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는 어떤 도인(道人)

채희동, <꽃망울 터지니 하늘이 열리네>

등록 2002.08.25 21:26수정 2002.08.28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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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병진

나는 시를 좋아하긴 해도 열심히 읽는 편은 아니다. 대학 때 시 동아리 활동을 했던 아내를 만난 덕에 남들보다 시를 접할 기회가 더 있을 법도 한데 실상은 그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총각 시절보다 더 시를 읽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어쩌다 시집을 손에 잡고 읽더라도 깊이 음미하면서 읽지 못하니 읽었다고 누구에게 말할 처지도 못된다. 그러면서도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걸 느끼고 상상하며 아름다운 시어를 구사할 줄 아는 시인들을 보노라면 한없이 부럽다.


그들이야 시 한 줄을 얻기 위해 온갖 애를 다 쓰겠지만 읽는 사람은 나처럼 별 생각이나 느낌도 없이 여느 책 대하듯 후딱 읽어 버리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시인들 입장에서는 참으로 야속한 일일지 모르나 그게 오늘의 현실이 아니던가.

갈수록 시를 읽을 줄 모르고, 더 이상 시인을 사랑하지 않으며, 산문만 가득한 삭막한 세상으로 우린 치닫고 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종말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래서 이런 때일수록 날마다 시를 읽고 그 그윽한 속뜻까지 길어 내는 사람은 귀하게만 보인다.

채 목사야말로 그런 사람이 아닌가 싶다. 전문 평론가도 아니면서 시를 이토록 극진히 대접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 전문 평론가의 글이 아니기에 더욱 진실하고 가슴에 와 닿는 것 같다. 그는 시 한 줄 한 줄을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성서 구절을 대하듯 그렇게 묵상하고 있다. 그의 묵상은 여기에 실린 여러 시인들의 보석 같은 시에 못지 않다. 읽어도 그저 밋밋하기만 하고 별 다른 감흥도 오지 않던 시들이 저자가 캐내어 토해내는 속뜻에 저절로 공명하게 되었다.

정현종 시인의 "어떤 성서"라는 시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을 저자가 어떻게 읽어내나 한 번 살펴보자.

등에 지고 다니던 제 집을


벗어버린 달팽이가

오솔길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습니다.



"시인은 말한다. 달팽이는 등에 짊어지고 다녔던 제 집을 벗어버렸노라고.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자기의 삶을 보호해주고, 자기만의 아늑한 공간이었던 집, 자기의 전부라고 여겼던 집, 그래서 한순간도 벗어낼 수 없었으며, 벗어 던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이 집을 달팽이는 과감하게 벗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자기 집에 집착했던 과거의 달팽이에서 이전과 다른 새로운 삶으로 태어난 하나의 위대한 사건이었다. 자기 집착, 자기 독선, 자기 아집, 자기 욕망의 집을 벗어버린 이 일은 달팽이에게 있어서 하나의 종교적 회심이었다."<145쪽>

지은이 채희동 목사 소개

감리교 신학대학과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충남 아산 석정마을에 있는 벧엘교회에서 20여 명의 교인들과 오손도손 목회하며 산다. 가끔씩 어린이의 마음을 담은 동시와 동요를 쓰기도 하며, 우리가락 찬송가 노랫말을 짓기도 했다. 영성 생명 잡지 <하나님, 사람, 자연이 숨쉬는 샘>을 편집, 발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쓴 책은 <민중, 성령, 생명-죽재 서남동의 생애와 사상>(한들), <신명으로 부르는 우리가락 찬송>(공저, 한생명), <교회가 주는 물은 맑습니까?>(쉼)가 있다.

-책에 실린 지은이 소개 중에서
저자는 도통(道通)한 사람 같이 특별한 존재가 도인이 아니라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누구나 도인(道人)이라고 말한다. 인간 자체가 본디 어찌하면 인간답게, 아름답게 살 수 있을까 고민하며 사는 존재라는 거다.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그의 글을 보면 그는 날마다 시를 읽으면서 가야할 길(道)을 깨달아가는 사람 같다. 생활과 가슴에서 우러나온 글이 아닌 담에야 이렇게 맑고 가슴 저미게 만드는 글이 나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후속편이 계속 나왔으면 좋겠고, 읽는 독자들 스스로도 저자가 권하는 것처럼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좋은 시를 가지고 묵상해보는 것도 괜찮은 수양 방법인 듯하다.

더불어서 책을 더욱 빛나게 만든 것은 무엇보다 내용과 절묘하게 어우러진 사진들이었다. 물론 시인은 시로 말하고 목사는 설교로 말하며 사진 기자는 사진으로 말하는 거겠지. 그런데, 이 책에서 이들 셋이 훌륭히 엮여 말 그대로 시너지 효과를 가져온 게 분명하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이 책은 내가 최근에 읽은 가장 향기롭고 다시 읽고픈 책이다.

꽃망울 터지니 하늘이 열리네

채희동 지음,
뉴스앤조이,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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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솔샘교회(solsam.zio.to) 목사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세상' 함께 꿈꾸며 이루어 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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