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미야, 수미야"

교육장편소설 <그 집의 기억> 44

등록 2002.09.02 12:55수정 2002.09.02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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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교시, 일 학년 오 반 수업이다. 나는 바삐 계단을 올라간다. 오 반은 학생부실 바로 앞이라 특히 신경이 쓰인다. 선생이 좀 늦게 들어가면 쉬는 시간보다 더 시끄러운 것이 일 학년 교실이다. 떠드는 소리가 조금이라도 나면 눈썹을 치켜올리며 학주가 나타나 야단을 칠 게 뻔하다. 괜히 아이들 야단 맞는 것이 싫어 오 반 수업이 든 시간은 서두르게 된다.

교과서를 펴고, 수업을 막 시작하려는데 복도 쪽에서 왁자지껄 소리가 들린다. 말투로 보아 실갱이를 하는 듯하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책을 덮고 교실 문밖으로 나가본다. 복도 끝에서 두 녀석이 한 아이를 부축하고 오는데, 부축을 받은 아이가 온 몸에 맥을 놓고 질질 끌려온다.

"무슨 일이냐?"
내가 묻자 부축을 한 아이 하나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답한다.
"학주 선생님이 얘를 데려오래서요."
그러자 부축을 받은 녀석이 게게 풀린 소리를 지른다.
"학주? 학주 말야. 난 학주가 존나 싫어. 싫단 말야."
녀석이 입을 열자 술 냄새가 확 풍긴다. 취한 듯 혀가 꼬부라진 소리다.

"이 녀석 술 마셨구나."
그때 갑자기 학생부실 문이 휙 열리며 학주가 뛰어나온다.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눈썹까지 치켜 올라간 것이 무척 화가 난 표정이다.
"이리 끌고 와!"
그러자 부축을 한 아이 둘이 녀석을 끌다시피 학생부실로 들어간다.

교실 창 너머로 아이들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런 상황을 내다본다. 나는 다시 교실로 들어가 수업을 진행하지만, 나도 아이들도 수업보다 녀석의 다음 일이 궁금하다. 그런데 몇 분 후 다시 학생부실에서 큰 소리가 나온다. 나는 아이들에게 조용히 있으라고 하고, 학생부실로 들어가 본다. 혹시 문제가 생기면 말리겠다는 심사에서다.

"수미야, 수미야. 보고 싶어. 어딨니? 난 수미랑 결혼할 거야. 고등학교 가서 꼭 수미 다시 만날 거야. 알았지? 말리지 마. 말리지 말란 말야."
학생부실에 들어서자, 술에 취한 녀석은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고, 학주는 어이가 없는지 당황했는지 녀석을 노려보며 더듬거리고 있다.

"저... 저런 놈. 어디서 아침부터 술이나 퍼먹고..."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나도 어이가 없어 학주의 얼굴을 쳐다보며 묻는다.
"허, 참. 기가 막히네. 아 글쎄 아침에 저 녀석이 와서 같이 등교하던 친구 하나가 공사장으로 들어가서 여태 안 온다고,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는지 모르겠다잖아요."

말인 즉슨 이랬다. 아침에 같이 등교하던 세 녀석 중 술을 마신 명석이라는 녀석이 갑자기 학교 거의 다 와서 나머지 둘에게 먼저 가라고 하고는 학교 옆 공사장으로 들어가버렸다는 거였다. 학교 옆은 주택 재개발 사업이 진행 중이라 멀쩡한 건물을 부수기도 하고, 아직 이주를 하지 못한 사람이 무너진 집들 사이에서 살림살이를 하기도 하는 등 어수선한 곳이었다.


나머지 두 녀석은 아마 소변이 급해서 그렇거니 하고 그냥 먼저 학교에 왔단다. 그런데 금방 오겠거니 한 명석이는 일 교시가 다 끝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거나 아닌가 덜컥 겁이 난 두 아이가 학생부에 찾아가 신고를 했고, 학생부에서는 두 녀석에게 명석이가 사라진 공사장으로 가보라고 했는데, 저렇게 술이 곤죽이 돼서 왔다는 거였다.

아이들 말로는 이미 소주를 두 병이나 해치운 뒤였단다.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소주를 두 병이나 마셨다면 거의 들이부은 것이리라. 술에 이골이 난 아이도 아닐테고, 갑자기 마신 술에 정신이 다 달아나 버렸을테니 저렇게 난리를 치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싶다.
"도대체 뭣 때문에 저렇게 난리냐?"


내가 옆에 서 있는 두 아이에게 묻자, 녀석들이 머뭇거리다 대답한다.
"명석이가요, 요새 여자 친구와 헤어졌거든요."
"수미가요, 수미가 여자친군데요, 공부해서 인문계 가야 된다고 더 이상 안 만나겠다고 했어요."

