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의 종말'은 현재 진행 중

[문화유산답사25] 아직도 파괴가 자행되고 있는 '경희궁'을 찾아

등록 2002.06.28 10:30수정 2002.07.04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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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도 무더운 하루, '붉은 악마'들과 축구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이들까지 나서서 밤새 '축제'를 벌였던 세종로에서 시티은행이 있는 새문안길로 들어선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구세군회관을 지나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경희궁(慶熙宮). 이름에는 '궁'자가 들어가지만 기실 궁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궁이 바로 경희궁이다.

5백년 왕조 조선의 수도였던 서울에는 큰 궁궐이 다섯 개가 있다. 조선 궁궐의 맏형 경복궁과 '비운의 궁' 경운궁(덕수궁), 세계문화유산 창덕궁과 담을 함께 하는 창경궁이 그것이다. 그런데 나머지 하나의 궁은 어디인지 쉬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나머지 한 궁 경희궁은 우리들의 기억에서 어느새 잊혀져 버린 존재이기 때문이다.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고 그곳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경희궁은 그래도 어느 정도의 부속건물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순종이 조선의 왕이 되던 시기부터 경희궁은 왕조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즉 당시 한반도에 들어와 있던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자제들을 위한 교육시설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마침 친일 단체인 일진회가 이용하고 있던 독립관에 거류민단립 중학교를 세우게 된다.

독립관은 앞서 [문화유산답사16]에서 간단하게나마 살펴보았듯 서대문 형무소와 독립문 사이에 위치한 단독 건물이다. 이 거류민단립 중학교는 약 1년 뒤 조선통감부, 이후 조선총독부로 이관되면서 오늘의 답사지인 경희궁 자리로 이전을 하게 된다. 명확한 이전 일자를 알 수 없는 이 학교의 이사로 인해 경희궁은 실로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훼손 당하게 되고 특히 1920년대를 지나며 경희궁 부지가 각종 건물이나 도로의 터로 잘려나감으로써 거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역사는 이성을 잃다가도 이내 제 정신을 차리는 법. 거류민단립 중학교에서 총독부 중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경성 중학교, 경성공립 중학교로 이름을 바꾸면서 그 명맥을 잇던 '경희궁 파괴'는, 곧 찾아온 해방으로 같은 자리에 서울중학교 및 서울고등학교가 들어설 때까지 끝날 줄을 모른다. 그러나 서울고등학교가 강남 서초동으로 이사를 가는 것과 동시에 터의 소유주가 현대건설 등 민간기업으로 바뀌었다가 서울시가 매입을 함으로써 길었던 고난의 시절이 끝나는 듯 했다.

특히 서울시에서는 1985년부터 경희궁의 중심 건물인 숭정전 일대를 중심으로 몇몇 건물의 발굴·복원공사를 진행함으로써 문화재 복구에 대한 의지가 높다는 것을 드러내는 듯 했지만, 일방적인 짝사랑으로 인한 자기 중심적인 해석 때문이었을까. 90년대 후반 들어 경희궁의 내전이나 세자를 위한 동궁, 생활공간 등을 포괄하는 광활한 지역에 서울시립박물관과 서울시립미술관이 들어섬에 따라 경희궁은 다시 한번 이미 다 말라 버린 눈물을 쥐어짜게 된다.

그래도 복원 공사 부분의 일정 부분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점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저 허허벌판이었던 왕조의 공간에 비록 완성도가 많이 떨어지기는 하나 복원의 '의지'는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저자 역시 사람이기에 아련하게 남는 아쉬움은 못내 지울 수 없는가 보다.

먼저 구세군 회관 앞 육교 아래에는 작은 표지석 한 기가 서 있는데, 이 곳이 원래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이 있었던 자리라고 힘겹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 경복궁에도 시멘트로 만들기는 했지만 정문 광화문이 있거늘, 이곳 경희궁의 정문은 1915년 8월 도로 건설과 함께 자리를 옮긴 후 지금까지 그저 이 표지석 한 기가 외로이 정문의 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서서 올라가던 길 쪽을 보면 철골 구조로 만든 울긋불긋한 건물이 길 오른쪽으로 바로 보인다. 개관한 지 얼마 안 된 서울역사박물관(이하 박물관)이다. 물론 경희궁 터에 자리 잡은 것이니 이 박물관에는 경희궁 관련 유적이 있을 것이란 생각뿐만 아니라, 박물관 터 아래에는 왕조의 유물들이 아직 숨을 죽이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터는 경희궁 자리에 잡았지만 박물관에 들어가 보면 경희궁과 관련이 있는 유물은 찾아볼 수 없으니 경희궁 답사를 왔다면 굳이 박물관까지 들여다 볼 까닭은 없으리라.

아, 박물관을 지나기 전에 다리처럼 생겼으되 다리는 아닌 것을 하나 볼 수 있다. 생긴 모습으로 볼 때 경희궁의 금천교를 염두에 두고 만든 다리로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경운궁의 금천교처럼 이 금천교 아래도 그저 웅덩이일 뿐 물은 흐르지 않는다. 금천교가 여기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뒤쪽 구역부터는 원래 경희궁 궁역이었다는 것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박물관이 그 자리를 파고든 것이다. 과연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서인 지 지워지지 않는 의문을 남긴 채.

