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시불여지리(天時不如地利)

등록 2002.06.14 09:13수정 2002.06.1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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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앉아 있어도 등줄기에서 저절로 땀이 흘러내린다. 나는 흐르는 땀을 훔치며 교실로 들어선다. 벌써 한 학기가 다 끝나간다. 이제 이 시험이 끝나고 나면 한 주일 수업만 남았다.

아무리 더워도 시간은 흘러가는 법이지. 땀을 바가지로 흘려도 일주일이야 지나가지 않겠어? 그렇게 자위를 하며 나는 시험지 쥔 손에 힘을 준다. 그렇지만 너무 더운 날씨다. 잠깐 사이에 시험지에 땀이 밴다.

오존층이 파괴되고, 호주 하늘에 구멍이 뚫려 햇빛이 그냥 쏟아진다더니, 이게 다 인간이 만든 재앙 아닌가. 아니 내가 갑자기 이거 무슨 쓸데없는 생각이야. 당장 시험 감독이나 열심히 해야지. 아무래도 더위를 먹은 탓이나 아닌지 몰라.

그래서 그런지 멀쩡한 시멘트 계단이 푹푹 빠지는 것만 같다. 이번 방학에는 보약이라도 한 재 지어 먹어야 할까. 기가 허해서 잡생각이 많아지는 건지도 몰라. 하긴 내 나이 벌써 마흔이니 기가 허할 나이도 됐지.

"맹 선생, 몇 반이야?"
잡생각에 잠긴 나를 누군가 툭 친다. 환갑이 가까운 오 선생이다. 그의 흰머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늘어져 보인다.이런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야. 겨우 나이 마흔에 저런 노인네 선생님도 계신데.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린다.

"삼 학년 팔 반이요."
"저런. 고생 좀 하겠는데. 그 반 유명하지. 눈동자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러울 걸."
요즘 삼 학년은 컨닝 때문에 난리다. 내신 성적을 좋게 받아야 고등학교 진학에 유리하니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컨닝을 하고, 감독 교사는 그걸 사전에 막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삼 학년 팔 반은 그 중에서도 유명짜하다. 벌써 이번 시험에서만 첫날부터 세 명이 부정행위로 적발되었고, 감독에 들어갔던 아무개 선생은 혀를 휘휘 내둘렀다.

"말도 말아. 글쎄 책상이 온통 새까맣더라니까. 한두 녀석이라야 어떻게 하지, 원."
그 반은 담임부터가 유별났다. 자기 반 성적을 높이기 위해 공부 잘 하는 아이들에게 과목별로 예상 문제를 뽑아오게 했고, 심지어 작년 시험 문제까지 복사해 나누어줄 정도였다. 특히 한문이 그의 전략 과목이었다. 조금만 공부해도 점수가 잘 나오고, 몽둥이로 닥달을 해대면 손쉽게 외울 수 있는 과목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전부 제자리에서 일어나도록."
나는 들어가자마자 아이들을 일으켜 세운다. 영문을 모르는 아이들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난다.
"우선 책상 위에 쓴 것은 모두 지우도록."

내 말이 끝나자 몇몇이 볼멘 소리를 내뱉는다.
"에이."
"다 글렀네."
한 절반 가까이가 책상 위에 적은 것들을 지우느라 부산하다. 책상에 침을 뱉어 지우는 녀석도 있다.


"자, 다 끝났으면 책상은 그대로 두고, 모두 오른쪽으로 한 줄씩 옮겨 앉는다."
아이들이 자리를 옮기느라 잠시 소란이 인다.
"거기 벽에 써놓은 것도 다 지워라."
벌써 한 오 분 남짓 지나간다.
"시간도 없는데."
"빨리 나눠줘요."
아이들 불만이 대단하다.

"걱정하지 마라. 쉬는 시간 오 분 더 시험시간으로 돌려 줄테니."
나는 바삐 시험지와 답안지를 나누어준다.
"부정행위는 용서하지 않겠다. 공부한 만큼 보도록. 공부를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남의 것을 보는 행위는 죄다."
나는 일부러 최대한 위엄을 갖추어 저음으로 한마디한다.

시험지를 받자 모두들 문제를 푸느라 조용하다. 한 삼십 분이 지나자 다 푼 녀석들이 하나 둘 자리에 엎드리기 시작한다.

그때, 왼편 쪽 중간쯤의 두 녀석이 심상치 않다. 한 녀석은 발을 앞쪽으로 쭈욱 뻗고, 다른 녀석은 자기 의자 밑에 발을 밀어 넣고 있는데, 그래서 두 녀석은 서로의 발이 마주 닿아 있다. 그런데 뒤의 녀석 발이 일정한 간격으로 앞 녀석의 발을 몇 번씩 쳐주는 게 아닌가.

