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과 15년 후, 두 6월 10일

등록 2002.06.11 13:20수정 2002.06.17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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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한국과 미국의 월드컵 축구 예선전이 열린 날이었다. 어제 한국인들의 열광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잠시라도 매스컴에 시선을 준 사람은 알만한 사실이다. 광증에 가까운 열정, 어제 한국인들은 15년만에 처음으로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 어제 아침 나는 광화문을 지나가면서 아침 아홉시에 벌써 붉은 옷을 입은 '레즈(reds)'들이 대형 멀티비젼 앞에 길게 열을 지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오후에 나 또한 경기를 관전하러 가면서 다시 광화문 앞을 지나가야 했지만 쉽게 지나갈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다른 길을 택해 집으로 돌아왔다.


나 역시 얼마간 가슴을 졸이며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고, 일찍 귀가했기에 경기 시작을 기다리는 시간은 한 시간이 넘었다. 그동안 일찍 시작된 텔레비전 중계는 전국을 순회해 가며 응원 열기에 빠져든 한국인들의 모습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리고 KBS 1호기 헬리콥터가 시청앞 광장에서 광화문쪽으로 선회하며 지상에 운집해 있는 붉은 인파를 전송해 줄 때. 나는 생생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6월항쟁 15주년이 되는 어제 그 날의 아이러니를.

그 옛날 사람들은 정치적 민주화를 열망하면서 시청과 광화문 앞에 어제만큼이나 많은 인파들이 모여 있었다. 오늘은 축구 때문에 운집한 사람들!

그 옛날 사람들은 세상의 매도가 무서워 우연히라도 붉은 옷을 입을 엄두는 쉽사리 내지 못했는데. 오늘 서울 심장부는 자랑스러운 '빨갱이들 reds'에 의해 점령되어 있었다. 그 옛날 광화문과 시청에 모인 사람들의 비미批美는 광주학살과 냉전적 대립정책을 향한 것이었으나 오늘의 반미는 숏트랙의 오노와 '오노스러울' 미국축구를 겨냥하고 있었다.

그 옛날 광장의 사람들에게 한국정치는 호구지책을 능가하는 절대적 관심사였으나 오늘의 광장을 메운 사람들은 혐오스러운 정치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열망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 옛날 사람들은 폴리스라인police line쯤은 사방놀이 선보다 가볍게 여기는 반체제성이 있었다면 오늘의 광장에는 선진적인 질서의식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오, 개미떼처럼 운집한 사람들이 목청껏 애국가를 부르며,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오 필승 코리아, 오 필승 코리아를 외쳐대는 그 장려함이여! 이 위대하고 자발적인 애국주의여! 월드컵 축구라는 세계화 전쟁에 열렬히 동참하고 있는 명예로운 민족주의자들이여!

헬리콥터의 눈으로 생중계된 한국인들의 열광은 전세계를 놀라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10여 년 전에 똥지게가 되어버린 사회주의가 경제기적을 이뤘다는 코리아에서 저토록 열광적인 지지를 받고 있을 줄이야. 특히 테러에 놀랐던 미국인들은 코리안들의 생리적인 좌익성향에 말 못할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첨단적인 자본주의였으니.


이것은 한 편의 장대하고도 진지한 희극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희극만은 아니다. 앞으로 이 한반도에 전개될 사회적 진화 과정을 어제의 장면은 웅변해 주고 있다. 나는 그 이상스러운 광경을 빼놓지 않고 보았다.

그리고 밤이 되었다. 포르투갈과 폴란드의 전쟁이 시작되고 그것은 폴란드의 참혹한 패배로 끝나고야 말았다. 그때 나는 보았다. 공이 폴란드 골대를 유린할 때마다 사자처럼 포효하면서 몸에 날개를 달고 비행하던 파올레타의 모습을. 그것은 한 마리 조련된 야수의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축구였다. 그 축구에 열광하고 있는 한국인들의 한 자화상이었다.

15년 사이에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을까. 한국인들은 공포정치에서 해방되었고 경제적 위기를 넘어 환희에 찬 축제를 주관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의 표면이다. 그러나 그 이면은? 나는 이것이 궁금하면서도 두렵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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