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복 아저씨가 정년퇴임을 했다. 이름처럼 순하고 복스럽게 생긴 둥글둥글한 얼굴에 온갖 감회를 담고, 식장도 행사도 없는 정년퇴임을 했다.
"내일 날짜로 기능직 이순복씨께서 정년퇴임이십니다. 상조회 준회원 자격이므로 그에 준하는 비용이 월급에서 공제됩니다."
말뚝이가 직원회의 사회를 보다가 말미에 잊은 듯 그렇게 덧붙인 것으로 끝이었다. 어쩌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둥굴둥글한 얼굴에 환하게 웃음을 담고 허리를 구십 도로 굽혀 인사를 하던 아저씨. 그의 인사에는 선생님을 대하는 초등학교 학생의 정성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일이 끝난 오후, 학교 앞 막걸리집에서 만나면 얼른 먼저 빈 사발을 건네며 "아이고, 선생님. 제 잔 한 잔 받으셔유"하고 또 사람 좋게 웃던 아저씨였다. 두부와 돼지고기를 숭숭 썰어 넣고 끓인 김치찌개 한 냄비면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지던 아저씨는 학교의 일꾼이었다.
말뚝이의 말을 듣자, 지난 늦봄 후관 정원의 꽃밭에 호미를 들고 오전 뙤약볕을 혼자 다 견뎌내며 김을 매주던 아저씨가 떠올랐다. 화단에는 프록스가 막 꽃대를 올리고 있었고, 접시꽃도 키를 늘이느라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고추와 상추도 잘 자라고 있었는데, 아저씨는 그 화단의 잡초를 뽑고 흙을 북돋워주는 중이었다.
"볕이 따가운데 모자라도 쓰고 하시지요."
내가 수업을 마치고 나오다 아저씨를 보고 그렇게 한 마디 하자 아저씨는 또 사람 좋은 웃음을 얼굴에 가득 담고 수줍은 듯 한 마디했다.
"괜찮아유. 사람이나 화초나 햇볕을 잘 받아야 실하게 자라지유."
나는 그런 아저씨의 손길에 한층 싱싱해지는 상추와 고추를 보며, 칠월 어느 날 아저씨는 길쭘한 고추를 따고 싱싱한 상추를 씻어 한소쿠리 담아내며 이렇게 말할 것이라는 상상만으로 마음이 환해졌었다.
"선상님들. 이것 좀 자셔보셔유. 농약 안치고 키운 거라 괜찮을거유."
그리고 그런 날 저녁은 막걸리에 상추쌈으로 때아닌 학교 회식이 이루어질 것이리라.
"아저씨 손길에 화초들이 금방 살아나는 것 같네요."
가뭄이라 타들어 가던 화초들이 정말 흙을 북돋워주자 생기를 찾는 것 같아 돌아서며 한 마디했다.
"그럼유. 호미가 거름인데유."
돌아서는 내게 아저씨가 어눌한 말로 대답했다. '호미가 거름이라. 가끔 아저씨는 도통한 사람 같단 말야.'
아이들에게는 이웃집 아저씨같이 마음 좋고, 선생들에게는 숱한 고생으로 살아온 사람의 삶의 철학 같은 말을 들려주던 이 학교의 살아있는 증인인 아저씨였다. 선생들은 사오 년이면 다른 학교로 옮겨가지만, 아저씨는 이 학교에서만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왔다. 그리고 이제 정들었던 학교를 그만두어야 하는 날이 온 것이다.
비는 시간, 나는 아저씨가 계신 목공실 옆 골방으로 찾아가 작별의 인사를 나눈다. 학교를 그만두면 무엇을 하실 거냐고 묻자 아저씨는 또 빙그레 웃으며 수줍은 듯 입을 연다.
"뭐 별 거 있남유. 고향에 내려가 농사나 지어야쥬."
학교에 있으면 누구나 다 선생 같다. 교사만이 선생이 아니라 목공실 기사 아저씨도, 인쇄실 아저씨도, 서무과 사람들도 모두 아이들에게 선생이다. 그런데 진짜 선생은 누구일까? 나는 이순복 아저씨야말로 선생이 아니면서 오랜 세월동안 진짜 선생 같은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
다음날, 수업을 하다 보니 아저씨가 긴 그림자를 늘이며 운동장을 걸어나간다. 그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양복을 입고, 휘청휘청 걸어가는 모습이 쓸쓸해 보인다.
