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 초, 선생들이 인쇄실에서 도박을 한다는 소문이 은밀하게 번졌었다. 복사 때문에 인쇄실에 들렀던 선생이 황급하게 화투장을 감추는 아무개를 보았다고도 했고, 인쇄기사인 김씨가 날마다 벌어지는 화투판에 눈살을 찌푸린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소문은 점점 살을 붙여갔고,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 구체성을 확보해 갔다.
주로 4교시부터 점심시간까지 이어지는 그 도박판의 단골 멤버는 부장 두 명과 평교사 두 명, 모두 네 명이다. 부장은 말뚝이와 일 학년 부장이고, 평교사는 한 아무개와 박 아무개다. 판돈이 많을 때는 몇 만원을 넘어서기도 하는데, 점당 삼·오·칠 천원이다.
대개 일 학년 부장이 긁는 편인데, 부동산 임대업을 부업으로 하는 그에게는 밑돈이 두둑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일과 중의 고스톱이 부족해서 방과 후에도 모여 '늘어가는 판돈에 쌓이는 우정'을 확인한다는 얘기도 들렸다.
그런 소문이 퍼지더니 급기야는 어제는 누가 얼마를 긁었고, 판이 점심시간을 넘어 이어져 5교시 수업이 있는 말뚝이가 수업까지 빼먹으며 열고를 불렀다는 데까지 이르렀다. 어떤 선생은 우스개소리로 그 4명을 사인 박사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박사란 다름이 아니라 바로 도박사라는 말이었다.
소문은 쉬쉬하며 모든 교사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런데 의외로 고스톱판은 간단하게 마무리되었는데, 멋모르는 1학년 녀석 때문이었다.
그날도 말뚝이를 비롯한 4명의 박사들은 인쇄실 어두컴컴한 구석에 모여 자욱하게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손맛을 즐기고 있었는데, 인쇄실이 학생출입 금지라는 것을 모르는 순진한 1학년 녀석이 과학 프린트를 복사하겠다고 벌컥 문을 열어젖힌 것이다.
녀석은 좀 얼띤 편이었는지, 낌새가 이상하면 문을 되닫고 가버려야 할텐데 구석에 모인 선생들에게 주춤주춤 다가가 이렇게 물었단다.
"여기 복사하는 데 아니에요?"
황급히 화투장을 감추고, 판돈을 깔판으로 쓰던 담요로 덮어버린 사인의 박사들, 어쩔 줄 모르며 더듬더듬 이렇게 대답했단다.
"응... 그래, 보... 복사는 저... 점심시간에만 해준다."
녀석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힐끔힐끔 담요로 덮인 판 사이로 비집고 나온 지폐를 곁눈질하며 사라졌다는데, 그날 이후 인쇄실은 이른바 사인방 박사의 아지트로서의 역할을 마감했단다.
그리고 몇 주가 지났다.
이제는 학교 안에서 도박판이 사라졌겠거니 하는 것이 모든 선생들의 생각이었다. 점심시간, 내 앞에 앉은 한 선생에게 말뚝이가 슬금슬금 다가오더니 지나가는 말로 입을 연다.
"한 선생, 오늘 복숭아 먹을까?"
서류를 뒤적이던 한 선생이 고개를 들며 반색한다.
"좋지요. 언제요?"
"수업 끝나고, 방송실에서 먹지."
"예, 그러지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복숭아를 먹겠으면 교무실에서 여러 선생들과 함께 나누어 먹으면 되지 굳이 저렇게 수업 끝난 뒤 방송실에서 먹자고 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그런 대화는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이어졌다. 어떤 날은 사과였고, 어떤 날은 딸기였다.
참, 과일 어지간히 먹어대는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다 퍼뜩, '아니 저 사람들이 이제는 그것까지'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복숭아니 사과니 딸기니 하는 것들은 모두 빠찡꼬 그림이 아닌가, 그러니 이젠 완전히 도박장 출입까지 한다는 말인가 하는 의심이 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의구심은 나의 착각이었다. 하루는 급히 방송할 것이 있어 방송실을 찾았더니 이상하게도 방송실 쇠철문이 안에서 잠겨 있었다. 안에서 잠겼으니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이라 나는 급한 마음에 마구 철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잠깐만 기다려요' 어쩌구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참만에 문이 열렸는데, 안에는 이른바 사인방 박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물론 낌새를 못 채게 모두 치워버리긴 했어도, 분위기상 이들이 여기서 고스톱을 쳤다는 것은 십분 짐작하고도 남았다.
나는 모른 체하고 사인방 중의 하나인 방송 담당 박 선생에게 방송 부탁을 하고 나왔지만, 아직도 저런 버릇 못 고쳤나 하는 울화 비슷한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게 과일 먹자는 말로 고스톱 치자는 말을 대신한 것이었다.
며칠 뒤 점심시간 무렵, 이번에도 말뚝이가 한 선생에게 다가와 은밀한 유혹의 손길을 내민다.
"한 선생, 오늘 수박 어때?"
"수박이요? 좋지요."
"그럼 이따 수업 끝나고 방송실에서 먹지."
"그러지요."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과학실에서 교무실에 다니러 온 허 선생이 들었다. 말뚝이가 자리로 돌아가고, 한 선생도 교실로 올라가자 허 선생이 내게 말을 건넨다.
"아니 수박이 있으면 나누어 먹어야지, 자기들끼리만 먹겠다고? 내가 이따 가서 꼭 뺏어먹어야지."
나는 내막을 모르는 허 선생에게 사실 설명을 해주기도 뭣해서 그저 빙그레 웃고 말았다. 그런데, 그날 수업이 끝난 뒤 허 선생은 과학실에서 쟁반과 과도를 정성들여 닦아 두 손으로 잘 받쳐들고 방송실을 찾았다나. 철문이 안에서 잠겨있자 허 선생, 철문을 쿵쿵 두드리며 한 마디 했다는데.
"야, 치사하다, 치사해. 자기들끼리만 수박 먹으면 다냐? 여기 쟁반하고 칼 가져왔으니 나눠 먹자고."
먹을 것이 있다면 늘 빠지지 않는 평소 버릇대로 허 선생은 입맛까지 다셔가며 문을 두드렸다는데, 그 날 허 선생은 과연 방송실에서 속이 새빨갛게 익은 싱싱한 수박을 맛이라도 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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