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니어링이 주는 위로

책 속의 노년(29) : <헬렌 니어링, 또 다른 삶의 시작>

등록 2002.06.11 20:21수정 2002.06.12 16:01
0
원고료로 응원
늘 병약하던 사람보다 건강했던 사람의 아프다는 소식에 더 놀라고, 평범한 사람보다 외모가 월등 멋지거나 예쁜 사람이 늙어가는 모습이 더 쓸쓸하다. 그래서 젊음의 상큼함과 신선함이 소리없이 자취를 감춘 연기자나 가수의 나이들어감이 딱하기도 하고, 유명한 사람들의 젊은 시절 사진이 지금 그들의 나이듦과 그리도 선명하게 비교되는지도 모르겠다.

<헬린 니어링, 또 다른 삶의 시작>은 헬렌 니어링의 가장 가까운 친구 중의 한 사람이었던 엘렌 라콘테가 헬렌 니어링의 깊은 영성과 아름다운 노년을 기록한 책이다. 헬렌 니어링이 누구던가. 스코트 니어링과 함께 자연주의자로, 단순 소박한 '좋은 삶(Good Life)'을 실제 삶 전체로 보여준 사람이 아니던가.


100세가 되던 해 스스로 음식물을 끊음으로써 자유 의지로 세상을 떠난 남편 스코트 니어링을 지켜보며, 헬렌 니어링은 본인 역시 훌륭한 죽음을 맞기 위해 온 마음과 정성을 쏟는다. 그러나 그 방식은 달랐다. 91세 되던 해, 헬렌 니어링은 갑작스런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헬렌 니어링의 노년기와 말년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저자는, 좋은 삶 그리고 좋은 죽음을 실천한 헬렌 니어링을 우리의 영적 스승으로 삼아 좋은 삶과 훌륭한 죽음의 길을 함께 바라보며 그 삶으로 나아가자고 책 전체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지만 헬렌 니어링이 전생에 태양신을 받드는 여사제였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나, 헬렌이 거의 완벽한 인간의 여성 형질을 타고났다는 대목에 이르면 보통의 평범한 사람과는 태생부터가 다른 존재인 것 같아 거리감이 확 느껴져 온다.

두 사람이 온 몸으로 실천하고 삶 자체로 보여준 좋은 삶의 모델이 어느 순간 실제가 아닌 것처럼 멀어지기도 한다. 물론 누구나 쉽게 흉내낼 수 없는 삶이기는 해도, 이 땅에 살다간 사람 중에 저런 삶도 있구나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빛이 되는 사람들인데 말이다. 그것은 저자가 너무 가까이 있었던 친구였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책을 읽어나가는 중에 발견한 헬렌 니어링의 노년의 징표들은 너무도 인간적이다. 나이에 비해서 훨씬 좋은 건강 상태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래도 늙어감은 피할 수 없는 것.


백내장 수술로 시력이 나빠지고, 피부에는 검버섯이 생겨나고, 청력의 약화로 전화벨 소리와 음악을 듣기 어려워지고, 목소리 구분도 어려워지면서 기억력은 감퇴한다. 그리고 후각과 미각, 치아의 상실도 예외없이 따라온다. 헬렌 니어링의 표현대로 이승의 육신이란 '가련하고 늙은 몸'일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인간의 한계를 고스란히 지닌 채 긴 인생을 좋은 삶, 조화로운 삶에 바쳤기에 헬렌 니어링이 아닐까. 덜 갖고 더 많이 누리는 삶, 단순 소박한 삶이 바르고 진짜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직접 보여준 선각자였지만, 누구나 겪는 노년의 징후 하나 없이 건강하게만 살다 갔으면 어찌 우리가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러고보니 노년이란 얼마나 공평하며 또 얼마나 정직한 것인가.


자기 신체의 기능 저하에 아주 침착하게 적응해나가며, 자신의 노쇠를 결코 불평하지 않았다는 헬렌 니어링. 좋은 삶에 대한 계획이 있는 것처럼 좋은 죽음에 대한 계획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헬렌 니어링. 누구나 가는 노년의 길을, 죽음의 길을 한치의 벗어남 없이 걸어감으로써 노년과 죽음이 우리의 또 다른 삶의 시작임을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저자처럼 헬렌 니어링을 구루(guru, 현자 또는 스승)로 삼아 명상에 들지는 못한다 해도, 나이들어감을 자연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몸으로 보여준 헬렌 니어링에게서 깊은 위로를 받는다. 다시 한 번 단순·소박·간결하게 살기로 마음 먹는다.

덧붙이는 글 | (헬렌 니어링, 또 다른 삶의 시작 On light alone / 엘렌 라콘테 지음, 황의방 옮김 / 두레, 2002)

덧붙이는 글 (헬렌 니어링, 또 다른 삶의 시작 On light alone / 엘렌 라콘테 지음, 황의방 옮김 / 두레, 2002)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