며칠 뒤 교장의 정년 퇴임식이 성대하게 열린다. 학부모회다 어머니회다 숱한 사람들이 축하 꽃다발과 기념품을 가져오고, 국민의례부터 약력, 송공의 말과 축사가 이어지고, 아이들이 마지막 인사로 구령에 맞춰 허리를 굽힌다.
식이 끝나고 교직원 식당에 푸짐한 음식이 차려진다. 온갖 치사와 축하의 말 속에 뷔페식의 뒷풀이도 끝나자 승용차 뒷자리에 몸을 젖힌, 이제는 퇴임한 교장이 앉아 있다. 평교사에서 출발하여 부장과 교감을 거쳐 드디어 한 학교의 책임자가 된 사람, 그러나 퇴근 시간을 체크하기 위해 수위실에서 나가는 선생 이름을 적게 하던 사람, 지시에 따라 억지로 전일제 특별활동을 실시하지만 가능하면 학교 밖으로는 나가지 말라고 하던 보신파 교장, 아이들 가르치는 일보다는 행정적 업무를 더 중요하게 여겨 틀에 맞게 쓴 결재서류가 아니면 수업과 상관없이 즉각 다시 해오게 하던 사람, 이 학교가 자신의 정년퇴임교니 절대 문제가 일어나서는 안 된다며 모든 일을 다음 해로 미루어놓던 무사 안일의 한 사람이 이제 떠나간다.
승용차가 스르르 미끄러져 나가는 운동장을 바라보며 나는 자꾸 며칠 전 떠나간 이순복 아저씨의 뒷모습이 승용차 뒤에 엉기는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학교를 떠나고, 다음 날에는 새 교장이 부임한다. 오랜 세월 동안 행정직으로 있었다는 새 교장의 부임 인사는 그답다.
"나는 교단에 선 경험이 몇 년 되지 않습니다. 일찍 행정직으로 진출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육청이나 교육부에 아는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여러 선생님들께 그 경력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들리는 소문으로 그는 학교에 서너 해 근무하다 바로 장학사로 특채되었단다. 그리고 지금까지 교육청과 교육부의 온갖 요직을 거치면서 행정가로서의 권력을 지켜왔단다.
"행정직 경력이 우리한테 도움이 된다는 말은 뭐야?"
"그 뭐 자기는 아는 사람 많으니 잘 보여야 좋은 학교로 보내준다 이거 아니겠어?"
"좋은 학교? 나 참. 교장은 교사들이 교육을 잘 할 수 있게 도와줘야 되는 역할 아닌가? 자기한테 잘 보여야 근무평정도 높게 주고, 인사발령에도 좋을 거라면 그걸 어디 교육적 발상이라고 할 수 있어?"
"우리나라에서 교장 되려면 교육에 대해 생각해선 안 된다니까. 수업보다는 행정적 업무를 잘 해야 하고, 교장이나 교감 눈에 들어야 근무평점을 높게 받고, 그래야 장학사 시험이라도 볼 수 있지. 점수 관리도 해야 하니, 논문 쓰고 시범학교 점수도 따고, 그러니 언제 아이들 면담하고 수업 준비하겠어. 구조가 그런데서 교장이 탄생하는데, 아이들을 생각하고 교사의 수업을 위한 도우미로서의 교장이 얼마나 될 것 같아?"
"왜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들처럼 교장을 선출하고 직책을 보직화하는 일은 못하는 거지? 안되면 교육 주체들이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내서 좋은 사람을 초빙하는 방법도 있고 말야."
"허허, 사람 참 순진하긴.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 장, 감인데 그 기득권 내놓을 리가 있어?"
선생들은 새로 온 교장의 이야기 끝에 교장 승진 제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한 마디씩 한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퇴직한 이순복 아저씨의 후임은 채워지지 않는다. 아저씨의 빈자리는 더 커져 보이는데, 학교는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물처럼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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