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왕따'가 되어 주십시오

순천시 '교장단 회의'에 드리는 공개 편지

등록 2002.08.30 16:03수정 2002.09.09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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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저는 순천 효산고에서 근무하는 현직 교사입니다.
먼저, 동양적인 관습으로 본다면 다소 무례하고 외람된 모습으로도 비쳐질 수도 있는 이런 공개편지의 형식을 빌려 이 지역 교육계의 어른이신 교장 선생님들께 글을 올리게 된 것을 퍽 유감스럽고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지난 여름방학 동안 순천지역 대다수의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의 자율적인 의사를 무시한 채 불법적으로 강행된 강제 보충·자율학습이 교육의 참된 모습을 망가뜨리고 학생들의 신성한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이며, 더욱이 교육 관청의 감사에 대비하여 교사와 학생이 함께 공문서를 위조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미래의 꿈나무들에게 도덕적 해이를 조장할 수 있다는 우려 속에, 교육인적자원부 장관님과 전남 교육감님께 공개 편지를 올려 이를 시정해주실 것을 건의한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교육인적자원부(이하 교육부)는 아직까지 보충수업을 허용한 사실이 없으며, 다만 교과별 특기적성교육은 허용하되 희망하는 학생이 희망한 교과에 한하여 실시해야하며, 학생들의 자율학습의 요구가 있을 때 학교는 장소를 제공하되 자율학습비를 징수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는 내용과 함께, 이를 어긴 학교에 대하여는 감사를 통해 시정 조치하도록 하겠다는 답변을 주셨습니다.

보충·자율학습에 대하여 실제적인 감독권을 가지고 있는 전남 교육청에서도 제 개인 메일을 통해 다소 미온적이지만 이와 비슷한 답변을 준 바 있으나, 아직까지 감사를 당해 시정조치한 학교가 있다는 말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일선 교사들은 하나같이 교육관청의 감사가 무슨 실효성이 있겠느냐는 식의 자조적이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오늘 제가 공개 편지를 올리는 이유는 학교의 보충·자율학습에 대하여 실제적인 힘을 행사하고 계시는 순천지역 교육계의 어른이신 교장선생님들과 함께 보충·자율학습이 진정으로 학생과 학부모들을 위한 것인가? 보충·자율학습을 강행할 수밖에 없는 것은 사회의 불평등 구조나 자기 자식만 잘 되면 된다는 학부모들의 이기심리 때문인가? 또한, 이런 현실 논리만으로 보충·자율학습 인해 침해된 학생들의 인권에 대해서는 무심해도 되는가? 도덕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교육현장에서 아이들에게 공문서 위조를 강요하면서까지 불법 보충·자율학습을 강행하여 어떤 교육적인 효과를 기대할 것인가? 등의 중요한 사안에 대한 문제제기와 함께 심도 있는 대화 과정을 통하여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하는 기회를 갖고자 함입니다.

저는 지금 인터넷 신문인 <오마이 뉴스> 교육 칼럼에 학교 아이들과 교육에 관련된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다음은 그곳에 올린 보충·자율학습에 관련된 글을 읽고 학생으로 보이는 한 네티즌이 올린 답글입니다.

'우리는 노예다'


'우리는'이라고 제목이 붙어 있어서 열어보니 '노예다'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단지 그 글자뿐이었습니다. 저는 이 '절규'와도 같은 한 마디가 인권의 사각지대가 된 학교사회의 참담한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증표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에 올려진 글 중에는 이런 내용이 글도 눈에 띄었습니다.

'방학이 없이 학교에 끌려가야 하는 우리나라 고등학교 학생들의 심정을 아는가? 학생들을 위해 당연히 해야할 교장의 몫은 무엇이고 학생들을 직접 가르쳐는 교사의 몫은 무엇일까? 당연히 잘못된 일인 줄 알면서도 고개 숙이고 침묵하며 같이 공모하여 한 길을 가고 있는 고등학교 교사들은 어떤 이유를 들어 자신들을 변명할 수 있을까?'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보충수업비(일명 특기적성교육비)를 내놓고도 많은 학생들이 등교도 안 한다는데 그에 대한 현실의 아픔을 당신들은 얼마나 느끼고 있는가? 내 돈이 아니면 아깝지도 않고 아무 상관도 없는가? 그리고 돈 내고도 학교에 가지 않는 그 학생들이 이 사회에서 무엇을 배우겠는가?'


혹자는 소수의 의견을 전체적인 의견인 양 말하고 있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그럼 소수의 의견을 무시해도 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더욱이 보충·자율학습은 희망자에 한하여 하도록 되어 있는데 희망하지 않는 학생의 의견은 마땅히 들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지요?

그리고 보충·자율학습을 희망하지 않는 학생들이 과연 소수일까요? 자기 의사를 무시당한 채 어쩔 수 없이 교실에 갇혀 잠을 자든지 떠들든지 아니면 학교에 대한, 아니 국가와 사회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거나 자기 삶에 대한 기대와 기쁨과 희망을 잃어 가는 학생들이 과연 몇 명에 불과할까요?

