늘 고독할 거야'라고 저주를 한다. 그 저주가 아니더라도 그는 고독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만 아는 사람이 어찌 고독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가족을 위해 내가 가진 걸 다 준다고,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의 사랑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기에 외로웠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사랑은 폭력이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늙고 주름진 에스테반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이다. "어떻게 내가 그렇게 잘못할 수 있었을까?" 어려움을 무릅쓰고 딸의 남자가 해외로 피할 수 있도록 돕는 에스테반의 마음 속에는 사랑, 가족뿐만 아니라 우리 살아가는 세상 정치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돌아보는 회한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나는 다 주는데, 왜 이리 몰라주고 나를 외롭게 할까' 싶으면 지금이라도 나를 돌아볼 일이다. 혹시 내 마음대로 사랑을 준 것은 아닌지. 노년의 부모 사랑 역시 상대를 배려하지 않아 노년이 외로워지고, 자녀들을 멀어지게 만든다. "어떻게 내가 그렇게 잘못할 수 있었을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후회이다.

(The House of The Spirits 영혼의 집 / 감독 빌 어거스트 / 출연 제레미 아이언스, 메릴 스트립, 글렌 클로스, 위노나 라이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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