두 녀석의 말로 미루어 아마도 명석이가 수미와 헤어지고 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해 술로 풀어버린 것 같았다. 그때 두 녀석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갑자기 명석가 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그래. 나 수미랑 꼭 결혼할 거야. 아아, 수미야! 수미야! 나도 인문계 꼭 갈 거야. 가서 수미 꼭 다시 만날 거야. 사랑해, 수미야!"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혀 꼬부라진 소리로 명석이는 아예 학생부실 바닥에 주저앉아 버린다.

그 꼴을 보고 어이가 없는지, 학생부장이 소리를 지른다.
"저런 멍청한 놈.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더니, 겨우 계집애 하나 때문에 이 난리야."
학생부장의 말에 명석이가 이번에는 학생부장을 향해 몸을 돌리고 또 소리를 지른다.

"계집애가 아녜요. 수미, 수미란 말이야, 씨."
명석이의 말에 학생부장이 화가 나는 지 소리를 버럭 지른다.
"뭐? 씨. 이놈의 자식이. 머리는 어디서 잔뜩 길러 가지고..."
아마 쥐어뜯는 녀석의 머리가 그 순간 학생부장의 눈에 들어와서 그랬나보다. 그런데 명석이가 대뜸 그런 학생부장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머리? 그래, 나 머리 길어. 머리 기니 어쩌란 말야. 씨발. 난 학주가 존나 싫어. 맨날 머리나 짤르고…."
그러더니 녀석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제 머리를 두 손으로 왼쪽, 오른쪽 길게 잡아당기면서 학주의 얼굴에 들이대고 소리를 지른다.
"자, 짤라봐라, 짤라봐. 내 머리 길다니까. 짤라봐."
학생부장이 깜짝 놀라 얼른 한 발 뒤로 물러선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가장 무서운 선생님으로 알려진 학생부장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대드는 아이들을 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기겁을 할 일이 아닐 수 없으리라.

"저, 저런…."
학주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더듬더듬 튀어나왔는데, 명석이는 또 그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털썩 주저앉아 소리를 질러댄다.

"수미야, 보고 싶어. 나 성적 올려서 꼭 고등학교 갈 거야. 고등학교 가서 수미랑 꼭 결혼해 행복하게 해줄 거야. 수미야, 수미야. 나 공부 못한다고 무시하지 말어. 나 진학할 거야."
나는 얼른 학생부장을 부축해 자리에 앉힌다.
"술 주정이라 생각하고 피하십시오."
그리고는 물을 한 컵 따라다 명석이에게 먹인다. 녀석은 꿀물처럼 달게 한 번에 다 들이킨다.

그때, 학생부실 문이 열리고 한 아주머니가 들어선다. 막 시장에서 장사를 하다 왔는지, 앞치마와 전대까지 그대로인 채다.
"아이고, 이 녀석아. 이게 뭔 짓이여!"
아주머니는 들어오자마자 주저앉은 명석이에게 다가가 등짝을 한 대 후려친다.
"어, 엄마. 왜 때려, 씨이."
명석이의 주정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두 녀석이 아주머니를 보고 꾸벅 인사를 한다.
"죄송합니더. 증말 죄송합니더."
아주머니가 나와 학생부장을 향해 번갈아 고개를 숙인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술이나 처먹고…. 얼른 데리고 가십시오."
학생부장이 더는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명석이 어머니에게 툭 한마디 내던지고 돌아앉는다.

"자, 자. 어서 데리고 가십시오. 오늘은 학교에 더 있어봤자 다른 아이들 놀림감이나 될테니. 나중에 술 깨면 찾아와서 학생부장께 사과하시고, 오늘은 데리고 가십시오. 너희들이 좀 집에까지 부축하고 갔다 오렴."
나는 명석이 어머니와 두 녀석에게 번갈아 말한다. 두 녀석이 부축을 하고, 명석이 어머니가 뒤따라나가며 연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다.

벌써 수업 끝나기 오 분 전이다. 나는 얼른 교실로 들어간다. 그러나 수업을 진행하기에는 이미 늦어버린 시간이다. 웅성거리던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고, 나는 운동장을 내다본다. 거기 사랑에 실패하고, 공부도 못하는 명석이가 비틀대며, 친구의 부축을 받아 운동장을 건너간다.

나는 갑자기 그 아이가 걸어가는 운동장이 마치 푹푹 가라앉는 사막의 모랫길처럼 느껴진다. 어린 나이에 힘겨운 세상의 길을 지쳐 걸어가는 녀석의 걸음이 그 사막에 점점 빠져들고, 한 발을 빼내면 다른 발이 더 깊이 빠지는 세상의 길을 비틀대며 휘청대며 걸어가는 대한민국 중학교 대부분의 아이들 모습이 명석이 뒷모습에 겹쳐지는 것은 왜일까?

종이 울리고, 나도 푹푹 빠지는 것 같은 시멘트 계단을 디디며 교무실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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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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