학생들을 집으로 일찍 보내줬을 때 가정이나 도서관에서 자기 주도적인 학습을 할 수만 있으면 좋은데, 대다수의 아이들이 결국 학원에서 비싼 돈을 주고 수강을 받을 것이 뻔함으로 학부모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기 위해서 학교에서 공부를 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교장선생님 중에는 학생들을 강제로라도 학교에 붙잡아 공부를 시켜서 좋은 대학을 보내주는 것이 학생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라는 굳은 신념을 가지신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바로 그런 과도한 신념이 학생들로 하여금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의식을 방기하도록 조장하고, 자기 주도적인 학습을 못하도록 만든 것이 아닐까요?

지금 학원에서의 수강료는 과목당 5만원이 채 되지 않습니다. 하루 4간씩 하는 입시과목 종합반도 15만원 선이라고 합니다. 이 액수는 특기적성교육비와 자율학습비로 학교에 납부하는 금액과 큰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물론 고액으로 입시과목 수강을 받은 학생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학교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면 어차피 학원으로 갑니다.

제가 아는 한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는 고 1이 되어 부푼 마음으로 학교 입학식에 참여하고 다음날 학교에 등교를 했는데, 정상수업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학기초의 북새통에서 아침 0교시 보충수업을 했다고 합니다. 교재도 없고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보충수업은 희망자에 한해서 하는 것이 아니냐고 담임교사에게 여쭈었더니 담임교사의 대답은 이랬답니다.

"희망자 조사는 다음주에 할 거야."

다음 주, 담임 교사는 교실에 들어와 종이를 나누어주고는 어디 어디에 동그라미를 쳐서 내라고 말합니다. 물론 보충수업은 전체 학생이 해야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희망자 조사는 아예 하지도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속으로 불만을 가지면서도 담임교사가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그 아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후 그 아이의 학교 생활이 어땠을까요? 만약 그 아이가 체제에 쉽게 순응하거나 자기 생각이 없는 아이였다면 별 탈이 없었겠지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아이는 거짓말을 가르치는 학교에 대하여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는 정신적으로 아주 건강한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굴욕감과 교사에 대한 실망감으로 인해 우울하고 어두운 학창을 보내야했습니다.

물론 이 아이가 상실한 학창의 즐거움에 대한 보상 책임은 우리 교사에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담임교사가 학생들의 도덕적 해이를 염려하여 이를 거부했다면, 아니 정말 간절한 심정으로 아이들을 위해 눈물어린 호소를 했다면 과연 교장선생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을까요? 아이들을 사랑하는 담임교사의 괴로운 심정을 이해라도 하셨을까요?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대학 졸업장이 필요한 우리 사회의 잘못된 불평등 구조를 보충자율학습을 할 수밖에 없는 요인으로 꼽고 계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 말에는 저도 공감합니다. 그런데 그 불평등 구조를 깰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이 어디에서 나온다고 보시는지요? 오로지 대권을 위한 정쟁만을 일삼는 정치인들일까요? 입시구조를 개선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대학 당국자들일까요?

저는 바로 학교라고 생각합니다. 미래 사회의 주역이 될 아이들에게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깰 수 있는 참된 지식과 용기와 가치관을 심어줄 수 있는 학교 말입니다. 물론 지금의 입시교육으로는 어림없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교육이 정상화되어 진정한 의미의 교육이 실시된다면 가능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 불평등 구조 해소를 위해 교장선생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인지요? 오히려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더욱 더 심화시키는 입시위주 교육을 솔선해서 강행해오신 것이 아니신지요?

지금과 3년 전을 비교해보면 어느 때가 더 이 사회의 불평등 구조가 심할까요. 제 생각에는 별 차이가 없거나 바로 지금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3년 전보다도 몇 갑절 더 보충·자율학습이 극성을 부리고 있는 이 현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제 글을 읽고 혹시라도 이런 주장을 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공부하고 싶어하는 학생들이 어디 있느냐? 하고 싶지 않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이 우리 교육자의 책무가 아니냐? 입시를 눈앞에 둔 아이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인문과목인데 한가하게 사물놀이나 배우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안 맞지 않느냐? 그래서 약간의 강제성을 띠고 하는 것을 가지고 무슨 공문서 위조라는 험악한 말까지 사용하느냐?

저도 공부하기 싫어하는 학생들을 독려하는 것이 교사가 해야할 일이라는 사실에는 공감합니다. 하지만 학생을 독려하는 것은 정규수업 시간만으로도 충분하며, 방과후 여가시간에 대한 주권은 아이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자기 삶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어려운 여건과 환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자기 길을 개척해가는 건강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가 파하면 아이들은 자기 의사에 따라 당연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돌아가서 몸을 깨끗이 씻고 휴식을 취한 다음 자기가 세운 계획에 의해서 여가를 즐기거나 부족한 공부를 보충하면 되는 것입니다. 교사는 학생들에 대한 깊은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여가를 선용할 수 있도록 지도해주되, 샘에 있는 물은 아이들이 스스로 떠먹도록 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학습심리나 교육 철학에 대한 공부가 되어 있지 않는 순박한 학부형들의 생각과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교장선생님의 생각은 달라야 한다고 봅니다. 학교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교육자라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 따라 의견이 다르겠지만 '도덕성'과 '창의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정하는 데 주저하는 사람을 별로 없을 것입니다.