아하, 저게 발치기라는 거구나. 서로 약속을 하고, 일정한 시간에 순서대로 발을 쳐서 답을 가르쳐주는 방법이다. 한 번 치면 일 번, 두 번 치면 이 번, 다섯 번을 치면 오 번, 슬쩍 문대주면 모르겠다, 그리고 한 오 초 쉬었다가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면 다음 번호의 답인 발치기 수법이다.

나는 두 녀석에게로 다가간다. 두 녀석은 내가 다가가자 움찔하며 발동작을 멈춘다.

나는 지나가는 척 하면서 붙어 있는 녀석들의 발을 툭 친다. 그리곤 낮게 중얼거린다.
"끝나고 따라 나오도록."
두 녀석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다.

몇몇 녀석이 흘끔흘끔 나를 쳐다보며 그야말로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지만. 부릅뜬 내 눈과 마주치자 어마 뜨거워라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만다. 아마도 텁수룩한 수염에 빗질조차 하지 않은 머리카락, 두꺼운 안경알 너머로 제대로 보이지 않는 작은 눈에 지레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다. 더구나 내가 수업도 들어가지 않는 반이니 감독교사의 성격조차 파악이 되지 않을 테고 말이다.

끝나는 종이 울리고, 오 분 정도 지나 답지를 걷는다. 교실을 나서며 보니 아까 컨닝을 한 두 녀석이 여전히 흙빛의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눈짓으로 따라 나오라는 신호를 보낸다. 중앙 계단을 통해 내려가는 나를 두 녀석이 엉거주춤 따라온다. 그 계단은 아이들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더구나 오 분 늦게 나와서인지 아무도 없다. 녀석 둘은 그제서야 내게 매달린다. 아무도 없으니 용서를 빌기에 적당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인가보다.

"선생님 용서해주세요."
"잘못했어요.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몇 문제나 컨닝 했나?"
움찔하더니 한 녀석이 마지못한 듯 대답을 한다.

"네 문제요."
"정말인가?"
"틀림없습니다."
나는 두 녀석의 답지를 들춰 확인해 본다. 정말 앞의 네 문제는 답이 같고, 다음부터는 조금씩 틀리다.

"좋아, 따라와라."
나는 녀석 둘을 교무실로 데리고 온다. 교무실은 시험 시간에 미처 수정을 못한 아이들이 쫒아 내려와 답지를 고치느라 어수선하다. 나는 구석인 내 자리로 두 녀석을 끌고 온다.

"네 문제라고 했지?"
"예."
"그럼 너희들이 컨닝한 네 문제는 틀린 것으로 한다. 원칙대로라면 영점 처리를 해야 하지만 솔직하게 네 문제를 보았다고 고백했으니 컨닝한 것만 틀린 것으로 해주겠다."

두 녀석이 고개를 꾸벅한다. 이런 걸 보면 중학생 아이들은 아직 순진하다. 딱 잡아떼면 난감할텐데 컨닝한 것을 인정하고(컨닝 페이퍼가 있는 것도 아닌데), 게다가 컨닝한 문제까지 정확하게 고백한다.

나는 컴퓨터용 싸인펜을 꺼내 네 문제의 답에 이중 기표를 하게 한다. 이중 기표가 되면 그 문제는 틀린 답으로 처리되기 때문이다.
두 녀석이 컴퓨터용 싸인펜으로 앞의 네 문제의 답에 하나씩 더 표기를 한다.

"그냥 이것으로 끝내기는 좀 그렇지?"
"......"
"......"
"내일 아침까지 충분한 자기 반성이 될 수 있는 반성문을 써온다. 자기를 속이는 일보다 나쁜 일은 세상에 없다. 부정행위는 자신을 속이는 행위다. 알았어?"
"예."
"알았습니다."

두 녀석이 다시 꾸벅 하고는 풀죽은 걸음으로 교무실을 나선다. 교칙에는 부정행위를 하면 그 과목 영점 처리에 유기정학인가 하는 처벌을 받게 되어 있지만, 그렇게 곧이곧대로 처리하는 선생은 거의 없다.

부정행위 한 문제를 오답 처리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다. 사실 부정행위를 적발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지경이다. 책상 위에 써놓는 것부터가 부정행위이고, 학급당 인원수가 너무 많아 고개만 살짝 돌려도 옆의 답안지가 보일 정도니, 그런 것까지 적발하면 학교가 온통 처벌 공고문으로 가득 찰 것이다.

