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존재 이유는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의 인권을 생각하는 교사들이 많아지길 바라며

등록 2002.09.01 09:31수정 2002.09.09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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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루사'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태풍은 바다를 썩지 않게 한다는 말이 있지만,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지혜, 그 범주를 벗어난 듯하여 자못 불안한 마음입니다. 이번 태풍으로 직접 물난리를 겪고 있는 강릉 지역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수재민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기만 합니다.

어제는 저에게도 작은 태풍이 지나갔습니다. 학교 전교조 분회원 선생님들과 회의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먼저 주요 안건을 처리하고 남은 시간에 순천지역 보충·자율학습의 실태에 관한 이야기를 잠깐 나눌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길어지고 말았습니다. 나중에는 고성까지 오고가는 불미스러운 사태까지 생겼습니다.

모든 것이 사회자인 제 불찰이었습니다. 전교조가 대중화되고 비대화되면서 어떤 사안에 대한 시각들이 다양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데도, 저부터가 그것을 인정하는 데 인색했던 것입니다. 결국은 제가 사과를 하고 일은 잘 마무리가 되었지만, 제 자신 오랜 동안 그 앙금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집(집이 참 좋은 곳이더군요)에 와서 잠깐 수면을 취한 뒤에 차분해진 마음으로 분회원님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물론 사과의 편지였지만 조합원 연수를 겸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 동안 분회장인 저의 불찰로 조합원 연수를 게을리 했던 결과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효산고 분회원 선생님들께 올립니다♥

안녕하십니까? 혹시라도 태풍에 피해는 없으신지요?
먼저, 오늘 회의를 매끄럽게 진행하지 못한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 자신부터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미숙함에서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배움의 과정이겠지만, 진심으로 머리 숙여 사과를 드리고 싶습니다.

지난 여름, 저는 인터넷 신문인 <오마이 뉴스> 시민기자로서 순천 지역의 방학중 보충·자율학습 실태를 취재한 적이 있습니다. 상당수 학교가 냉방장치가 되어 있지 않은 교실에서 학생들의 개인적인 의사와는 상관없이 오후 6시까지 보충·자율학습을 강행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기사를 정리하면서 아이들의 인권 문제와 도덕성 해이에 대한 심각한 문제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이 각기 다르듯이 보충·자율학습에 관한 의견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학생의 희망의사와는 상관없이 불법적으로 무리하게 행해지는 것이라면 누군가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아니 조금이라도 완화되어 학생들의 피해를 줄일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마음에서 교육부장관님과 전남교육감님 그리고 순천지역 교장선생님께 편지를 올렸던 것입니다.

동의하시겠지만,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연륜이 짧다보니 경제적으로는 세계 선진국 대열과 끼어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존중이나 인권 문제에 관해서는 아직도 미개척지로 남아 있는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우리 교사들도 학교장의 교권 침해에 대해서는 발끈하여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정작 학교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학생의 인권 침해에 대해서는 크게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미국에서 자녀를 키우고 있는 한 네티즌으로부터 <오마이뉴스>에 올린 기사에 대한 답장을 받았습니다. 긴 편지글 중에 이런 글귀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용기(한국의 상황에서는 용기가 되겠지만 다른 선진국의 시각으로는 왜 저 선생님이 저런 불필요한 말을 하시지 의아해 할) 있는 행동에 박수를 보냅니다.'

'선진국의 시각으로는 왜 저 선생님이 저런 불필요한 말을 하시지 의아해 할'


저는 바로 이 대목에서 강한 공감과 함께 심한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과거 군사정권 때와는 달리 우리 사회도 풀뿌리 민주주의가 정착되어 가고 있으며, 세계인의 이목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만큼 경제대국으로서의 면모도 갖추어가고 있습니다. 여기에 발맞추어 우리 교사들의 양식과 아이들에 대한 태도도 차츰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을 갖기도 했습니다.

'여기는 한국이다'라고 고집을 부릴 때는 지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성숙한 세계인들과 함께 삶을 나룰 수 없는 '뭔가 부족한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기도 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선진국들은 근대화, 혹은 민주화의 과정에서 많은 고통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과거의 틀이 깨어지는 아픔이었지요. 그런 고통의 과정을 통해서 한 나라의 임금과 백성 한 사람의 인간적 가치가 동일해지는 기적을 이룬 것이지요.

