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고기와 도덕책

<맛있는 추억>

등록 2002.06.25 23:49수정 2002.06.26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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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가 외국인들에게 가장 먼저 내놓고 자랑한 음식이 아마도 불고기였을 것이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영어회화 교육 붐이 일었을 때, 교재마다 한국음식을 소개하는 단락에는 어김없이 'Bulkogi'가 등장했다.

하지만 요즘 외국인들에게 가장 매력 있는 한국음식을 꼽는다면 오히려 김치나 청국장 같은, 우리 스스로 냄새가 고약하다고 생각해서 서양 사람들은 절대 먹지 못할 것이라고 지레 숨겨왔던 것들이 앞설 것이다.

우리처럼 고기 한 번 먹는 것이 집안 행사처럼 여겨지던 사람들도 아니고, 오히려 고기를 주식으로 삼는 서양 사람들 입맛에야 조미료와 설탕으로 '국물'을 내는 애매한 쇠고기볶음보다는 냄새가 좀 역하더라도 김치나 청국장이 강한 개성을 가진 한국의 맛에 훨씬 더 끌렸을 법하다. 불고기란 애초에 외국 사람들 입맛에 맞을 듯한 음식이라기보다는 한국인들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었을 것이다.

2.

적어도 내가 다니던 시절, 국민학교 도덕책 내용의 대부분은 '북괴 공산도당'에 관한 것이었다. 노골적으로, 혹은 정확하게 명명하자면 '반공'이어야 했을 이 책에 '정치'나 '사회' 같은 완곡한 이름은 아닐지언정, '도덕'이라는 생뚱맞은 이름이 붙은 사연은 새록새록 궁금하다.

어쩌면 공산주의를 단순히 '잘못된' 정치이념이나 '우리와 다른' 정치체제가 아니라, 국민학생 꼬마들의 입에서마저 모독되고 씹혀나오는 '패륜과 부도덕'의 수준에 위치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도덕책에 그려진 북쪽 세상. 서로 감시하고 고발하도록 강요하여 '자식이 부모를 고발하는' 패륜을 조장하고, '낙엽으로 배를 만들고 모래알로 쌀을 만드는' 허황된 김일성 신화나 날조하는 것이 괴뢰도당의 만행상이라면, 결혼과 이사의 자유가 없고 강제노동에 시달리며, 못 입고 못 먹는다는 것은 북한 주민들의 불쌍한 생활상이었다.

그 중에서도 우리 또래들의 마음에 꼭 와서 닿는 문제는 '먹는 문제' 였다. 우리 중 누구도 멀지도 않은 서울 구경 한 번 못해본 주제에 '이사도 마음대로 못간다'는 사실에 대해 가슴 답답하게 느끼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도록 한 것은 이런 구절이었다.

"북한 주민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은 명절이나, 김일성 부자의 생일뿐이다."

월급이 얼마고, 사는 집이 몇 평이고 하는 식의 비교였다면 엄마들 신세한탄이나마 귀에 익어 알아들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운운하는 어감만으로는 그들과 우리의 실감나는 비교가 되지 못했다.

그나마 우리가 저들보다 행복하다는 느낌을 가지게 하는 것은 삽화 속 북쪽 아이들의 기워진 자루옷이나 오막집 군데군데 갈라진 벽들, 또 그쪽 아이들은 부모님도 없이 할머니 할아버지들하고만 사는지 움푹 패고 푸석푸석 갈라진 어른들 얼굴이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으로 가슴에 느껴지는 것은 그 맛있는 '고기'를 먹는 빈도였다.

이런 대목을 접하며 대개의 친구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우월감에 가득찬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명절날에만 고기를 먹는대.'

국민학교에서 대학원까지 남들이 다니는 학교란 학교는 모조리 다니면서 무수한 또래집단을 거치는 동안, 나라는 인간이 가지는 일관된 특징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분위기 깨는 소리'를 잘 한다는 점이다. 다들 죽여야 한다 죽여야 한다 할 때, '살리면 안될까?'하는 것이 바로 나다.

축구경기를 보면서 다들 반칙이다 반칙이다 흥분할 때, '반칙 아닌 것 같은데'하는 것이 또 나다. 그것은 아마도 남다른 창조성이나 비판의식과는 별 상관없는 어깃장, 내지는 풀죽은 열등감 속에서 삐딱하게 자라난 도전의식이었을 것이다.

나는 혼자서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우리 집에서 고기를 먹은 것이 언제였더라…그래, 지난 2월, 작은 누나 생일날이었다. 그렇다면 그 전에는? 분명히 설날이었다. 더 거슬러올라간다 해도 추석이거나, 또는 누군가의 생일. 아니면 부모님이 몇 년 전부터 누군가에게 빌려주고 못 받던 빚 몇 만원을 받은 날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짝에게 가만히 물었다.

"야. 너희 집에서는 명절 아닐 때도 고기 먹냐?"
"당연하지."
"언제 먹었는데?"
"... 설날."

'고기문답'은 그렇게 앞뒤로, 옆으로 번져나갔고 '명절과 김일성 부자 생일날만 고기를 먹는 불쌍한 북한 동포들'보다 별 나을 것이 없는 자신의 처지를 발견한 우리 몇몇은 엄청난 혼란과 충격에 빠져들었다.