어떤 학교는 고육책으로 학부모가 시험감독에 참여한다지만, 그것도 괜히 교권이 침해되는 것 같아 씁쓰레하다.

무엇보다도 학습 효과가 저마다 다른 아이들을 하나의 평가 기준에 맞춰 줄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지 싶다. 입시 제도가 바뀌고 내신 평가가 어떻고 해도, 그 모두가 결국은 성적순으로 아이들 줄세우기가 아니고 뭔가 하는 자괴감이 채점을 할 때마다 드는 것은 내가 아직 우리 교육 방법에 적응하지 못한 탓일까? 평화롭고 즐거운 평가방법은 진정 없는 것일까?

역시 잡생각에 골몰하다 나는 문득 몇 년 전 어느 고등학교 교사 로부터 들은 시험감독의 한 장면을 떠올리고 피식 웃는다.

수능시험이 생기기 전, 그러니까 학력고사를 보던 때였다. 고등학교 삼 학년 모의 학력고사 감독에 들어간 어느 날이었다. 모의 학력고사는 내신과도 관련이 없고, 그저 자신의 현재 성적을 알아보자는 취지에서 보는 시험이니, 컨닝도 않고, 대학을 포기한 아이들은 보지 않아도 되는 그런 시험이었다. 그래서인지 감독 교사도 별로 부담을 갖지 않고, 마치 무감독 시험과 같은 분위기였다.

그래도 반 평균에 신경과민인 담임은 있기 마련이고, 그런 담임에게 몽둥이 찜질을 당하기 싫은 어떤 반에서는 드물게 부정행위가 있기도 했다.

그날도 나는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편안한 마음으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교실을 뚜벅뚜벅 걸어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쳐다본 칠판에 둥글고 작은 햇빛이 반사되어 있는 게 아닌가.

아하, 누구 시계가 햇빛을 되비치고 있구나. 나는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칠판 왼쪽 위에 '모의학력고사'라고 적당히 간격을 두고 써 있는 글씨를 규칙적으로 그 햇빛이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햇빛이 움직일 때마다 몇 녀석이 고개를 들고 그 햇빛을 쳐다보다가 또 답안지에 답을 적곤 했다.

나는 햇빛이 시작되는 곳을 따라 고개를 끌고 갔다. 창가 뒤쪽에 자리잡은 한 녀석이 빛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자기 답안지를 보면서 칠판의 '모의학력고사'라는 글자에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빛을 보내고 있는 녀석에게 다가갔다.

"임마, 뭐 하는 거야?"
녀석이 씨익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문제지에 코를 박고 있던 아이들이 고개를 들어 소리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천시와 지리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아이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천시는 지리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만 못하다고 하셨잖아요."

맹자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천시불여지리, 지리불여인화(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라는 문장이 있었다. 아무리 시간을 이용해 공격을 해도 적이 높은 성벽과 가파른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으면 지리가 좋아 이기기 힘들고, 또 아무리 지리가 좋은 성 안에 자리잡고 있어도 사람들이 인화단결 되어 있지 못하면 적에게 성을 내줄 뿐이라는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났다.

"마침 햇빛이 제 자리에 비추어 반사시킬 자연적 조건이 되어 있으니 이야말로 천시요, 또 제 자리가 그 햇빛을 받아 칠판에 되쏠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으니 지리가 아니겠습니까?"

허, 이거야말로 청출어람이로군. 나는 내심 감탄을 한다. 햇빛을 받아 적당한 시간에 칠판에 비춰줌으로써 하는 컨닝이라니, 정말 대단한 발상이었다.

"임마, 그 머리로 공부를 하면 훨씬 남는 게 많겠다."
나는 녀석의 머리통을 툭 쥐어박았다.
그때 옆자리의 한 녀석이 냉큼 한마디 주워 삼켰다.
"그건 천시, 지리만이 아니라 인화까지 삼위일체군. 혼자 컨닝한 게 아니라 몇 사람이 인화단결해서 이루어진 컨닝 아닌가?"
그 말에 그만 교실은 떠나갈 듯 웃음으로 가득 찼다.

내신에 적용되지 않으니 서로가 경쟁자도 아니고, 그러니 컨닝이 웃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 것이다. 컨닝하는 아이를 붙잡았지만, 그날의 시험감독은 푸근했으리라.

나는 오늘 붙잡은 두 녀석의 컨닝을 떠올리고, 풀이 죽어 교무실을 빠져나가던 아이들 머리 위로 영원히 풀 수 없는 우리 교육계의 숙제인 학습평가라는 바윗덩이가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아 암담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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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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