다리 아닌 다리 금천교를 가볍게 한번 '감상'한 다음, 올라오던 방향으로 오르막길을 조금 더 올라가 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시티은행과 도로를 마주한 자리에 흥화문이 있다. 물론 진짜일리 없다. 앞서 말한 대로 원래의 흥화문은 1915년 도로 건설로 인해 자리를 옮겼다가, 1932년 남산 아래에 이토 히로부미를 위해 짓던 박문사(博文寺)라는 절의 대문으로 팔려갔다. 한 나라의 왕이 살던 궁의 정문이 적국 수장을 기리기 위한 절문으로 팔려나간 것이다.

그 박문사 터에 영빈관에 이어 현재의 신라호텔이 들어설 때까지 호텔의 정문으로 남아 있다가 1988년에야 이르러 제 집 경희궁을 찾아온 흥화문. 그런데 흥화문은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흥화문이 돌아갔어야 할 자리는 현재 흥화문이 서있는 시티은행 앞이 아니라 앞서 지나쳐 온 구세군회관 자리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에 와서 이러한 주장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다른 궁궐들이 그렇듯 뭘 복원하려 해도 이미 그 자리는 상가 건물이나 도로가 점령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흥화문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미 넓어져 버린 도로와 빼곡이 들어찬 빌딩들로 제 자리를 찾기는 힘들어졌다.

번지수를 잘못 찾아 어색해하는 흥화문을 들어서면 '복원된' 경희궁 안이다. 경희궁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등나무 벤치와 정동 옛 대법원 자리로 이사를 가 폐허가 되어 버린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인해 궁이 주는 엄숙함은 느낄 수 없다. 등나무 벤치에서 멀리 숭정문이 보인다. 숭정문 기단을 높게 보이기 위함인 지 움푹 파 놓은 흙을 밟고 매끈한 기둥이나 까맣기만 한 기와 등이 근래에 복원한 것 다운 숭정문으로 오른다.

그다지 넓지 않은 조정에 들어서면 경희궁의 법전인 숭정전이 시야에 들어온다. 물론 새로 지은 숭정전이다. 원래의 숭정전 건물을 보고 싶다면 동국대학교로 가야지 경희궁에 올 일이 아니다. 본래의 숭정전은 일본인 자제들을 위한 중학교 교실로 쓰이다가 일본 불교의 한 종파인 조동종(曹洞宗)에 속한 조계사(曹谿寺)로 팔려나가게 되는데, 해방 후 그 조계사 자리에 들어선 것이 현재의 동국대학교이고, 숭정전은 정각원(正覺院)이란 이름의 불당으로 아직 동국대학교에 남아 있다. 물론 실내를 들여다보며 왕궁의 법전에서 느끼는 맛을 찾기는 힘들다. 세월이 흐르며 불당에 가깝게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새문안길 경희궁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제 막 경희궁 답사의 압권을 하나 만날 참이다. 숭정전에서 자정전으로 넘어가는 곳에 있는 답도가 그것으로, 이건 조선 왕조를 상징하는 봉황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졸작 중의 졸작이리라. 너무 심한 말인지는 모르나 이건 정말 사울 시내 공원에 즐비한 살찐 비둘기나 양계장의 토실한 닭이지 봉황이 아니다. 봉황의 느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아무리 급해도 아무리 예산이 모자라도, 문화재 복원을 하려면 제대로 엄격한 계획 하에 추진해야지 졸속으로 했다가 괜히 왕궁을 찾는 시민들이나 외국인들에게 조선 왕궁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심어줄까 걱정이 앞선다. 한편 여기서 놀란 가슴은 숭정전 뒤의 자정전이나 태령전에 가서도 진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실망과 안쓰러움에 빨리 경희궁을 빠져나가고 싶어질 뿐.

일제의 식민 지배가 시작되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된 경희궁. 근래에 들어서도 그 '사랑이 배제된' 복원으로 인해 다시 한번 파괴된 경희궁. 그 '생각 없음'이 여기서 그쳤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화(禍)는 혼자 오지 않는다고 경희궁의 절망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채 발굴조사도 끝나지 않은 경운궁 터로 이전한다고 해서 문제가 되고 있는 미국 대사관은, 아직 실질적인 공사를 시작하지 않았기에 그나마 다행스럽게 보일 정도이다. 역시 발굴 조사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경희궁 터에는 이미 '경희궁의 아침'이나 '용비어천가' 등의 대단위 주상 복합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으니 말이다. 잘 지은 이름 하나로 소위 대박을 터뜨렸다는 식의 이야기는 여기서 그다지 중요치 않다. 일단 옛 유적지에 그렇게 거대한 빌딩들이 들어선다는 것 자체가 잘 납득이 되질 않지만, 만약 들어서더라도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충분한 발굴조사가 선행되는 것이 정상이 아닐까.

과연 그것이 들어서면 경희궁의 아침을 맞으며 가뿐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까. 그곳에서 잠을 자게 될 사람들은 날마다 경희궁의 아침을 맞는 것이 아니라 경희궁의 종말에 일조 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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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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