도시락 반찬통에 분홍색 밀가루 소시지 몇 조각만 고정적으로 담아올 수 있어도 최고의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우리 교실에서, 명절과 가족 생일을 빼고도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아이는 결코 많지 않았다. 더구나 우리 반 친구들 중 절반은 넘게 단칸 셋방에 살던 80년대 초반 인천 변두리에서 거주이전의 자유와 직업선택의 자유라는 말도 알고보면 별 것 아니었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허위의식이 재주를 부려, 우리나라 사람들은 스무 평 아파트만 소유해도 개혁을 두려워하나보다. 물론 사람들이 우둔해서 제 손에 쥔 것이 그리 커 보여서가 아니라 그나마 절대 빼앗겨서는 안되겠다 싶은 소중한 것이어서일 게다만.

3.

아버지가 선생님이라는, 그나마 안정적인 직업을 가졌던 덕분에 남들처럼 빚쟁이에 쫒겨다니거나 '야반도주'를 한다거나 하는 험한 경험은 면할 수 있었지만, 우리 집도 고기를 자주 먹지는 못했다.

내 기억에, 불고기를 처음 먹어본 것은 국민학교 4학년 때였다. 물론 쇠고기나 돼지고기 한 근씩 사다가 볶아먹은 적이야 왜 없겠는가만, 그것도 일종의 '불고기'일 수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었다.

나는 불고기라면 중국집 주방장이 알콜 따위를 부어 불을 붙이는 재주를 부리며 만드는 것 비슷한 거창한 요리라고만 생각했었다. 화려한 불길 속에서 '특별하게' 익혀지는 맛깔스런 쇠고기. 그래야만 불고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처음 먹어본 불고기. 그것은 전혀 생각 밖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불고기 한 번 먹어보자'고 나선 길도 아니었다. 그날 우리 가족이 먹고자 했던 것은 분명히 갈비탕이었다.

어느 휴일날, 무료하게 뒹굴거리던 우리 다섯 식구는 뭔가 외식을 하자는 쪽으로 몰려가고 있었고, 아버지가 아버지 학교 선생님들이 단체로 가서 회식을 자주 하는 한식집으로 가자고 이끌었다. 그 집 갈비탕이 제법 맛있다는 설명이었고, 가족 외식때면 흔히 먹던 짜장면보다는 그것도 괜찮겠다 싶어 따라나선 길이었다.

식당 주인은 단골 손님, 그것도 단골손님 수십 명을 끌고다닐 수도 있는 사람의 가족 나들이를 맞아 굉장히 황송해했다. 그저 바깥 탁자에 앉으려던 우리는 주인의 강권으로 방으로 밀려들어갔고, 방석에 앉아 보리차를 마시며 갈비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서 가스 버너와 이런저런 반찬이 한 상 차려졌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갈비탕 밑반찬이 꽤 푸짐하구나, 하고만 생각했다. 가족식사니까 갈비탕을 버너 위에 한꺼번에 데우나보다 하는 촌스런 상상마저 했던 것도 같다.

어쨌든 우리가 기대했던 것은 쇠고기 푸짐한 갈비탕 다섯 그릇이었다. 그런데 또 얼마 후에 주인 여자가 직접 들고 들어온 것은 고기와 양념이 그득히 담긴 금빛 등등한 불고기용 석쇠였다.

"어, 우리 갈비탕 시켰는데..."
"서비스예요. 그 동안 감사해서요."
"아니, 이건... 이건..."
아버지는 굉장히 당황한 목소리였고, 주인은 다 예상했다는 듯이 여유있게 고기와 불을 손보더니 생긋 웃으며 '맛있게 드세요' 한마디 하고는 나가버렸다.

그리고 우리 삼남매는 영문을 몰라 젓가락도 못들고 아버지 얼굴만 쳐다보았다.
"어떻게 해요? 그냥 먹어도 되는 거예요?"
어머니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던 아버지.
"일단 차렸는데 먹어야지, 뭐. 나가면서 돈 내면 되니까. 자, 먹자.

내가 알기에 주인은 끝내 돈을 받지 않았고, 우리 식구들은 넉넉히 담아준 불고기를 포식했다. 그때, 나의 아버지가 일산에 있던 조그만 특수학교의 교장으로 나간 첫 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의 직책은 '교장 서리'였다. 그래서 그날의 불고기는 아버지가 교장으로서 지역의 업자들로부터 제공받은 첫번째 '향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화려한 불꽃 속에서 조리되는 희한한 요리일 거라는 상상과는 달리, 불판 둘레로 고이는 국물에 밥을 말아먹었던 그 요리는 내 인생에 처음 맛본 불고기였다.

'어머니와 고등어'라는 노래를 불렀던 김창완이라는 가수의 어머니는 '내가 고등어 한번 제대로 못먹인 엄마가 된 것 같아서 서운하다'고 했던가. 잡글이나마 남들도 보는 지면에 이런 얘기를 자꾸 쓰면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가 조금 서운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던 시절에, 적지도 않은 삼남매를 한 번도 허기지지 않게 길러주신 부모님 공을 잘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적어야겠다. 그리고 우연히 불고기라는 음식을 우연히 조금 늦게 접했을 뿐, 남달리 궁색한 어린 날은 절대 아니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말씀도.

지금은 천박하게 느껴질 정도로 단 맛의 고기요리, 불고기. 그래도 그 이름만큼은 아직도 거창하고 화려하다. 불고기라는 명성에 압도당하던 어린 시절은 보릿고개 넘던 부모님만큼 궁색하지도 않지만 '먹고 싶은 것 다 먹어가며' 살지는 못하던 시절의 아기자기한 미각적 환상을 다시 떠올려,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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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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