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아이들이 깊어진다

등록 2002.09.05 09:41수정 2002.09.05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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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되자 나뭇잎이 마르기 시작한다. 벌써 수영장 가의 버즘나무들은 툭툭 제 잎을 떨구고 있다. 떨어진 마른 잎들을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다. 머지 않아 저 나무들 제 옷 다 벗어버리고, 맨 몸으로 매운 바람과 맞서리라. 그 맞서는 힘으로 제 안을 다 단련시켜, 다시 봄이 오면 제 몸 안에서 어린 영혼처럼 순결한 연초록 새잎들을 틔워내리라.

은행나무는 눈부시게 샛노란 잎새를 제 발치 가득 쌓아둔다. 아침이면, 학교 가득 쌓인 나뭇잎들을 아저씨들이 쓸어모아 태운다. 리어카에 커다란 드럼통을 싣고, 운동장 곳곳, 학교 이곳저곳에 어제 아이들이 버리고 간 휴지와 쓰레기를 쓸어 담아 태우면서, 떨어진 나뭇잎까지 섞어 태운다. 덕분에 쓰레기 타는 냄새보다 낙엽 태우는 냄새가 교내 가득 퍼진다. 그 냄새는 온갖 잡동사니 쓰레기 타는 독한 냄새가 아니라서 좋다. 마른 나뭇잎과 아직 덜 마른 나뭇잎이 어울려 탈 때는 숲 속, 나무들이 어울려 피워내는 향내가 나기도 한다.

학교의 나뭇잎은 아이들 얼굴을 닮아 있다. 버즘나무의 넓적한 잎은 큰 바위 얼굴이라고 놀림받는 얼굴 큰 아이들을 닮아 있고,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간 은행잎은 갓 입학한 신입생 얼굴을 닮아 있다. 그 여리고 보드랍던 봄날의 은행잎이 가을이면 제 얼굴을 키워 노랗게 물들 듯, 그래서 세상을 온통 눈부신 가을빛으로 채우듯, 초등학교에서 갓 입학한 아이들도 솜털이 보송보송한 얼굴에서 가을이 되면 이제 어엿한 중학생 티를 내기 시작한다. 그 중학생 티로 비로소 중학교는 중학교다워진다.

오늘 아침도 아저씨들이 리어카에 드럼통을 싣고, 드럼통 가득 쓰레기와 나뭇잎을 담아 태우며 운동장을 가로지른다. 드럼통에 붙은 불은 꺼질 듯 하다가 갑자기 불길을 하늘로 힘껏 뿜어 올리기도 한다. 몇몇 아이들이 신이 나서 아저씨 뒤를 좇는다. 아니 아저씨 뒤가 아니라 불붙은 드럼통을 따라다닌다. 불빛에 아이들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다. 어떤 녀석은 나뭇잎을 한아름 주워다 드럼통에 던져 넣기도 한다.

나는 교무실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고 코를 큼큼거린다. 음, 이건 버즘나무잎 타는 냄새, 이건 은행잎이고, 이건 수수꽃다리 냄새, 아니 이건.... 아, 이건 나뭇잎이 아니라 비닐 타는 냄새군. 나는 마치 도통이라도 한 것처럼 냄새를 구분한다. 그러나 그 구분은 내 마음의 구분일 뿐, 실제 그런 잎들이 타는 냄새인지 알 수 없다. 마치 내가 늘 아이들을 번호로 나누고, 성적으로 나누고, 성격으로 나누고, 환경으로 나누고..... 나누고 나누고 나누며 아이들을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러나 아이들은 그 나누는 틀 밖에서 늘 제 나름대로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하여간, 가을이 깊었다. 그리고 아이들도 가을처럼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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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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