제가 기적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인간 평등' 사상은 불온하기 짝이 없는 혁명적인 발상이었기에 그런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도 극히 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이런 토론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역사는 분명 발전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일제 감정기를 지나 미군정 시대로 넘어오면서 어정쩡하게 민주주의가 도입되었고, 거기에 민주주의가 적이 될 수밖에 없는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으로 인해 입은 상처가 아직도 회복되지 않아 사회와 우리 내부에 아직도 반민주적이고 반인권적인 요소들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오늘 한 분회원님은 '왜 전교조가 남의 학교의 보충수업에 관여하느냐?"고 언성을 높이셨습니다. 저는 그 말에 너무 충격을 받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제가 사회자로서 감정을 자제하지 못한 바람에 차분하고 생산적인 토론으로 이끌지 못한 것만 같습니다. 사람마다 살아온 배경이 다르고 경험이 다른데 같은 생각을 해주기를 바란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하지만 전교조는 분명한 강령을 가진 단체임으로 이 문제를 짚고는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전교조의 강령은 '교육의 민주화', '교육의 인간화' 두 가지로 요약 정리할 수 있습니다.

전교조의 전신이던 전교협이 태동하던 그 당시, 많은 아이들이 죽어갔습니다. 그 무렵, 꽃다운 나이에 자살이라는 극단의 방법을 택한 아이들 중에는 전교 2등의 우수한 성적을 지닌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아이는 왜 스스로 세상을 버렸을까요? 그것은 오로지 1등만을 요구한 부모의 집착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집착은 부모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적만으로 인간의 전체 가치를 재려고 하는 그릇된 가치관이 사회에 팽배해지면서 그런 일들이 생긴 것이지요. 또한, 그 아이의 타고난 능력과는 상관없이 1등만이 대접받는 이 사회의 불평등 구조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거기에 학교마저도 그 아이의 찢겨진 마음을 위로해주지 못했습니다. 한 아이의 상처를 어루만져줄 만큼 학교는 한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 아이의 영혼보다도 학교 전체의 진학률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학교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은 '공부하는 기계'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전교조는 이런 배경 속에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아이들의 시름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교사의 '사랑'이 모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교사의 존재 이유는 바로 '아이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바른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학교 환경을 조성해줌으로써 '공부하는 기계'로 전락한 아이들을 구해야한다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뜻으로 시작한 것이 바로 전교조 운동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교직사회가 민주화 되어야 학교가 인간화 된다는 맥락도 있습니다.

입시위주 교육을 심화시키는 보충·자율학습은 교육의 참모습을 해칠 수밖에 없습니다. 교육의 참모습을 해친다는 것은 바로 윤리과목의 교육목표가 '윤리적 인간'에서 '윤리시험에서 만점을 맞는 학생'으로 변질된다는 뜻입니다. 교직사회에서 당연히 야기되어야할 이러한 문제제기가 너무도 낯설게만 느껴지는 것이 우리의 아픈 현실이기도 합니다.

보충·자율학습을 학생들의 개인 의사를 존중하지 않고 획일적으로 강행하다보면 교과서에서 배운 민주주의의 원칙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또한 그 강제의 과정에서 교사와 학생 사이의 인간관계가 깨어지고 맙니다. 교육에서의 가장 큰 덕목인 '사랑'이 발휘될 구조 자체가 망가지고 마는 것입니다. 국민의 세금을 가지고 정부나 학교는 헛공사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학교에서 보충·자율학습이 무리하게 실시되어 문제가 되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 외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특히 선진국에서는 이런 일이 구조적으로 발생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같은 자본주의 사회라 하더라도 우리나라에 비해 사회의 불평등 구조가 완화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떤 특별한 뜻을 가진 사람이 아니더라고 상식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일에 대하여 당연히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학교 현장의 분위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현실'이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우리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현실의 사슬은 갈수록 더욱 더 심하게 우리를 조여올 것입니다. 그 충격과 고통을 아이들이 모두 감당하게 되겠지요. 우리 교사들이 잘못된 것을 명확하게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그 사이에 또 몇 명의 꽃다운 아이들은 소중한 목숨을 스스로 버릴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글을 마칠까 합니다. 분회원님들께 사과의 편지를 올린다는 것이 또 제 주장을 늘어놓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저에게는 누구보다도 분회원님들의 따뜻한 이해와 사랑의 눈길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아래의 글은 서울에 있는 한 인문고에서 근무하시는 선생님께서 제 기사에 대한 답글로 올려주신 글인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함께 보내드립니다. 그럼 가족들과 좋은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저는 서울에 있는 한 인문계 고등학교 교사입니다. 우리 학교는 지금껏 교육부의 지침에서 벗어나지 않는 교육을 해온 학교라고 생각됩니다. 인근학교들이 신입생들부터 잡아 앉혀 놓고 '강제 야간자율학습'(이 절묘한 反언어 조합을 보십시오!)과 보충수업을 공공연히 실시할 때도 원칙을 고수해온 학교였습니다. 이런 우리 학교에 대해 학부모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습니다.

