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정복하다

등록 2002.06.19 00:20수정 2002.06.19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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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게임 종료 3분 전에 설기현이 동점골을 터트리고, 연장 후반 4분을 남겨놓고 안정환이 골든골을 터뜨린 너무도 극적인, 지금까지의 '한·일 월드컵'의 모든 경기 중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경기 내용은 더 이상 말할 필요 없다. 이 급한 글에 그 감격을 기록하는 일은 너무도 벅차고 힘겹다.

나는 우리 선수들이 특히 포르투갈 전에서 보여준 체력을 바탕으로 한 기민성과 부지런함을 발휘하고 미들 필드에서부터 악착같이 달라붙는 압박 축구의 면모를 끝까지 잘만 유지한다면 이탈리아를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보았다. 일본과 터키 전에서, 날아오는 코너 킥 볼을 향해 터키 선수 혼자 솟아오르는 것과 같은 일을 우리 선수들은 절대로 허용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했다.

일본의 16강전 패배가 우리 선수들에게 좋은 자극을 안겨 주리라는 생각도 했다. 개최국의 체면을 홀로 안게 된 것은 물론이고 전 아시아의 명예를 혼자 양어깨에 걸머진 상황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드디어 알프스를 넘었다. 강력한 우승 후보 중의 하나였던 포르투갈을 무너뜨린 우리는 마침내 알프스를 넘어 또 하나의 우승 후보인 이탈리아마저 정복했다. 이제는 키레네 산맥을 넘을 차례다. 우리는 키레네 산맥을 넘어 또 하나의 축구 강국인 스페인을 무찌를 것이다.

당당히 월드컵 8강에 오르고 이제 4강을 노릴 정도로, 우리 한국 축구가 이만큼 발전했다. 한국 축구의 발전은 우리 국력의 눈부신 성장을 반영한다고 해도 무방할 터이다. 국력이 있기에 선수들을 양성하고, 히딩크 감독을 영입하고, 월드컵 대회를 개최할 수 있지 않은가.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중학생 시절, 매일같이 카스테라 빵과 사과 한 개씩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축구부에 들었던 나로서는 격세지감이 더욱 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48년 전 미군 수송기를 얻어 타고 24시간의 비행 끝에 스위스에 도착한 다음날 어지럼증을 느끼며 헝가리와 경기를 벌였던 축구 선배들, 이제는 모두 70대가 되신 그 어른들의 감회가 누구보다도 클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오늘의 축구 발전과 관련하여 생각의 반경을 넓혀야 한다. 축구 강국이 되고 국력이 커졌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가 함께 발전을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단시간의 성공에 집착하는 조급증과 냄비 근성이 가장 큰 단점이다.

히딩크 감독의 지난 1년 6개월을 돌아보면 그를 비난하는 별의별 소리들이 많았다. 소위 축구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시비와 질타는 조급증과 냄비 근성의 발로였다. 최근에 인터넷에 오른 최대 중앙일간지 <조선일보>의 히딩크 비난 보도 모음들을 보면 너무도 재미있다. 오죽하면 이 국민 축제에 <조선일보>는 빠지라는 말이 나오겠는가.

우리는 오늘 히딩크 감독의 1년 6개월을 지탱해 온 원동력은 무엇이며, 그의 축구 철학이 왜 우리에게 교훈이 되어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히딩크 감독은 지도자의 철학과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명확하게 보여 주었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리더십의 교훈'은 사실 별다른 게 아니었다. '소신, 선수 선발의 공정성, 원칙과 규율 중시, 전문지식 활용, 혁신 추구' 등은 우리에게 결코 생소한 것이 아닌, 우리가 그 동안 잊고 살았거나 무시해 온 것들이었다.

우리는 오늘의 '국민 대축제' 속에서 원칙과 상식과 철학이 바탕을 이루는 국민 정신의 성숙을 함께 얻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위 기사는 <대전일보> 19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위 기사는 <대전일보> 19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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