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마을 한 여름밤의 선담(禪談)

마당에 차려놓은 저녁밥상에 둘러 앉아서

등록 2002.07.18 15:06수정 2002.07.18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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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작불을 먼저 피우고 쑥대를 얹어 모기떼를 쫓았다.
장작불을 먼저 피우고 쑥대를 얹어 모기떼를 쫓았다.전희식
저녁 밥상에 둘러앉은 사람은 모두 13명이었다. 아니다. 12명이었다. 서울서 온 손님들이 두 식구 도합 5명. 전주 시내에서 매번 우리 집으로 물 뜨러 오다가 오늘 인심 좋은 시골 밥상 머리에 눌러 앉은 모녀 두 사람. 산채효소 담근 걸 먹어 보라고 몇 병 가지고 들른 진안군에 사는 후배네 두 식구. 그리고 우리 식구 셋.


막내 새들이는 이틀째 외유(?) 중이다.

내가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워매~~ 밥상 음식도 골고루이고 입들도 골고루네. 서울서 온 공포의 주둥이. 경상도 문둥이 내 주둥이. 전라도 깽깽이. 워쩌꺼나~~ 신분도 골고루구먼. 주인도 있고 손님도 있고 이웃집 아저씨도 있고 여기…. 바로 여기 예고없이 나타난 불청객도 있고."

반가운 불청객

쩍 벌린 입으로 상추쌈을 가져가던 전주 시내서 온 모녀가 한마디한다.
"불청객이면 저는 가야겠네요?" 엄마가 하는 말이다. 같이 온 딸애는 진담인 줄 알고 갑자기 긴장한다. 미국서 태어나 미국 하이스쿨 2학년짜리다.

"아뇨. 원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예고없이 오신 분이 더 반갑소."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울손님이 말을 받았다.
"그럼 다음부턴 연락 없이 와야겠네요."
"그럼 볼 것 없이 한데서 자야지 뭐. 마당에 돗자리 깔고."
내가 정색을 하고 대꾸하자 와르르 웃음보가 터진다.
"지구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라는 종(種) 모두가 불청객 아니겠어요?"


농사꾼이 제일 즐거운 때는

담가 두었던 매실주를 권하며 호박잎을 된장에 싸 먹었다. 서울서 온 다른 식구가 그래도 밥값이라도 하려는지 소리나게 꿀꺽 음식을 삼키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농사꾼은 자기 논에 물 들어가는 것하고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게 제일 예쁘다면서요?"
"맞소, 맞소. 서울 깍쟁이들은 자기 통장계좌로 돈 들어가는 게 제일 예쁘오?"


별로 우스운 말이 아닌데도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서로 깔깔대고 웃는다. 음식을 이것저것 젓가락으로 집어올려 가지고는 할 일없이 괜스레 이리 갸웃 저리 갸웃 하다가 입으로 가져가는 꼴들을 보고 한 마디 더했다.

"하나 더 있어요. 농사꾼이 예뻐 하는 거. 식사하면서 밥 한 그릇 더 달라는 말. 이 말 하는 사람이 농부 눈에는 제일 예뻐. 또 있다. 이것저것 젓가락으로 집어 올리면서 이건 뭐예요? 저건 뭐예요? 이건 어떻게 만들어요? 저건 뭘로 만들어요? 말 시키면서 '아 맛있다. 아 맛있다'하는 것."

나는 매실주 한잔을 단숨에 들이키고 잔을 탁 소리나게 내려놓고는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밥상 위를 한참 맴돌면서 어디를 공략할까 망설이는 내 젓가락이 들깻잎을 집었다.

장작을 패면서 동경어린 옛추억을 새기는지도 모른다.
장작을 패면서 동경어린 옛추억을 새기는지도 모른다.전희식
이때 같이 농사짓는 진안서 온 후배가 오랜만에 실속 있는 말을 한마디했다.
"근데 농부가 섭섭한 게 딱 하나 있대요. 잔이 비었는데도 아무도 안 따라줄 때!"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울 아줌마와 전주 아줌마가 호들갑을 떨며 술병을 서로 거머쥐고 밀었다 당겼다 야단을 친다.

웬만큼 배가 불러오자 마당 구석에 화톳불을 지피고 잘 마른 쑥대를 올려 모깃불을 피웠다. 매콤한 쑥 타는 냄새가 마당에 가득 찬다. 장작을 패느라 도끼자루 분질러 먹었던 서울 아저씨가 의기양양하다.

'디팩 초프라'와 '탁낱한'

디팩 초프라의 '마법사의 길'이라는 소책자를 집어든 새날이가 되는 대로 한 구절 읽었다.

...성공을 잡는 7가지 마음의 법칙 중 첫번째는 '순수 잠재력의 법칙'이다. 이 법칙은 온갖 가능성과 무한한 창조력의 장이다. 당신이 스스로의 본성을 발견하고 스스로가 진정 누구인지를 알게 될 때, 그 앎 자체 안에 어떤 꿈이든 이룰 수 있는 능력이 들어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영원한 가능성이요,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모든 것의 한량없는 잠재 상태이가 때문이다.

'우와'하는 박수가 터졌다.

이 대목에서 조용히 명상상태가 되어야지 박수를 치면 훌륭한 독자가 못된다면서 진안 후배가 곁에 있는 베트남 탁낱한 스님의 책을 처억 펼친다.

과거에 매이지 말고 미래를 불안해 하지 말라는 설법이었다. 그래서 가족과 중생을 멀리하고 산 속으로 다니며 생활하는 수도승이 비로소 자기가 과거와 미래를 부둥켜안고 혼자긴 혼자되 혼자 잘 살고 있지 못함을 깨닫는 이야기를 읽었다.

전주 불청객이 그랬다.

"와. 갑자기 높은 봉우리에서 구름을 발아래 내려다보며 도사가 되는 기분입니다."
"그래요? 자아, 그러면 우리 한 10m쯤 더 올라 가 볼까요? 이번엔 숭산스님의 선 이야기로 넘어갑니다아."
"악! 산 봉우리에서 10m 올라가면 공중부양이다 공중부양." 전주 모녀의 딸내미가 과장스레 소리 질렀다.

파이프풍경. 인도에서 죽은 후배 희철이가 내게 남겨 준 유물이다.
파이프풍경. 인도에서 죽은 후배 희철이가 내게 남겨 준 유물이다.전희식
모깃불이 얼추 사위어 가자 감자자루를 끌어다가 감자를 굽기 시작했다. 저녁때부터 도끼를 들고 장작을 팬답시고 설치던 서울 손님이 이번에도 먼저 나선다. 어느 메일계정의 이메일 아이디가 winendance 라는 서울 아줌마가 매실주를 먹어서 춤을 출 수 없다고 버티는 걸 wine은 포도주가 아니고 보통명사라고 우겨대니 못이기는 척 하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처마끝에 달린 풍경이 '딩뎅당동뎅'하면서 울었다.

이렇게 2002년 7월 어느 한여름 밤은 깊어만 갔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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