'왜 그 학교는 아이들을 일찍 귀가시키느냐'
'왜 늦게까지 아이들을 잡아서 자습시켜주지 않느냐'
심지어는 '그 학교는 인문계가 아니라 공고냐?'라는 말까지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올해 들어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교육부는 누군가의 비위를 맞춰주듯 갑자기 '희망학생에 한해 교과에 관한 특기 적성교육이 가능하다'라고 지침을 내렸고, 기다렸다는 듯이 대부분의 고등학교는 문제풀이식 보충수업을 부활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학교도 당연히 그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죠.

교육부 당국자들은 늘 똑같은 말을 합니다. '희망자에 한해 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그러나 고등학교 현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교사든 학생이든 누구라도 이 말에 코웃음을 칠 것입니다.

'특기적성 희망자 동의서'! 이 말은 '강제 보충수업 억지 동의서'라는 뜻입니다.
'특기적성'이라는 단어가 '입시 대비 문제 풀이'라는 뜻으로 바뀌었습니다.
'희망자'라는 단어는 '개인의사와 절대 무관함'이라는 뜻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철저한 反국어 교육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곳이 바로 지금의 학교입니다.

자, 그럼 이렇게 문제의식을 절실히 느끼면서도 왜 교사들이 상황을 바꿀 수 없는 걸까요?
먼저 교육부 당국자들의 비교육적인 가치관 때문입니다. 입시제도라는 현실 논리는 그들의 공고한 보호처이며 학부모가 원하고 일부 교사들이 원한다면 보충수업 부활쯤은 당연히 있어도 된다는 가치관.

둘째는 교육관리자들과 일부 교사들의 구시대적 교육관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만 방과후 시간을 맡겨놓는다는 것은 교사로서의 무책임이며, 대책 없이 학원으로 아이들을 내모는 일이라는 일면 비장한 책임감을 토로합니다. 그러나 교사들은 늘어난 수업시수 때문에 '질보다 양' 식의 수업을 하게 되고 아이들은 보충수업이 끝난 후 여전히 학원으로 달려갑니다.

셋째로 학부모의 강박적인 불안심리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 자율적인 시간을 주면 제대로 공부하지 않는다, 억지로라도 학교에 앉혀 놓으면 아무리 안 한다 해도 한 글자라도 더 들여다보지 않겠느냐, 라는 병적인 불안심리. 이 불안심리를 조장해온 한국사회의 철저한 학연, 지연 위주의 부패구조.

이런 모든 것들이 맞물려 지금 학교 현장은 어떻게 손 쓸 수 없이 병들어 있습니다.

교사로 근무하는 동안 전교조를 통해 우리의 목소리를 모으기도 했고 신문사에 교육문제에 관해 투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당국자들의 반응은 참으로 우스운 것이었습니다. 담당 장학사가 우리 학교로 전화를 했고, 저는 학교로부터 학교 문제를 외부에 투고하는 행동을 자제해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우리 학교만의 문제를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언론에 호소하는 일은 결국 일개 교사의 개인적인 불만으로 취급되어야 했습니다. 저는 지금 거대한 부패구조 앞에서 어떤 수단을 통해 모든 부조리를 고발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학기는 제 양심상 강제 보충수업을 시킬 수 없어 학부모의 동의가 있는 학생들을 보충수업에서 빼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정규수업처럼 당당한 자리를 차지한 보충수업 앞에 저 역시 아이들에게 전원 참여를 지시했습니다. '나도 정규수업처럼 된 체제에서 더 이상 너희 뜻을 받아줄 수 없다'는 자조적인 고백과 함께. 저는 이런 과정에서 제 존재가 분열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옳다고 믿는 것을 지키고자 하는 자신과, 체제 속에 순응해야 하는 비겁한 나. 이렇게 두 개의 자아가 분열되는 것입니다.

교육부와 교육청의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렸으나 언제나처럼 앵무새 같은 답만을 되풀이하는 당국자들. 이제는 분노를 넘어서 냉소만이 남게 됩니다. 게시판에 올라온 아래 글 중에 법원에 고발하라는 말이 보입니다. 누구를 고발해야 할까요? 가치관이 전도된 우리 사회 전체, 교육부, 교육청, 학부모, 그리고 학교현장 전체를 고발할까요?

주변의 지인들은 하나둘씩 아이들을 위해 교육이민을 떠납니다. 어느 누구도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이 나라 교육을 고칠 수 있다는 생각은 엄두도 못 냅니다. 제가 그나마 기댈 수 있는 마지막 언덕은 전교조와 언론입니다. 현장에서 외치는 제 목소리가 미약할지 모르지만 지금 제 말속엔 숨막혀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학생들의 목소리도 섞여 있습니다. 누군가 알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교육현장을 저주하며 이민가지 않고, 이 곳에 남아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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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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