제 소견으로는 이러한 덕목은 무엇보다도 교사의 모범과 아이들에게 자율심을 키워줄 수 있는 학교의 환경조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과연 지금 학교에서 교사의 모범이 발휘되고 있는지요?

학교 입학 후 첫날부터 학생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보충수업을 강행하고, 다음주 공문서를 위조하도록 강요하는 그런 학교 풍토 속에서, 소질과 성향이 각기 다른 아이들을 밤늦도록 한 교실에 가두어 놓고 획일적인 공부를 강요하는 이런 식으로 과연 '도덕성'과 '창의성'이 아이들의 삶 속으로 스며들 수 있을까요?

'순천시 교장단회의'에 소속된 교장선생님 중에는 동료 교장선생님들께 왜 이런 말씀을 해주시는 아름다운 교장선생님은 계시지 않을까요?

"우리 고1 짜리들만이라도 방학을 스스로 계획을 세워서 보내게 해봅시다. 고3은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다지만 올해는 고1짜리, 내년에는 고2까지 확대하여 방학을 아이들에게 돌려줍시다. 그래서 자연과 책과 여행을 통하여 큰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해줍시다. 그런 알차고 의미 있는 방학을 지내고 나면 더 열심히 공부를 할 수도 있습니다."

저도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현실의 어려움을 인정합니다. 문제는 우리 교육자들의 심중에 '0%의 이상과 100%의 현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50%의 이상과 50%의 현실'만이라도 존재하는 곳이라면 이렇게 참담한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현실만 있고 이상이 없는 학교는 이미 학교로서의 자격과 가치를 상실한 것이 아닐까요?

이제 글을 마치면서 저희 학교 얘기를 좀 해드리겠습니다. 저희 학교는 상업계 학교입니다. 그래도 대학에 진학하려는 학생들의 요구가 있어서 진학반을 만들어 특기적성교육 시간에 희망자에 한하여 교과별 특기적성교육을 해주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보충수업이 수익자 부담으로 되어 있지 않았던 시절에는 밤늦게까지 학교를 개방하여 영어 특강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물론 무료 봉사였습니다. 아이들은 대체로 가난해서 학원에 나갈 돈도 없었지만 워낙 기초한 부족한 아이들은 학원 수강이 도움이 되지도 않았습니다.

특히 과거 취업반 학생들은 금융계통 시험을 대비하여 학교에서 밤을 꼬박 새워 공부를 하였고, 저도 몇 분 선생님과 같이 늦은 밤까지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어느 누구의 강요도 없었고 물론 금전적인 보상도 없었습니다. 제자와 스승 사이에는 감사와 사랑이 오고 갔을 뿐입니다. 그것이 원래 의미의 보충수업이 아닐까요?

올해 2학기부터는 3학년에 한해서 희망자에 한하여 자율학습을 하기로 했는데, 처음에는 욕심을 부려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은 다 했으면 했지만 강제로 하면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3학년 담임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희망자에 한하여 하도록 교장선생님이 결정을 내리신 것입니다. 저는 그런 교장선생님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저희 교장 선생님도 요즘 '왕따'가 되어 조금은 심기가 불편하신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죄송스런 마음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마음으로부터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기에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교장 선생님, 아름다운 '왕따'가 되어 주십시요."

저는 이런 공개 편지를 쓰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옳은 일을 하더라도 누군가와 대적한다는 것이 제 성격이 맞지도 않고, 더욱이 교육계의 어른이신 교장선생님께 무례를 범하는 일이 될까 두렵기도 했습니다. 저희 같은 평교사는 알 수 없는 고충이 계시리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존경할 만한 교장선생님도 많이 계실텐데 조직사회의 생리상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죄를 짓고 계시는 분도 계시겠지,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생각이 바뀐 것은 며칠 전 물가에서 한가하게 뛰노는 어린아이들을 발견한 뒤였습니다. 저렇게 여리고 푸른 아이들이 고등학생이 되면 학교라는 감옥 속으로 들어오겠구나. 진실과 상식이 통하지 않고, 사람과 사람의 소통이 단절된 곳으로 발을 들여 저 아이들의 푸르디푸른 영혼들도 곧 시들어가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러면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유서를 남기고 어린 나이에 한 많은 생을 마감한 한 소녀의 악몽 같은 기억이 되살아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저만의 감상일까요?

저는 이 부족한 편지가 동료교사들에게도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작은 계기가 되기를 감히 소망해봅니다. 그리하여 '자율학습비 안 받기 운동'이나 '희망하지 않는 아이들은 집으로 가게 해주기 운동'과 같은, 지금 할 수 있는 작은 일들부터 실천해보았으면 합니다.

'사랑'은 그 사람의 주체를 인정해주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번 기회에 학부형들께서도 자식에 대한 사랑의 태도를 다시금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자신도 이번 기회를 통해 많은 반성을 하려고 합니다. 다시 한 번 교장선생님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글을 마감할까 합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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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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